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이렇게 붙였지만 사실 말이 안 되는 제목이다.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어떤 일도 권력투쟁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대선이 끝나자마자 민주, 한나라 양당 모두 바쁘다. 화두는 같다. '쇄신' '정치개혁' 뭐 이런 것들이다.
그러나 정말 쇄신과 정치개혁 뿐일까? 그 속내를 들여다보자.
***당권경쟁, 수도권 의원들 동요 뒤엉킨 한나라당**
한나라당은 대선에 지고 이회창 후보가 정계를 은퇴했으니 바쁜 게 당연하다. 무주공산 상태가 돼버린 셈이니 새 지도부 구성, 체제정비가 불가피하다.
그러나 속도와 폭의 차이는 크다. 한쪽은 재창당 형태로 크게 바꾸자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지도부만 새롭게 만들어 당을 정비하자는 쪽이다.
여기엔 두가지 속셈이 얽혀 있다. 첫째 지도부 장악을 위한 중진급들의 권력투쟁, 둘째 2004년 총선에서 재선이 불투명해진 수도권 의원들의 동요다.
최병렬, 강재섭, 김덕룡, 이부영, 박근혜 등등 이른바 차기 주자군에 포함될 법한 중진의원들은 이번 당 체제 정비과정이 곧 하나의 기회다. 서청원 대표 체제의 책임을 추궁하고, 당의 전면 쇄신을 촉구하는 바탕엔 대표직과 최고위원직을 향한 이들의 노림수가 깔려 있다.
반대로 서청원 대표 등 현 지도부는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비난의 예봉을 꺾고자 조기 전당대회, 당선무효소송 등을 들고 나오는 것이다.
또한 이번 대선 결과 자신의 지역구에서 노 당선자의 표가 이회창 후보보다 많이 나온 의원들은 지금 좌불안석이다. 특히 수도권 출신 의원들의 경우 이 구도대로라면 2004년 총선 승리가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노 당선자 취임 1년 남짓 만에 치러지는 총선은 아무래도 신정부 '초기 효과'를 무시 못한다. 대통령의 인기가 최고조에 오른 상황에서 선거를 치러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 민주당은 총선에 모든 것을 걸고 과감한 외부수혈을 단행할 태세다.
반면 지난 6.13 지방선거까지는 한나라당이 압승을 거뒀다는 점은 안심이 되는 대목이다. 또 대선과 달리 총선 때는 투표율도 더 낮아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처럼 2004 총선의 불안한 점, 그나마 안심할 대목을 놓고 수도권 의원들의 머릿속이 분주하다. 어떻게든 한나라당을 크게 흔들어 뭔가 새로운 모습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절실하다.
반면 영남 지역 의원들은 상대적으로 계산이 덜 복잡하다. 당의 안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천천히 체제정비를 마무리해도 늦지 않는다.
이렇게 현재 한나라당의 내분사태는 2004년 총선에 대한 폭넓은 불안감을 바탕에 깔고, 동시에 기존 주류·비주류간 당권경쟁이 진행되는 형국이다. 당 쇄신의 속도논쟁은 그 외면일 뿐이다.
따라서 당 내분이 쉽게 가라앉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오히려 일부라도 당을 이탈할 가능성이 더 크다.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새 지도부가 구성되느냐에 따라 수도권 의원들은 2004년 재선을 거의 포기해야 할 상황이 도래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가만히 앉아 낙선하느니 새 길을 모색해 보자는 구상이 이미 시작되고 있을 것이다. 민주당이 재창당 혹은 신당 창당의 수순을 밟을 경우 이에 합류하는 방법, 별도의 신당을 창당하는 방법 등을 놓고 고민이 거듭될 것으로 보인다.
***민주 신주류 권력장악, '물갈이' 둘러싼 힘겨루기**
대선에 승리한 민주당의 내분은 한나라당에 비해 훨씬 선명하게 정리된다. 당내 세력분포가 노 당선자 측근 그룹과 그동안 노 당선자를 흔들어 온 사람들로 뚜렷이 대비되기 때문이다. 또 이미 여러 차례 당 쇄신운동이 벌어져 누가 어느 쪽인지 분명히 선이 그어져 있다.
한마디로 신주류와 구주류, 다른 표현으로는 쇄신파와 동교동계의 당권 다툼이며, 동시에 2004년 총선에 대비한 이른바 '물갈이' 폭을 어느 정도로 할 것인가를 둘러싼 힘겨루기다.
당권경쟁의 윤곽은 이미 드러났다. 한화갑 대표가 조기전당대회에 찬성하고, 당권도전 포기의사를 밝혔으며, 당 개혁위 인선을 당선자 측에 넘긴 것은 이미 대세가 어디로 기울었는지를 분명히 말해준다.
그러나 한 대표가 명예로운 퇴진 운운하며 즉각 사퇴 요구를 거부하고 있는 것, 또한 정균환 총무가 당권 도전 의사를 밝힌 것 등은 '물갈이' 폭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된다.
일명 '탈레반'으로 불리우는 개혁파 23명이 '당 해체'를 촉구한 것은 대폭 물갈이를 위한 것이다. 당을 깨고 외부세력과 새 당을 만드는 과정에서 걸러낼 사람은 걸러내겠다는 것이다. 또 노 당선자의 승리를 엮어낸 주역들 가운데 정치지망생들은 이미 각자가 출마할 지역구를 살펴보면서 '물갈이'판이 벌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이런 신주류의 거센 진입 앞에 구주류가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그냥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다는 반발이 당 내분으로 표면화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개혁은 권력투쟁의 다른 모습**
이처럼 한나라 민주 양당의 '당 쇄신' 논란 속에는 치열한 권력투쟁, 세력교체, 물갈이를 둘러싼 힘겨루기가 자리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 모든 과정은 양 당의 새 지도부, 새로운 차기 주자들을 결정하고, 2004년 총선 출전자들을 결정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번 한번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민주당은 1-2월 조기전당대회설이 나오기 시작했고, 한나라당 역시 전당대회 시기가 쟁점이 되고 있다. 각 당의 전당대회가 결정적 고비가 되기는 하겠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다. 총선을 앞두고 후보자를 공천 혹은 경선하는 과정에서 또 한번 전면전이 펼쳐질 것이다.
일각에서 중대선거구제 도입, 원내정당화, 상향식 공천제 법제화 등의 법.제도적 개혁안들이 거론된다. 하지만 이것 역시 양당의 입장이 다르고, 각 당내에서도 초선이냐 중진이냐에 따라 지역구가 어디냐에 따라 이해관계가 다르다.
제도개혁도 똑같은 권력투쟁과 힘겨루기의 다른 외면일 뿐이다.
이러한 권력투쟁과 힘겨루기는 필수불가결하다. 새 권력의 핵으로 떠오르고 있는 노 당선자도 이런 투쟁과 힘겨루기를 좌지우지할 수 없다. 그럴 힘이 없다. 다만 환경조성의 주도권은 갖고 있다. 그가 취임해서 집권 1년 동안 어떤 정치를 펼쳐 보이느냐에 따라 2004년 총선의 표심은 크게 좌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개혁은 이래서 힘들고 더디다. 그 자체가 노골적인 권력투쟁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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