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의 '눈에 보이는 것 없는' 단계를 넘어 서로의 단점까지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이해할 줄 아는 관계가 됐다는 의미, 그것이 100일이나 200일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이유다.
그런데 100일, 200일을 다른 의미에서 기념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난 24일 파업 200일을 맞은 민주노총 전국건설엔지니어링노동조합 만영(아름드리)지부의 김모 씨(32)는 "하루 하루 오늘은 끝나겠지 싶었는데…"라며 웃었다.
기륭전자, KTX 여승무원 등 흔히들 '장기투쟁 사업장'이라고 불리는 곳은 돌아보면 곳곳에 있다. 그러나 다른 곳과 달리 세간의 주목도 별반 받지 못한 만영지부의 파업은 100여 명도 안 되는 조합원으로 '용케도' 여기까지 왔다.
"법은 노동자 편이 아니었지만…"
장기투쟁 사업장에서 만난 조합원들에게 '이렇게 오래 버틸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온 거냐'고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늘 똑같다. 마치 정답처럼 사람들은 "우리가 정당하니까"라고 말한다. 지난 24일 경인지방노동청 안양지청 앞에서 만난 만영지부 사람들도 그랬다. "늘 하루 하루 이길 것 같아서 지내다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다.
또 대체근로, 직장폐쇄, 용역깡패 투입, 손해배상 가압류, 형사 고소·고발 등도 마찬가지다. 노동자의 파업권을 힘으로 누르는 이같은 일 역시 어느 장기투쟁 사업장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일로 만영지부도 "안 겪어 본 일이 없다"고 한다.
노조원 김모 씨는 200일의 파업 기간 동안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점점 감당하기 힘들어지는 '생활고'가 아니었다고 했다. 오히려 "내 편이 되어주지 않는 법, 노동자에게 법은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 고통스러웠다"는 것.
대체근로, 직장폐쇄, 용역깡패, 손배 가압류…
(구)만영엔지니어링은 도로설비 업계의 5위 안에 들었던 회사였다. 그런데 최근 줄어드는 공사 수주로 인해 회사는 지난 3월 실질적인 사업주인 박영민 부회장의 손에 넘어갔고 이름도 '태원코퍼레이션'으로 바뀌었다. 갑작스럽게 사옥도 서울 논현동에서 경기도 안양으로 옮겨갔고 근로조건은 나날이 악화돼 갔다.
결국 고용불안을 느낀 노동자들은 노조 설립을 결정했다. 300여 명의 직원 가운데 70여 명의 조합원으로 시작한 노조. 그러나 회사는 고용보장과 단협체결이라는 노조의 요구를 거절했고, 만든 지 한 달도 채 못돼 노조는 지난 5월 9일 전면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 한 달 만에 회사는 직장폐쇄를 단행했고 최근 전 조합원을 상대로 4억6000만 원 상당의 손해배상 가압류 청구소송을 걸었다. 또 회사는 비밀사무소에서 대체인력을 운영해 회사를 꾸려나가다 노조에 의해 발각되기도 했다.
대체인력 투입과 관련해 노조는 법원에 그 불법성의 판단을 요구했지만 수원지방법원은 1심에서 그 동안의 대체근로 여부에 대한 판단 없이 앞으로는 대체인력을 투입하면 안 된다는 '공자님 말씀'만 내놓았다.
이 판결에 반발한 노조가 다시 항소심을 청구하자 법원은 지난 14일 "노조의 쟁의행위는 그 목적이 정당하지 못하니 대체근로금지요청은 기각한다"면서도 회사측이 신청한 건물출입금지가처분 신청건과 관련해 "노조의 단결과 평화적 구두시위는 허용한다"는 취지로 평화적으로 대체인력의 출근을 막는 노조의 행위는 인정하기도 했다.
"회사가 곧 무릎 꿇게 될 겁니다"
만영지부 조합원들은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단협체결과 고용안정뿐인데 그게 그렇게 들어주기 어려운 것이냐"고 하소연 했다. 파업 200일이 되기 2주 전에 결혼식을 올린 김모 씨의 얘기다.
"지금 가장 두려운 것은 옆의 동료들이 내 손을 놓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드는 겁니다. 처음에 70여 명이던 조합원들이 많이들 이직도 하고, 복귀도 해 50여 명 남았어요. 하지만 결국엔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 믿고 있어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 아닌가요? 박영민 부회장이 회사를 운영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 같아요. 적당히 갖고 있다가 다시 팔아넘겨 차익을 얻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노조가 거기에 걸림돌이 될 것 같아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겠죠. 아마 회사가 곧 무릎을 꿇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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