한반도 문제에 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일단 북한을 때리고 보는 것이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핵야욕을 비난하고, 굶주리고 있는 북한 주민들에게 동정의 시선을 던지는 척 하면서, 그래서 그 정권을 붕괴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김대중 정부 이후 추진된 대북 포용정책은 실패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끝을 맺으면 된다.
김정일 때리기가 한반도 문제에 대한 '입장'과 '정책'의 전부라고 믿는 한국의 수구세력과 수구언론들은 문제해결의 방법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방법으로 지지율과 신문 판매부수를 지켜 왔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6일 내놓은 '엠비(MB) 독트린'이 택한 방식도 바로 그것이었다.
외신기자 간담회라는 자못 '글로벌한' 방식으로 자신이 집권했을 경우 펼칠 외교안보정책 구상을 내놓은 이 전 시장은 김정일을 "장기 독재자"라고 규정하며 김정일의 행동을 '촉구'하는 것으로 한반도 문제에 대한 '비전'을 대신했다.
그러나 이 전 시장의 '독트린'은 '한국 외교의 창조적 재건과 비전'이라는 거창한 연설 제목에 걸맞지 않게 알맹이 없는 속빈 강정이었다.
'독트린'의 내용이 너무나 추상적이라는 것 자체도 하자일 수 있겠으나, 그 중 가장 결정적인 하자는 당대 최고의 한반도 문제인 북한 핵을 어떻게 폐기할 것이며, 한반도의 평화정착은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에 대한 내용이 전무하다는 것이었다.
이 전 시장은 "북한은 동결이 아닌 핵의 완전 폐기를 행동으로 실천해야 한다"며 "김정일 위원장은 핵을 포기하고 개방을 택하는 대결단을 내릴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만 했을 뿐 차기 정부가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8일부터 시작되는 6자회담에서는 북한이 핵을 폐기하기 위한 초기단계 이행조치를 취하면 미국 등 참가국들이 어떤 상응조치를 제공할 것인지에 대해 협상이 벌어질 예정이다. 이처럼 북핵 폐기라는 것은 김정일의 일방적인 결단이 아니라 관련국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이뤄지는 매우 복잡한 과정이다.
이때 한국 정부가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이며, 예컨대 미국이 핵폐기 상응조치로 중유를 단독으로 줄 수 없다면 한국이 주도해 6자회담 참가국 컨소시엄을 만든다거나 대북 송전계획을 앞당긴다거나하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정책을 한국 정부는 내놔야 한다.
이것은 한반도 문제의 핵심인 북핵 폐기 과정의 요체, 즉 '핵심 중의 핵심'이며 대통령이 되려는 이라면 그 무엇보다 바로 이 문제에 관해 답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6자회담이 어느 정도 진전이 있으면 뒤이어 따라올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논의에 대한 비전도 전혀 없었다. 7개 독트린 조항 중 남북관계와 한미동맹을 얘기한 앞의 3개 항을 제외하고는 '문화 코리아' '에너지 실크로드' 같이 선언적이고 추상적인 내용으로만 채워졌다.
다만 이 전 시장은 북한이 핵을 폐기하고 개방을 한다면 10년 내에 국민소득 3000달러를 달성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는 말로 '경제지도자'라는 자신의 이미지를 한반도 문제에까지 적용시키려 했을 뿐이다.
하지만 거기에도 역시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 없었다. 그저 "북한이 올바른 선택만 한다면 짧은 기간 안에 경제의 새로운 동력을 얻게 될 것"이라는, '하면 된다'는 식의 주장이 전부였다.
이날 발표가 종합적인 외교안보정책을 제시하는 첫번째 무대였다지만, 이토록 졸속적인 내용으로 무슨 비전을 제시하겠다는 건지 납득하기 힘들었다. 이 전 시장의 자문단으로 활약하는 기라성 같은 외교안보 전문가 수십 명이 수개월간 준비했다는 후문이 믿겨지지 않았다.
끝으로, 김정일을 '장기 독재자'라고 지칭한 게 이 전 시장의 생각이라면 그 인식을 탓할 생각은 없다. 많은 우리 국민들도 역시 비슷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다만 대통령이 되어서도 그런 언어를 구사할 경우 과연 김정일의 핵폐기와 북한의 개방을 이끌 수 있을 것인지가 의심스럽다. 2008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고, 한국에는 '김정일은 독재자'라고 말하는 대통령이 당선될 경우 김영삼 정권 시절의 저 악명높은 '통미봉남(通美封南)' 시절로 돌아가는 게 아닌지 우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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