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문화관광부가 '영화산업 중장기 발전계획'을 발표했다. 정부가 영화나 영상 등 문화산업을 지원하는 계획은 그 운용에 있어 강약과 비중, 탄력성을 지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영화산업은 일종의 백년대계 산업일 수 있다. 미래사회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돈을 더 많이 준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돈을 어떻게 줄 건지, 조금 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계획이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
뜬금없이 미국의 좌우 양 진영이 돈을 쓰는 방식을 거론하며 에둘러 가고 있는 것은 이른바 최근 문화관광부(이하 문광부)가 발표한 '영화산업 중장기 발전계획(2007~2011)'과 그에 따라 조성될 '영화발전기금'에 대한 얘기를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발전기금'은 총 5천억 원 규모로 국고 2천억 원에다가 영화상영관 모금을 통한 2천억 원 외에 현재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가 운영중인 영화진흥금고의 잔여 재원 1천억 원을 합한 것이다. 이 5천억 원이 어떻게 운용될지에 대해서는 차차 얘기하기로 하고, 어쨌든 '영화발전기금'이든 '영화산업 중장기 발전계획'이든 시기적으로는 적절한 때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 김명곤 장관이 새로 임명된데다 국내 영화산업에 대한 새로운 청사진 마련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때였기 때문이다. 문광부 역시 그 같은 상황을 인식한 듯 이번 중장기 발전계획의 취지에 대해 "우리 영화산업이 현재의 활력을 유지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종전의 국내시장 보호라는 소극적 정책에서 한국영화의 다양성과 국제경쟁력 확보를 위한 산업구조 개편 차원으로 정책을 전환하고, 이를 위한 인프라 구축 및 제도개선을 추진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문화부는 이에 따라 영화발전 6대 중점 추진과제까지 내놨다. ▲다양성 확보 ▲안정적 투자환경 마련 ▲영화인 복지, 전문인력 양성 및 영상기술력제고 ▲해외진출 확대 ▲지역 영상산업 활성화 ▲법·세제 등 제도개선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정부의 많은 발표가 그렇듯이 이번 '중장기발전계획'안 역시 국내 영화산업의 장밋빛 미래에 대해 지나치게 확신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 계획대로만 밀고 나가면 한국영화가 세계 영화권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기는 떼놓은 당상처럼 느껴진다. 문화부의 발전계획은 우리나라가 2011년 '세계 5대 영화강국'으로 자리매김한다는 정책비전을 설정하고 있다. 이러한 비전이 실현되면 한국영화가 산업적으로는 지식서비스 경제의 핵심 콘텐츠산업으로 성장하고, 문화적으로는 한국문화를 알리고 문화정체성을 확보하는 핵심 장르로 기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그럼으로써 당연히, 아시아 영상산업의 동반성장을 주도하게 되고 국민들에게는 꿈과 건전한 여가활동을 제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세계 5대 영화강국'의 정책비전은 2011년에 세계시장 내에서 한국영화 점유율이 현재 1.6%에서 3%로 확대되고, 한국영화의 관객점유율이 50%대로 안정적으로 유지되며, 해외수출도 현재 760억 원에서 3천억 원 수준으로 증가한다는 달성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문화부는 중장기 계획이 차질없이 추진만 된다면 그 목표가 무난히 달성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게 정말 말처럼 쉽게 될까? 재정 지원이 시급한 한국 시네마테크 문화 하나의 전략적 목표가 달성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여부는 구체적인 일의 성과가 하나하나 이어지고 엮어지면서 결국 그것이 하나의 커다란 성공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한 예를 들어보자.
