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자살테러도 있다. 그냥 두고 가면 보안당국에서 발견하고 처리해버리니까 본인이 터질 때까지 곁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주요시설에 놓여 있는 정체불명의 상자는 일단 경계하고 보는 것이 안전하다. 그 곁에 있는 사람이 젊은 여성이라도 주의를 게을리할 수는 없다. 이슬람 자살특공대 중에는 여성도 있으니까.
30일 오전 11시 경, 40여 명의 KTX 여성 노동자들이 서울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앞에 모였다. 기자회견문을 읽는 노동자 옆에는 복사용지 박스 다섯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 박스들은 테이프로 단단히 봉해져 있었다. 이 박스들 안에 무엇이 들었을까?
기자회견문의 요지는 오늘 이 다섯개의 박스를 국무총리에게 전달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회견문을 읽고 난 뒤 국무총리실과 연락을 취하던 집행부가 총리실의 답변을 가져왔다. 총리실에서는 이 박스들을 받지 않겠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의논 뒤에 민원실을 통해 접수시키기로 했다. 집회를 한 곳은 정문 앞, 민원실은 뒷문 쪽에 있었다.
조합원 다섯 명이 박스를 하나씩 들었다. 보도를 따라 행렬을 지어서 뒷문 옆의 민원실로 향했다.
그러나 민원실은 잠겨 있었다. 수요일 오전 11시를 조금 지난 시각. 정부종합청사 방문객안내실이 잠겨 있어야 할 시각은 아니었다. 잠긴 문을 한참 흔들어보다가 방향을 돌렸다. 바로 옆의 후문을 향해서. 그러자 이번엔 후문을 지키고 있던 경찰이 들어갈 수 없다고 막아선다.
후문을 지키고 있던 전투경찰과 KTX 노동자들의 몸싸움이 시작됐다. 어차피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다. 젊은 여성들이 방패로 무장한 전투경찰의 방어막을 뚫고 정부종합청사로 들어간다는 것은 애당초 어림도 없는 얘기였다.
집행부에서 "그만 돌아가자"고 말한다. "어차피 오늘 국무총리에게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봅시다. 총리실에서 건설교통부나 노동부에 접수시키라고 했으니 시키는 대로 다 해봅시다."
KTX 노동자들은 그토록 간절하게 국무총리에게 전달하고 싶어 하지만, 국가의 부름을 받아 근무하는 전투경찰들이 몸으로 막은 그 상자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그건 지난 5월 15일 정리해고 조치로 직장을 쫓겨난 KTX 여승무원 280명이 183일 동안 서울역과 용산역에서 농성하며 승객들에게 받은 서명지였다. 내용인 즉, 이들 여승무원들의 해고를 철회하고, 나아가 비정규직을 철도공사가 모두 직접 고용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모두 12만 명으로부터 받은 서명을 국무총리에게 전달하려 했던 것이다.
12만 명의 서명이 든 다섯 개의 종이박스. 국무총리실은 왜 이것을 받기를 거부했을까? 이 박스 안에 폭발물이나 생화학무기가 들었다고 생각했을까?
정부종합청사 출입문에는 공항과 같은 안전검색대가 있다. 그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과 그들이 가진 휴대품은 모두 그 검색대를 거쳐야 한다. 박스 안에 폭발물이나 유해가스가 들었으면 총리실에 올라가기 전에 걸러질 것이다. 그러니 총리의 안전이 거절의 이유일 수는 없었다.
국무총리실에 왜 그 박스들을 받기를 거부했는지 전화로 확인해보았다. 이 전화는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하는 몇 사람의 손을 거쳐 마침내 자신이 그 결정을 내렸다는 이에게 연결되었다.
그는 총리 민정비서실의 사무관이라고 본인의 신분을 밝혔다. 그의 답변 요지는 이렇다. '똑같은 내용의 민원서류 12만 장을 각각 접수시키겠다고 해서, 대표자 3명만 서류를 가지고 올라오라고 경비하는 경찰을 통해서 전달했다. 그런데 올라오지 않고 그냥 돌아갔다. 주고 간 것을 보니 기자회견문이더라.'
그러나 국무총리실에 서명지 전달 의사를 밝혔던 노조측 인사의 설명은 다르다. "먼저 들어가서 노동심의관실 직원을 만나 이야기했다. 박스 다섯 개를 전달한다고 분명히 밝혔고, 12만 장을 한 장씩 접수한다는 말은 한 적도 없고, 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그 직원이 '직접 관련되는 곳, 즉 건설교통부나 노동부로 가져가라. 우리는 받지 않겠다'고 대답했기 때문에 민원실로 접수하러 갔던 것이다."
국무총리실에 전화를 하면 사람이 받기 전에 우선 다음과 같은 녹음 목소리를 듣게 된다.
"국민과 소통하는 어울림의 마당, 국무총리 비서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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