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은 2003년 새해를 맞아 우리 사회의 큰 스승 김수환 추기경을 모신다. 김 추기경은 새해 우리 공동체가 함께 나아가야 할 길로 '회해와 개혁'을 제시했다. 김 추기경과의 새해맞이 인터뷰는 지난달 30일 오후 5시부터 혜화동성당 주교관에서 박인규 편집국장의 진행으로 1시간 가량 계속됐다. 인터뷰 전문을 싣는다. 편집자
프레시안 : 다사다난했던 2002년을 보내고, 새해를 맞이합니다. 새대통령의 출범과 함께 우리 공동체가 새로 출발하는 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북핵문제로 한반도에 긴장이 감돌고 있는 상황인데, 신년 소감을 한 말씀 주신다면.
추기경 : 먼저 새해에는 이 나라와 국민에게 만복이 가득하기를 기원해 마지않습니다. 2003년이 우리 모두에게 '희망의 새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경색된 남북관계와 북미관계도 우리가 같은 민족으로서 사랑을 다하고, 성심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최선을 다하여 마침내 잘 해결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1965년에 있었던 유엔 연설에서 이미 "여러분이 형제가 되고자 한다면 손에서 무기를 버려라. 공격무기를 들고 있으면서 사랑할 수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북한도, 미국도, 세계 어느 나라도 이 말씀이 주는 평화와 화해의 정신을 더불어 함께 구현할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프레시안 : 21세기 첫 대통령이 선출되었습니다. 새 정부 출범의 의미를 어떻게 보시며, 새 정부가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국가적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추기경 : 우선 노무현 당선자에게 축하를 드립니다. 어려운 고비고비를 넘기고 21세기 첫 대통령이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대통령에 당선되어 축하인사를 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만, 아무쪼록 성공한 대통령이 되어서 힘든 산행을 마치고 안전한 하산을 했을 때, 국민으로부터 진심 어린 감사와 축하를 받을 수 있는 그런 대통령이 되기를 바랍니다.
최근 민주당 일각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은 민주당의 정권재창출이 아니라,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주도해 온 낡은 정치 청산을 요구하는 국민의 승리'라고 하는 것을 봤는데, 노무현 후보의 당선에는 정당적 요소보다는 비정당적 요소가 더 많이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희망섞인 얘기이지만 '21세기 새로운 대한민국'의 출발로 보고 싶습니다.
우선적으로 새 대통령이 해결해야 할 국가적 과제는 20세기의 유산이라 할 지역간의 위화와 갈등을 비롯, 이번 선거에서 나타난 세대, 계층, 이념간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하여 국민내부의 화해와 통합을 이루어낼 것인가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프레시안 : 제왕적, 독점적 권력의 폐단이 최근 많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국가적 난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힘 있는 리더십이 요구되기도 합니다. 현 시대와 우리 국민에게 필요한 지도자상이란 어떤 것이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추기경 : 제왕적 대통령이니 제왕적 총재니 하는 논의를 우리는 많이 들어왔습니다만, 제가 보기로 그것은 전적으로 제도의 탓만은 아닌 줄 압니다. 미워하면서 닮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만, 오랜 권위주의 시대의 정치문화가 민주화된 이후에 있어서도 여전히 그대로 답습되고 있는 관행적 측면도 적지 않다고 봅니다. 어느 시점에서 누군가가 그런 정치문화의 고리를 단절해야 했는데, 아무도 그걸 끊지 못했지요. 제도 이전에 금욕적인 대통령이 나와 그런 관행과 타성을 끊을 수는 없는가 기대해 봅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이 봉사정신이 진정한 지도자의 자세입니다. 그런 점에서 먼저 권위주의적 지도력으로부터 참으로 국민을 섬기고 존중하는 민주적 지도력으로의 지도자 자신의 변화와 그 솔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프레시안 : 추기경께서는 김대중 정부 5년을 어떻게 평가하시며, 퇴임을 앞둔 김대중 대통령에게 당부하실 말씀이 있다면 어떤 것이겠습니까.