서울아트시네마 ⓒ프레시안무비 김정민 기자 | |
국내에서 운영되는 시네마테크, 곧 예술영화전용관의 대표격인 서울아트시네마는 얼마 전 공중(公衆)을 향해 한장의 호소문을 뿌렸다. 그 내용을 보면 서울아트시네마가 현재 얼마나 어려운 처지에 있는지, 더 나아가 한국의 시네마테크 문화가 얼마나 위급한 처지에 놓여 있는지를 알 수 있다.서울아트시네마는 지난 2002년 서울 소격동에 있는 아트선재센터 내 극장을 임대, 개관됐다. 하지만 2005년, 아트선재센터 측의 갑작스런 계약 해지로 갈 곳을 잃었던 서울아트시네마는 지금의 허리우드 극장에 간신히 2개관을 임차해 그 명맥을 유지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이 극장과의 임대 계약 역시 내년 1월이 만료인 상태다. 최근의 호소문은 따라서, 서울아트시네마가 더 이상 그 같은 존재적 불안감을 이겨낼 수 없다는 심정적 고백이었던 셈이다. 어디서 어떻게 극장을 운영해 나가야 할지 조마조마한 상태에서 시네마테크 운동, 국내의 예술영화 운동의 지속성을 담보해 내기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가 보다 확고한 정책적 의지를 가지고 시네마테크 전용관의 설립 혹은 장기 임대와 그에 준하는 재정적 지원을 약속해 달라는 것이 이들 호소문의 골자였다. 서울아트시네마가 그 동안 진행했던 거장들의 회고전은 일일이 열거하기에 숨이 찰 정도다. 오스 야스지로부터 허우 샤오시엔, 프릿츠 랑, 버스터 키튼, 존 포드, 알프레드 히치콕 등 파스빈더, 데릭 저먼, 자크 리베트 등등. 회고전 외에도 '프랑스 범죄영화 특별전'이나 '판타스틱 특별전' 등 각종의 특별 이벤트를 통해 보다 예술적이고, 보다 탐미적이며, 보다 비주류적이어서 보다 영화적인 작품들에 목말라 하는 영화광 관객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아 왔다. 시네마테크가 없으면 영화광이 존재할 수 없고 영화광이 없으면 영화 문화가 풍부해지지 않으며, 영화 문화가 단선적이 되는 한 그 나라의 영화산업은 미래를 약속 받을 수 없다. 시네마테크에 대한 지금과 같은 미약한 지원, 무의식적인 홀대가 계속되는 한 한국의 영화 문화와 산업은 점점 더 추락의 길로 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의식 있는 영화인들의 대체적인 목소리다. 그런데 이번 호소문에서 거론된 '그에 준하는 재정적 지원'에 대해 시네마테크와 정부가 동상이몽의 생각을 갖고 있음이 드러났다. 시네마테크의 호소문이 나온 직후 영진위는 '시네마테크 호소문에 대한 영화진흥위원회의 입장'이란 보도자료를 내고 이 재정적 지원이라는 것이 사실은 지금까지 충분히 진행돼 왔다는 것이다. 영진위는 이 문건을 통해 "이번 호소문으로 자칫 시네마테크가 당장 폐쇄되는 것처럼 오해받을 소지가 있다"면서 "정부는 시네마테크협의회에 연간 3억5천700만 원을 지원하고 있으며 이는 시네마테크 전체 사업비의 73.7%의 금액으로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지만 시네마테크의 중요성을 인식, 2007년부터는 이를 6억원의 규모로 대폭 증액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그러면 이 대목에서는 서울아트시네마의 얘기를 더 들어봐야 한다. 영진위의 보도자료가 공개된 후 서울아트시네마의 김수정 사무국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반박했다. "영진위의 얘기대로 3억5천700만 원이라는 돈은 서울아트시네마에만 개별적으로 지원되는 게 아니라 시네마테크협의회 전체에 지원되는 돈이다. 극장 임대료를 제외하고 순수하게 서울아트시네마에 지원되는 돈은 1억 원 정도에 불과하다. 서울아트시네마의 연간 사업비로 약 5~6억 정도가 소비되는 데 지금의 지원금 정도로는 인건비도 나오지 않는 상황이다." 김 사무국장은 또 "시네마테크는 단순한 극장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 "시네마테크가 소비의 공간이 아닌 생산의 공간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전용관 안에 상영관 뿐 아니라 아카이브 구축을 위한 자료실, 관객들의 자유로운 의사 교환을 위한 공간들이 마련돼야 하는데 지금과 같이 열악한 재정 지원으로는 서울아트시네마가 더 이상 시네마테크로서의 기능을 지속해가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지금의 지원자금이든 향후 6억 원으로 '대폭' 늘리는 수준이든 그 정도의 지원만으로는 서울아트시네마 하나 운영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라는 것이다. 정부는 한편에선 충분한 돈을 약속하지만 실제로 현장에서는 여전히 숨이 넘어가고 있는 셈이다. 이 대목쯤 되면 다시 한번 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마>가 떠오르지 않는가? 이상과 현실의 차이 사례를 하나 더 들어보자. 정부의 이번 중장기 발전계획안에 들어 있는 야심찬 계획 가운데 하나는 다양성 영화의 제작을 지원을 확대하는 것. 이 발전계획안을 갖고 KTV의 한 정책 프로그램에 출연한 김명곤 장관은 "한국영화의 장기발전을 위해서는 다양한 장르와 소재의 영화가 제작되어 상영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곧 한두 편의 한국영화가 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것보다는 열 편의 영화가 백만 관객을 동원하는 것이 낫다는 것인데, 따라서 정부는 예술영화/독립영화/다큐멘터리 등 이른바 '다양성 영화'로 불리는 각종의 영화가 제작되어 충분한 상영기회를 갖도록 제작에서 배급, 상영까지 일관된 지원체계를 구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 장관은 또 "이를 위해 우선, 다양성 영화의 제작 및 후반작업 지원을 확대하고, 저예산 예술/독립/다큐멘터리영화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전문투자조합을 결성할 계획이며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TV방송용 예술영화(Tele-film)나 Wibro, DMB, 모바일 등 뉴미디어용 독립/단편영화의 제작도 방송사나 이동통신사 등과 함께 지원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김 장관의 그 같은 발언은 스튜디오에 나와 있던 한 독립영화인에 의해 조목조목 반박을 당함으로써 녹화 현장이 다소 어색해지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현재 약 3천만 원짜리 독립영화인 <자매이야기>를 제작중인 선지연 감독(33)은 김 장관의 그 같은 계획안에 상당한 허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중장기 계획안에 따르면 정부는 '다양성 영화' 제작을 위해 5년간 250억 원을 투자하고 연간 100편의 영화제작을 지원하는 것으로 명시돼 있다. 