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감독이 또 한 번 언론의 도마에 올랐다.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스폰지하우스(구 시네코아)에서 열린 영화 <시간> 기자회견에서 김기덕 감독이 "앞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비롯한 한국의 어떠한 영화제에도 내 영화를 출품하지 않겠다"고 말해 파문을 일으킨 것. 김 감독은 또 "<시간>이 내 영화 중 한국에서의 마지막 개봉작이 될지도 모른다"며 한국 영화 시장에 대한 강한 불만을 내비쳤다. 김기덕 감독은 그같은 자신의 불만을 의식해서인지 지난 해 개봉한 <활>때부터 1년여 간 국내 언론과의 접촉을 꺼려왔던 것이 사실. 지난 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이미 새영화인 <시간>을 국내에서는 개봉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같은 분위기 탓인지 이날 기자회견은 극히 냉랭한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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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촬영 현장의 김기덕 감독 | 사진 제공 FILM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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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간>은 12시에서 시작해 12시에 끝나는 영화"라는 다소 모호한 설명으로 말문을 연 김기덕 감독은 전작보다 대사가 많아진 까닭을 묻는 질문에도 "시나리오를 쓰다보니"라고 다소 성의없게 답했다. 여주인공으로 성현아를 캐스팅한 이유에 대해서도 "프로듀서가 했다", <시간>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묻는 말에 대해서도 "보는 이가 찾아야 할 것"이라는 등 단답형으로 응수했다. 왜 그렇게 말을 아끼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대해서는 "경기도 파주 헤이리에서 중국 현대예술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는데 좋은 작품이 많다. 기회가 돼 가서 보시면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는 엉뚱한 답을 내놓으며 선문답을 하기까지 했다.
. "<시간> 흥행 나쁘면 앞으로 한국 개봉 안 할 수도" 기자회견을 시작하고 20여 분이 지나 기자들의 질문이 뜸해지자 김기덕 감독은 오히려 마이크를 잡고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내 태도를 너무 무례하기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로 말문을 연 김기덕 감독은 "내 제삿날처럼 느껴지는 자리에서 차마 맨얼굴로 말하기 어려워 선글라스를 썼다"고 덧붙여 이날의 발언이 준비된 것임을 알렸다. 김기덕 감독은 먼저 <시간>의 국내 개봉 논란에 대한 경위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난해 <활>을 거슬러 올라가 <빈집> 개봉 때부터 마음의 변화가 생겼던 것 같다. <빈집>이 국내 흥행에서 좋은 성적을 얻지 못했고, 고민 끝에 다음 해 <활>을 단관 개봉했지만 일주일도 안 돼 극장 측 사정으로 영화를 내리게 됐다. 그 후 <시간>은 국내에서는 개봉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게 됐다." 영화진흥위원회 집계에 의하면 <빈집>은 전국 9만 5천여 명, <활>은 1천6백여 명의 관객을 모았다. 그러나 김기덕 감독은 자신의 그같은 결심이 단순한 흥행 부진 탓이라기보다 한국 관객과의 소통과 이해의 문제에 더 큰 이유가 있음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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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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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결국 국내에서 개봉하게 된 것에 대해서도 그는 간단하게 '수출'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시간>은 전 세계 30여 개국에 판매됐다. 그리고 대한민국도 영화를 수입한 나라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어쩌면 <시간>이 극장에서 볼 수 있는 내 마지막 영화일 수도 있다"는 것. 김기덕 감독은 이어 "이런 내 말이 협박 혹은 불만, 하소연으로 들려도 어쩔 수 없다. 어쨌든 <시간>이 나의 다른 영화들의 해외성적처럼 국내에서도 20만 명 가까이 든다면 그때부터 차기작의 한국 개봉을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 김기덕 이해해 vs 이해 못해 김기덕 감독의 이날 발언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이를 둘러싼 찬반 논쟁 역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김기덕 감독이 자본의 논리에 따라 메이저 배급사 위주로 운영되는 국내 배급 시스템의 문제점을 제대로 지적했다는 게 김기덕 감독의 입장을 옹호하는 이들의 대체적인 목소리. 또한 이를 통해 독립영화 유통 문제를 다시 한 번 재점검해야 한다는 반성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실제 지난해 5월 <활>의 단관 개봉을 앞두고 김기덕 감독은 자신이 직접 쓴 편지를 통해 저예산 영화를 만들고 개봉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토로한 바 있다. 하지만 김기덕 감독의 작품이 국내 관객에게 외면 받고 있는 것은 단순한 배급 문제 때문만은 아니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김기덕 감독은 <섬>과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사마리아><빈집> 등의 작품을 통해 해외 유수 영화제에서 연출력을 인정받으며 유럽 등지에서 제법 두터운 관객층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직설적으로 내뱉듯 표현하는 김기덕 감독의 연출 감각이 한국 관객들에게는 다소 거부감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도 크다. 2002년 개봉한 <나쁜 남자>는 전국 72만 명을 끌어 모으며 김기덕 최고의 흥행작으로 남았지만, 당시 직설화법에 가까운 영화의 표현 수위에 거부감을 나타낸 관객도 적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다양한 영화가 존재하듯 한 영화에 대한 가치 판단 역시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유럽 관객은 영화를 이해하는데 한국 관객과는 소통의 맥을 찾을 수 없어 개봉을 하지 않겠다는 김기덕 감독의 주장은 다소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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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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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작 네티즌을 뜨거운 찬반 논란으로 몰아간 건 영화 <괴물>과 관련한 김기덕 감독의 발언 탓이다. 그는 <괴물> 흥행에 대해 "가장 피 흘리는 감독으로서 한국영화의 수준과 한국관객의 수준이 잘 만난 최정점의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건 부정적이기도 하고 긍정적이기도 한 말이다" 고 말했다.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 가능한 데다 '수준'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탓에 발언을 둘러싼 네티즌들의 반응 또한 격렬하게 쏟아지고 있다. '<괴물>이 삼류영화라는 말이냐' '김기덕 영화 안 보면 수준이 낮은 거냐'라는 비난에 가까운 여론에서부터 국내 개봉을 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 '이민 가라' 등등의 분노에 가까운 의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에 반해 '김기덕의 발언은 한국 관객의 수준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다양성을 보장받기 위한 울분'이라는 의견이 맞서고 있다. 김기덕 감독의 '혼란'은 그의 작품을 둘러싼 국내와 해외의 극명한 반응 차이에 기인한 것처럼 보인다. 해외 언론과 관객의 평가에 비해 국내에서 김기덕의 작품은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아 왔던 게 사실이다. 저예산 영화의 배급 문제 등 영화 다양성을 위한 배급 시스템의 문제는 분명 한국 영화 시장이 풀어야 할 문제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관객에게 '협박'이나 '불만', '하소연'의 수준에 해당하는 발언만을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와 관객이 소통할 수 있도록 좀 더 다양한 시도를 이뤄내야 하는 것이 '작가'의 기본적인 태도라는 얘기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여 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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