추기경 : 김대중 대통령의 5년은 그 분에게 영욕이 함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것이 영(榮)이라면 두 아들을 권력형비리 때문에 감옥에 보내야 했던 것은 욕(辱)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남북관계에 있어서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연 것은 획기적인 업적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가릴 것은 가려야 되겠지만, 물러나는 대통령에게 지나친 매도와 폄하는 삼가는 것이 성숙한 국민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당부랄 것은 없지만, '가야할 때 미련 없이 떠나는 것이야 말로 아름답다' 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너무나 벅차고 긴장되게 살아온 삶, 이제는 돌아가 편히 쉬시라고 말입니다.
프레시안 : 북한 핵 사태 이후 남북관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급속하게 냉각되고 있습니다. 추기경께서는 현 정부가 추진해 온 햇볕정책의 성과와 한계를 어떻게 평가하시며, 새 정부가 풀어야 할 남북관계의 바람직한 방향을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추기경 : 햇볕정책의 화해와 협력의 기본 방향은 옳다고 봅니다. 동독이 붕괴되고, 동서 냉전체제가 무너진 지 얼마나 오래 되었는데, 우리만이 유일하게 냉전의 동토(凍土)에 언제까지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는 일입니다. 20세기와 21세기가 달라져야 할 것이 많겠지만, 그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은 바로 냉전체제, 냉전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남북관계는 먼 뒷날에 보아도 양쪽이 모두 부끄러움이 없는 그런 떳떳한 관계로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서로 자존심의 상해를 받지 않으면서 건전한, 상호간의 협력관계로 계속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 남북관계는 가급적이면 국민적 합의 위에서, 투명하게, 그리고 뒷날의 역사에 그 어느 쪽이나 부끄러움이 없도록 이루어져 나갔으면 합니다.
프레시안 : 여중생 사망사건을 계기로 국민들 사이에서는 '미국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비판과 반성의 시각이 폭넓게 대두되었습니다. 일각에서는 무분별한 반미운동으로의 변질을 우려하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주권국으로서의 당당한 위상정립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보시며, 한미관계의 새로운 위상정립 방향은 어떤 것이라고 보시는지요.
추기경 : 두 여중생 사망사건에서 촉발된, 최근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태는 지극히 '인간적인 요구'에서 비롯되었고 그 큰 흐름은 어디까지나 주권국으로서 평등한 한미관계로의 위상정립을 요구하는 목소리라고 봅니다. 이번 사태가 바람직한 한미관계 구축의 기틀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또 우리 국민들의 이같은 욕구는 충분히 분출되었고 또 그 뜻이 한미 양국정부에도 이미 전달되었다고 봅니다. 이제 양국정부가 나서서 슬기롭게 풀어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요구는 어디까지나 한미우호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져야지, 미군철수 주장이나, 주한미군에 대한 위해(危害)와 같은 반미운동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극히 일부에서 그런 주장이 나온다고 해서 미군이 철수하지는 않겠지만, 미군철수는 정치, 경제, 안보 차원에서 이 나라에 심각한 위기상황을 초래할 것이며, 정부로서도 수습할 수 없는 혼란과 국론분열을 가져올 것입니다. 아무쪼록 전통적인 한미관계의 틀을 깨는 일이 없도록 국민 모두가 자중자제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프레시안 : 올해 대선에서는 고질적인 지역갈등, 게다가 세대, 계층, 이념간 인식의 차이까지 아주 현저해졌습니다. 이처럼 새롭게 쌓여가는 사회 갈등요인을 추기경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며, 또 이를 발전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해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추기경 : 이번 대선에서 안정을 바라는 쪽과 변화와 개혁을 바라는 쪽으로 갈라진 것이 그런 인식의 차이를 가져왔다고 봅니다. 안정을 바라는 사람들은 노무현 후보의 변화와 개혁에 대해 무엇인가 불안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안정 없는 개혁은 공허하고 개혁 없는 안정은 고인 물이나 같습니다. 안정과 개혁은 동전의 앞뒷면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행동과 실천을 통해 그 불안을 씻어주는 것만이 이와 같은 분열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바람직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수 국민이 불안하게 생각하는 가운데서는 국민통합도, 개혁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개혁에 앞서 국민이 갖고 있는 이런 불안을 먼저 해소해 줘야 됩니다.
프레시안 :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시며, 또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인지 말씀해 주시지요.
