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제멋대로 떠들고 난장을 친다 한들 보랏 사디예프는 최소한 틀린 점이 하나 있다. 보랏 사디예프가 누구냐고 묻지말라. 그건 결코 영화전문지를 보는 독자가 할 짓이 아니다. 보랏은 18일 이후 극장가를 통해 카자흐스탄 국영 TV리포터로 알려지겠지만 그렇다고 그 인물이 꼭 그 인물이 아니다. 진실은 영화를 통해서 확인들 하시라.어쨌든 이 흉악한 인간 보랏은 (그게 비록 패러독스이긴 하지만) 겉으로는 신나게 반여성주의를 떠든다. 여자의 두뇌는 남자보다 작다나 어떻다나. 하지만 보랏의 그런 논리는 요즘 신문의 국제면을 펼쳐 보기만 하면 단박에 궤멸될 이야기다. 무식한 인간같으니라구. 보랏은 신문도 안보고 사는 인간인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세상의 권력은 여성들이 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여성 정치지도자가 넘쳐나고 있다는 얘기다. 요즘 미국에서는 힐러리 클린튼이 남편의 뒤를 이어 백악관에 입성하게 될 것인가 아닌가가 최대 화제다. 유색인종인 바락 오바마도 대선 출마를 선언하긴 했지만 만약 양자가 힘을 합쳐 여성 대통령-흑인 부통령의 러닝메이트가 된다면 세계역사의 한줄기가 바뀌게 될 것이다. 부시 같은 남자들의 가부장적이고 '깡'보수주의적인 이데올로기가 끝장이 날 것이다. 이미 그점은 하원의장인 낸시 펠로시에 의해 어느 정도 시작되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프랑스에서는 세골렌 루아얄이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올 4월 대선에서 한판 승부수를 치를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그녀의 대항마인 니콜라 사르코지의 인기 또한 만만치 않지만 지난 해 중동과 아프리카계의 파리폭동 때 강경진압을 주장했던 만큼 적어도 세상의 평화를 위해 애쓸 인간이 아니라는 점은 이미 판가름이 나있는 상황이다. 독일에서는 앙겔라 메르켈이, 비록 기민당 출신이긴 하나, 이번 1월부터 EU의장 직까지 맡으면서 중동정책 등 유럽의 대외정책에 있어 미국과는 다른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남미 칠레에서는 여성 대통령인 미셸 바첼렛이 의젓하게 군대 사열을 해내는 모습이 종종 TV전파를 타고 세계에 전달된다. 이런 판국인데 뭐 여성의 두뇌가 어떻다고? 자, 그렇다면 우리 안에서는 어떤가. 과연 여성 지도자가 탄생될 것인가. 요즘 흘러가는 추세로 보면 이른바 양강 구도의 한 축을 여성후보가 당당히 지키고 있는 것만은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긴 해도 한국에서 여성 대통령이 탄생할지 안할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지금껏 우리 국민들은, 최소한 영화팬들조차도 한국 영화나 TV시리즈를 통해서나마 여성 권력자를 경험한 적이 전무하다는 점이다. 그래서일까. 가당찮은 논리같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여성 대통령을 뽑기란 쉽지 않은 일로 보인다. 영화 같은 가상의 이야기를 통해서라도 상상해본 적이 없으니까. 상상조차 못한 일을 어떻게 현실에서 감당하겠는가.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상상력이란 것 역시 현실을 반영하는 법이다. 현실에서 그럴 듯한 일이 없는데 뭘 어쩌겠는가. 미우나 고우나 그래도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헌법을 바꾸자는 비중있는 제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 참 나쁜 대통령이에요'같은 소녀취향적 반응밖에 나오지 않는 마당에 과연 뭘 어떻게 하겠는가. 좀더 진중한, 공당의 지도자로서 훈련된 발언을 할 수는 없었을까.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의 얘기를 그린 <커맨더 인 치프>에서 지나 데이비스가 맡은 매켄지 앨런 대통령은 미국의 잠수함이 북한 원산 앞바다에 좌초한 후 핵전쟁의 위기에 봉착하자 초당적 협력을 이끌어 내 이를 극복한다. 어디 <커맨더 인 치프>뿐이겠는가. 전설의 정치드라마 <웨스트 윙>에서 바틀렛 대통령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상대 당 대표에게 잠시 백악관 자리를 내주기까지 한다. TV시리즈 속 양당의 지도자들은 기꺼이 협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위기를 극복해 내는 모습은, 그것이 남자가 주도하든 여자가 주도하든, 언제나 가슴 한구석을 울리는 휴먼스토리로 엮어지기 마련이다. 요즘 국내에서는 여권의 한 유력한 후보가 갑작스럽게 사퇴하는 바람에 야당 대선 후보들의 필승론, 대세론이 굳혀지는 모양이다. 그건 다 좋다. 하지만 누가 되든 지금 국내의 여러 현안들, 여러 위기국면들은 쉽사리 해소되지 못할 것이라는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대세론을 이끄는 야당의 남녀 지도자가 바틀렛이나 매켄지 앨런 같은 인물이 되기를 기대하는 건 한낱 미국 TV시리즈에서나 기대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근데 그것 참, 신경질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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