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안전기획부의 도청 녹취록인 '안기부 X파일' 내용을 보도한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MBC 이상호 기자에게 항소심이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죄를 인정해 언론자유와 관련한 논란이 예상된다.
그러나 재판부는 징역 6월 및 자격정지 1년을 선고해야 하는 게 옳지만 보도의 정당성과 개인의 의사가 아닌 방송국의 의사결정 체계를 통해 보도가 된 점 등 정상을 참작해 형의 선고를 유예한다고 밝혔다.
서울고법 형사9부(김용호 부장판사)는 23일 '안기부 X파일' 내용을 보도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이상호 기자에 대한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이 사건처럼 국민과 국민 사이의 기본권이 충돌하는 경우 헌법 정신과 법리에 따라야 한다. 이 씨의 보도 행위는 '중대한 공익상 필요에 의해 이뤄진 것이어서 사회 상규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원심이 '진실한 사실로서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일 때는 위법성이 조각된다'는 형법 및 '인격권 침해가 사회상규에 반하지 않는 한 위법성이 조각된다'는 언론중재법의 위법성 조각 사유를 근거로 무죄를 선고한 데 대해 "원심의 사실관계는 인정되지만 언론의 관심사항이라서 사회 상규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평가하려면 엄격히 판단해야 한다"며 다른 논거를 제시했다.
재판부는 "통신비밀보호법이 특별히 위법성 조각 조항을 두지 않고 '침묵'하는 이유는 개인을 발가벗겨 수치를 드러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이처럼 통비법은 엄격한 '법의 울타리'를 쳐주고 있다. 이 울타리 안에서 때로 부끄럽고 추잡한 대화가 오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쉽게 위법성을 조각해 이 울타리를 열어놓는다면 권력은 울타리를 넘어 '독과'(毒果)를 따 타인의 비밀을 쉽게 알아내려는 유혹에 빠질 것이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언론이 독수(毒樹ㆍ위법 수집 증거)에 접근해 취재한 결과 본연의 사명을 달성했지만 다른 권리와 충돌할 때는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그러나 통비법은 정보의 불법수집과 공개누설 행위를 동일하게 처벌하고, 행위자를 예외 없이 처벌하고 있다"며 형사소송법의 '독수독과'(위법 수집 증거의 증거능력을 부정) 이론이 예외 없이 적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판부는 "따라서 법원은 당시 도청 테이프 보도에 참여한 대한민국 모든 언론매체의 보도ㆍ출판행위가 유죄임을 선언하는 것이다"며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파기한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대법원 판례는 목적의 정당성, 수단ㆍ방법의 정당성, 보호 및 침해 이익의 균형, 긴급성, 보충성 등의 요건에 해당하는지에 따라 위법성 조각 사유를 판단하고 있다. 통비법의 보호 영역은 언론 자유가 보장하는 영역과 다른 무엇이 있다. 통비법은 매우 구체적ㆍ예외적으로 대상과 절차를 규정하고 있는데 보도는 판례가 요구하는 여러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 씨의 보도는 국가안전 보장ㆍ사회질서 수호 등의 필요성에서 부득이 공개할 대상이라고 볼 수 없는 점에서 목적의 정당성을 충족하지 못했고, 도청 테이프로 사적인 구체적 대화까지 실명 보도해 수단ㆍ방법의 상당성도 크게 일탈했다고 지적하고, 보도 내용이 과거의 것이어서 국가질서에 직접 영향을 미칠 만한 게 아니라며 긴급성도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보도 동기나 목적, 역사적 사명감에서 이뤄진 행위인 점 등은 인정받아 마땅하지만 보도 행위가 여러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양형 참작사유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재판부는 함께 기소된 김연광 월간조선 편집장의 경우 검찰과 피고인의 항소를 모두 기각, 원심의 선고유예를 유지했다.
이상호 기자는 "법원 판결은 존중하지만 냉정하게 법 논리에 치우쳐서 판단했다는 점은 아쉽다. 애초 검찰의 기소 자체가 잘못됐고 자본권력에 대한 보도의 정당성을 위해 싸워 온 만큼 대법원에 상고해 판단을 받아보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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