추기경 : 일찍이 공자께서도 가난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고르지 못한 것이야말로 걱정할 문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세계화라는 흐름 속에서도 적어도 국가와 같은 공(公)적인 영역의 역할은 경쟁에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 가난이 제 탓만이 아닌 사람들, 삶이라는 짐에 눌려 신음하는 사람들, 고아와 장애인과 노인들을 돌보고, 따라오지 못하는 그들의 손을 잡아 끌어올려 더불어 함께,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가 세계화라는 명분 속에 경쟁을 조장하면서, 이들을 외면할 때, 그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으며, 이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 것에 원망과 한탄을 금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을 고맙고 또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말로만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그런 따뜻한 정부, 인간의 얼굴을 한 정부가 되기를 바랍니다.
프레시안 : 국민의 정치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이제 1인정치와 지역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3김정치는 퇴조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앞으로 한국정치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추기경 : 정치개혁은 그 누군가가 자신들이 갖고 있는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정치개혁을 진실로 하고자 한다면, 내 자신이 먼저 껍질이 깨지는 아픔을 겪어야 합니다. 내가 먼저 손해와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이와 함께, 적어도 거짓말하지 않는 것만이라도 행동으로 보여주기를 바랍니다. 국민의 정치 불신은 바로 이 거짓말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새로 탄생하는 정권이야말로 믿음, 특히 말에 대한 믿음, 말의 신뢰성을 국민 앞에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 지적할 것이 있다면, 우리 공동체는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지 하는 목표를 상실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하는 가치목표는 물론, 세계 속에서, 또 동북아시아에서 우리가 차지해야 할 위상과 역할은 어떤 것인가 하는 그런 지향과 목표조차도 없습니다. 그저 가는 대로 가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중국 같은 나라는 확실한 국가목표를 가지고 착실하게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대로 나간다면 21세기, 아시아 태평양시대에 있어서도 우리는 그 중심국가가 되지 못하고 또다시 변방에 머무를 지도 모릅니다. 이제 한국정치도 그 시각을 한반도 전체와 동북아시아, 그리고 세계로 그 눈을 크게 떠야 합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보는 법입니다.
프레시안 : 2003년은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 새 정부가 탄생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출발의 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2003년 우리 공동체의 새로운 출발에 있어 가장 절실한 것을 말씀하신다면 어떤 것이 되겠습니까.
추기경 : '화해와 개혁'이라고 요약해서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03년은 우리나라의 정치력(政治曆)에서 본다면 새천년이 시작되는 해입니다. 20세기적인 3김정치가 끝나고,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합니다. 세계사적으로는 문명사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국내적으로는 제도를 비롯해 관행과 의식 등 모든 영역에서 1948년 정부수립으로 확립된 48체제를 새로운 시대, 문명적 변화에 걸맞게 새로운 체제로 다시 세워야 하는 바로 그 시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변화는 불가피하다고 생각합니다. '갈등에서 화해로, 분열에서 통합으로', 그리고 '화해속의 개혁', 그것이 우리의 나아갈 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프레시안 : 노무현 당선자가 지금은 대통령 당선자이지만, 2003년 2월에는 새 대통령으로 취임합니다. 새 대통령에게 당부하실 말씀이 있다면...
추기경 : 무엇보다 국민의 신뢰, 즉 그 말을 믿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시급하고 또 중요하다고 봅니다. 또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국민들은 과연 새 대통령이 그들을 향하여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인지 지켜 볼 것입니다.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노무현 대통령이 어쩌면 잘 할지 모른다'는 기대를 갖고 있는 걸 봤습니다. 이 희망의 불씨를 계속 키워주기 바랍니다.
프레시안 : 마지막으로 우리 국민에게 꼭 들려주시고 싶은 얘기는 없으십니까.
추기경 : 내가 그 책의 서문을 썼고, 그때 시인은 감옥에 있었습니다만, 박노해 시인은 그의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시집에서 "천지간에 나하나 바로 서는 것이 진리의 모든 것이요, 희망의 모든 것"이라고 했습니다. "천지간에 나하나 스스로 변하는 것이 개혁의 시작이요 모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국민에게 드릴 말씀이 있다면 바로 박 시인의 이 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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