선지연 감독이 문제를 삼은 것은 바로 이 부분. 선 감독은 "연간 100편이면 5년에 500편이 만들어진다는 얘기이고 같은 기간 동안 250억 원을 지원한다고 했으니 이걸 나누면 1편당 5천만 원에 불과해진다"면서 "5천만 원이 라는 것은 10분짜리 단편이면 많은 돈이라 유용하다고 할 수 있지만 1시간 반짜리 장편이면 턱없이 부족하게 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차등 지원 기준 같은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역시 현장에서는, 정부가 아무리 좋은 계획과 대규모의 지원안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배가 고플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대목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론'을 들먹이는 것은 지나친 것일까.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실천 방안 필요 따라서 어떻게 보면 정부가 영화나 영상 등 문화산업을 지원하는 계획이라고 하는 것은 그 운용에 있어 강약과 비중, 탄력성을 지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무리 대단위의 돈을 투자한다고 해도 적재적소에 그것이 사용되는지 못하거나 지나치게 획일적인 분배방식을 고집할 때 결국 주느니만 못하는 결과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향후 조성될 5천억 원이라는 돈은 결코 작은 돈이 아니다. 그런데 자칫 이 막대한 돈도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돕는다'는 잘못된 '선의'때문에 흐지부지 낭비될 가능성이 적지 않은 것이다.
상해제편창 (사진제공:CGV) | |
아시아 영화산업에 있어 새로운 '잠룡'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의 경우가 반면교사가 될 듯싶다. 중국영화시장은 향후 13만 개 가까운 스크린을 구축할 만큼 어마어마한 시장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3천 개에 불과해 미래가치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은 상황이다(미국의 경우 3억 인구 대비 약 3만4천 개의 스크린수를 보유하고 있다. 이를 산술적으로 비교하면 중국은 13억 인구 대비 10만 개 이상의 스크린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된다). 스크린수가 그 정도로 필요하다는 얘기는 거기에 걸맞는 영화 제작편수가 요구된다는 얘기이고 또 그만큼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정부의 지원책이 절실하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현재 중국정부가 주력하고 있는 지원의 형태는 영화제작 자체보다는 확실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쪽이다. 예컨대 중국 정부는 북경과 상해에 오픈 스튜디오에 해당하는 '북경제편창'과 '상해제편창'을 운용하고 있으며 이 스튜디오는 규모만 각각 13만평 이상으로 돼있다. 중국정부는 '상해제편창'에만 미화 1억 달러를 투자, 명실공히 아시아 최고의 스튜디오로 만들어 나갈 계획이다. 최근 '북경제편창'과 '상해제편창'을 둘러 본 국내 메이저 투자사인 CJ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중국 정부는 결국, 영화산업 지원을 위해 큰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셈"이라며 "한국의 서울종합촬영소 등을 생각하면 이건 우리 정부가 꼭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풀뿌리 민주주의도 좋고, 가능하면 많은 영화인들을 돕는 것도 좋지만 결국 영화산업이라는 큰 그림을 성공적으로 그려내기 위해서는 대규모 지원자금의 사용처를 융통성 있게 파악하고 선별해 내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의 정부에서 지금의 참여정부까지 영화산업에 대해서만큼은 일관된 정책으로 지원이 이루어져 온 것이 사실이다. "지원은 하되 간섭은 않는다"는 철학적 모토도 비교적 잘 지켜져 왔다. 정부는 정말 할 만큼 해왔다. 돈도 들일 만큼 제대로 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는 여전히 정부가 지갑을 '얄팍하게' 연다며 불만이 이어진다. 그 같은 지원은 일종의 '면피성'에 불과하다는 지독한 비판도 이어진다. 시네마테크든, 현장의 독립영화인이든 차라리 그럴려면 지원 자체를 없애라는 과격한 발언도 심심찮게 나온다. 그렇다면 이제는 방향을 좀 바꿀 때가 됐다. 지원도 잘하고 간섭도 잘해야 한다. 어디에는 좀 크게 쓸 줄 알고, 또 어디에는 상대적으로 작게 쓰면서도 그 이유를 설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 영화산업은 일종의 백년대계 산업일 수 있다. 미래사회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돈을 더 많이 준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돈을 어떻게 줄 건지, 조금 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계획이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것은 그 때문이다. (이 글은 미디어전문 월간지 '미디어미래'에 실린 글임.)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