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기와 박중훈은 20년 지기다. 그리고 그 20년 동안 네 편의 영화에서 '찰떡 콤비'로 호흡을 맞췄다. 88년 <칠수와 만수>을 시작으로 93년 <투캅스>, 99년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 이르기까지 이 둘은 때론 극장 간판장이로, 때론 선후배 경찰로, 또 때로는 경찰과 범인으로 만났다. 비록 황금의 콤비 플레이는 아니었지만 96년 개봉한 <투캅스 2>까지 합하면, 20년 세월 동안 못해도 5년에 한 번씩은 만나 온 셈이다. 하지만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이후부터는 둘의 '사정'이 달라졌다. 또 다시 5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이제 더 이상 이 둘을 찾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둘은 농담 반 진담 반, 서로를 마주보며 이런 얘기를 해왔다고 한다. "왜 다들 우리를 안 부르는 거지?" 그들을 다시 '콤비'로 부른 건 <왕의 남자>로 한창 주가를 날리고 있던 이준익 감독이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이후 7년, 그렇게 이들은 <라디오 스타>에서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퇴물 가수와 그의 힘없는 매니저로 다시 만났다. 이건 영화 얘긴가 아니면 이 둘의 실제 얘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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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기와 박중훈 ⓒ프레시안무비 김정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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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스타>, 올드 스타와 만나다 이준익 감독의 <라디오 스타>는 88년 최고 가수왕의 영예를 누렸지만 지금은 잊혀진 올드 스타와 그의 그림자가 되어 살아가는 매니저의 이야기를 그린다. <라디오 스타>에서 박중훈의 역할은 잘 나가던 '한때'만 생각하고 제멋대로 구는 철없는 가수 최곤. 미사리 카페를 전전하며 겨우 생계를 꾸리지만 머릿속은 과거의 영광으로 가득한 최곤은 주먹다짐은 일상다반사, 간혹 대마초도 즐기는 막나가는 인생이다. 하지만 막무가내 인생 뒤엔 항상 든든한 버팀목이 있는 법. 안성기는 인기가 있던 없던, 항상 최곤 옆에서 그와 함께 울고 웃는 열혈 매니저 박민수를 연기한다. <라디오 스타>는 이 두 사람이 강원도 영월로 떠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10여 년간 방송이라곤 하지 않은 영월방송국에 내려가 '아무도 듣지 않을 것 같은'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기 위해서다. 멤버도 화려하다. 방송사고로 원주방송국에서 쫓겨 내려온 강PD(최정윤)가 연출을, 한물 간 가수 최곤이 진행을, 방송국이 통폐합될 날만 기다리며 방송 따위엔 관심도 없는 지국장(정규수)이 책임자다. 처음부터 뭔가 주파수가 잘 맞지 않는 조합이다. 그러나 항상 이런 사람들이 사고를 치는 법. 제대로 된 멘트도 형식도 없는 이들의 방송은 최곤의 돌발 언행과 다짜고짜 진행으로 오히려 인기를 모으기 시작한다. 그들의 방송엔 형식이 없지만 대신 인간미가 흘러넘치기 때문이다. 최곤이 진행하는 라디오 '오후의 희망곡'은 청취자들과 툭 터놓고 세상사는 얘기를 나누고, 간혹 그들에게 명쾌한 해결책을 내놓기도 한다. 영화 <라디오 스타>를 훈훈한 드라마로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우는 건 '오후의 희망곡'이 전하는 소시민들의 따뜻하고 감동적인 사연들이다. 라디오를 통해 엄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는 다방 레지 김양, 짝사랑을 내 사랑으로 만들 방법을 묻는 꽃집 청년, 집 나간 아빠를 공개 수배하는 순대국 집 손자, 고스톱 규칙을 정해 달라고 조르는 할머니 등 '오후의 희망곡' 청취자들의 사연은 <라디오 스타>가 전하고자 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감과 정'을 가장 명쾌하고 깊게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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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기와 박중훈 ⓒ프레시안무비 김정민 기자 |
. 올드 스타라고? 여전히 국민스타 그러나 사실은, 영화 속 사연에 깊이와 감동을 새겨 넣은 건 박중훈과 안성기의 안정감 있는 연기력이다. 올해로 연기 생활 21년에 접어든 박중훈과 50년 연기 생활을 꾸려온 안성기는 <라디오 스타>에서 '올드 스타'들만이 가질 수 있는 편안하고 안정된 연기를 선보인다. 청취자들의 사연과 함께 <라디오 스타>의 또 다른 이야기 축을 끌어가는 건 최곤과 박민수와의 관계. 2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부부 이상의 끈끈한 감정을 쌓아온 최곤과 박민수의 우정과 갈등은 실제 20년 지기 배우인 박중훈과 안성기의 실감나는 연기와 만나 영화에 훈훈한 감성과 함께 세월의 두께와 깊이를 새겨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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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스타 ⓒ프레시안무비 |
'오후의 희망곡'을 통해 흘러나오는 수많은 옛 노래들의 정취처럼 <라디오 스타>는 켜켜이 쌓인 세월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영화다. 그리고 영화와 함께 20년, 50년의 세월을 보낸 박중훈과 안성기의 얼굴은 그 자체로 <라디오 스타>의 가장 중요한 풍경이 된다. 박중훈과 안성기는 과거의 전성기를 그리워하며 고개 숙인 최곤과 일 때문에 가정을 소홀히 한 무기력한 가장 박민수를, 단순히 연기로서가 아니라 세월을 오래 산 자의 표정과 감성으로 자연스럽게 담아낸다. 시간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릎 꿇지 않으면서도 그와 동시에 겸손할 줄 마음. 영화 속 두 캐릭터의 모습은 안성기와 박중훈이 아니면 쉽게 표현해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평가는, 전적으로 옳다. 안성기와 박중훈은 올드 스타다. 올드 스타는 지나간 스타가 아니라 다만 오래된 스타일 뿐이다. 사람들은 오래된 스타를 결코 쉽게 버리지 않는다. 두 사람을 가리켜 우리들의 국민배우라고 하는 건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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