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이 사상 유래없는 참패를 한 5.31 지방선거와 관련 "선거에서 패배한 게 내게 중요한 게 아니다"고 말한 것으로 뒤늦게 알려져 큰 논란을 낳고 있다.
노 대통령이 지난 2일 '정책홍보 토론회'에서 한 이같은 발언에 대해 한나라당은 "여당이 얼마나 더 혼이 나고 국민이 얼마나 더 고통을 겪어야 이 정권이 정신을 차릴지 막막하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또 선거 패배 후 당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열린우리당 내에서도 불만이 제기되고 있다. 노 대통령의 발언은 당의 자구적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발언이라는 점에서 잠복돼 있던 당.청간 갈등이 본격화되는 등 향후 정계개편 과정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노대통령 "그 나라가 가지고 있는 수준이 있다"
노 대통령의 선거 관련 발언은 정부의 정책홍보시스템을 만드는 과정의 (보수언론 등의) 반발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노 대통령은 "정책홍보시스템을 만드는 과정에서 많은 반발이 있어서 선거에서 패배했는지도 모르겠다"며 "그러나 그게 내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한두번 선거로 나라가 잘 되고 못되는, 어느 당이 흥하고 망하고 그런 게 민주주의는 아니다"며 "그 나라가 가지고 있는 수준이 있고 제도나 의식, 문화, 정치구조 등의 수준이 그 나라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그러면서 전에 여러차례 언급한 바 있는 캐나다의 브라이언 멀루니 전 총리의 사례를 다시 언급했다. 멀루니 전 총리는 1988년 총선에서 169석을 차지하는 압도적 승리로 집권했지만 누적되는 재정적자를 극복하기 위해 모든 업종으로 7~10%의 부가가치세를 확대하는 내용의 세제개혁을 밀어붙였다가 여당인 진보보수당은 1993년 선거에서는 불과 2석만 남기고 전멸하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노 대통령은 "소비세 인상은 캐나다의 심각한 재정위기를 해결하고 경제성장을 가져오는데 기여했다. 그 공은 자유당이 가져갔다. 보수당은 2005년이 돼서야 다시 집권당이 됐다"고 말했다.
노대통령 "지금 부동산 정책 바꾸면 투기업자들 승리"
노 대통령은 그러면서 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 기조가 바뀌지 않을 것임을 강조했다. 이날 열린우리당 내에서는 선거 패배를 수습하는 방안 중 하나로 여론의 반발이 큰 부동산 정책 중 일부를 완화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풀이된다.
노 대통령은 "지금 부동산 정책을 바꾸면 무슨 대안이 있겠냐"며 "수십년 동안 있었던 정책을 들여다 보고 연구한 것 중 지금 가장 핵심적인 정책을 선택한 것"이라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대안 없이 무조건 흔들어서 깨뜨리면 결국 부동산 투기업자들의 승리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며 "공직자들은 국민에 대한 봉사자로 정책의 가치를 지켜야하고 왜곡된 정보로부터 국민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자부심이 강한 사람에게 창고 열쇠를 맡기면 도둑 맞지 않는다"며 "자부심이 강한 공무원이 돼야 한다"고 현 정부 정책 기조에 변화가 없을 것임을 재차 밝혔다.
노대통령 "정치하는 동안 순풍은 13대 총선 뿐"
노 대통령은 또 "제가 정치를 하는 동안 순풍은 (정치에 입문할 때인) 13대 (총선) 뿐이었다"며 "호남당 했다고 선거에서 떨어지고 항상 역풍 속에서 선거를 치렀고 대통령 선거 그 해에도 마지막 20일까지 역풍 속에서 헤맸다"고 이번 선거 패배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그리고 대통령이 됐다"며 "인간 만사 다 그런 것"이라고 덧붙였다.
노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공무원 답게 자부심을 가지고 민주주의의 중요한 제도라면 살려가자"며 "공무원들이 마음먹고 하면 할 수 있다"고 공무원들의 독려했다.
한나라당 "노무현 상식 아닌 국민 상식에 맞는 국정운영 해야"
노 대통령의 이같은 발언에 대해 한나라당은 "여당이 얼마나 더 혼이 나고 국민이 얼마나 더 고통을 겪어야 이 정권이 정신을 차릴지 막막하다"고 강도높게 비난했다.
한나라당 이정현 부대변인은 3일 "민심이반의 절대적 요인이 바로 현 정권의 실정에 있음을 겸허하게 수용하고 빠른 시일 내에 '좌파적 국정 운영의 포기선언'과 '국정 효률성 진단'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며 "지금부터라도 노무현 상식이 아닌 국민 상식에 맞는 국정운영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부대변인은 "노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대국민 항복 선언을 하고 야당과 함께 시급한 국정 과제를 해결하는데 적극 나서야 한다"며 "그런 의미에서 노 대통령이 선거참패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힌 것은 기가 막히고 깜짝 놀랄만한 발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열린우리당이 지방선거 패배의 충격에 빠져있는 것은 이해한다"며 "그러나 집권당이 자중지란에 빠져 국정이 마비 지경에 이르는 것은 국민이 기대하는 바도, 야당이 원하는 바도 결코 아니다"고 현재의 혼란스런 여당의 상황에 대해서도 비난했다.
당청 갈등 촉매제 되나
노 대통령의 발언에 대한 비난은 야당 뿐 아니라 여당 내에서도 쏟아지고 있다. 한나라당의 16개 시도지사 선거 중 전북 지역 하나만 건지는 등 사상 유례 없는 참패에 '위기감'이 팽배해 있는 열린우리당 입장에서 "선거 결과가 중요하지 않다"는 대통령 발언은 등 돌린 민심을 더욱 자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부 의원들은 정부여당이 선거 결과에 대해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시기에 이같은 대통령의 발언은 여당의 쇄신 노력을 반감시키고 있다고 노골적인 불만을 제기했다.
노 대통령의 이같은 발언은 지난해 여름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하는 과정에서도 여러 차례 여당과 지지자들 뿐 아니라 여론의 반대를 개의치 않는다고 밝혔던 당시의 '악몽'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잠복해 있던 당.청 갈등이 불거질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 노 대통령은 당시 "역사 속에서 구현되는 민심과 그 시기 국민들의 감정적 이해관계에서 표출되는 민심을 다르게 읽을 줄 알아야 한다"며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대연정을 밀어붙였으나 한나라당이 끝까지 거부해 포기한 바 있다.
특히 노 대통령이 이번 선거 패배의 원인을 불리한 언론환경 때문에 현 정부가 추진해온 개혁정책이 온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것도 기존 인식에서 한발도 나아가지 못한 안이한 발상이라는 점에서 비난이 제기될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의 이같은 인식은 MBC가 선거 당일인 지난달 31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50%가 "열린우리당의 선거 패배의 일차적 책임이 노 대통령의 국정운영 실패에 있다"고 지적하는 등 '대통령 책임'을 묻고 있는 이번 선거 결과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노 대통령의 발언은 열린우리당 내 정동영 의장 사퇴 후 임시 지도부 구성을 둘러싼 논란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당의 혼란을 빠르게 수습하는 차원에서 김근태 최고위원이 의장직을 승계하자는 의견과 당이 쇄신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차원에서 지도부가 총 사퇴해야 한다는 의견이 맞서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당은 오는 7일 연석회의를 통해 지도부 구성 방안을 최종 결정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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