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
20년 전인 1986년의 4월 28일, 서울 신림동 사거리 가야쇼핑 맞은 편 건물 옥상에서 두 청년이 온 힘을 다해 소리치고 있었다. 가야쇼핑 앞에서 전방입소 거부 시위를 벌이던 400여 명의 서울대 학생들을 향해 경찰 병력이 진압에 나서자 두 청년은 손에 쥔 핸드마이크로 "시위대에 덤벼들지 말라. 우리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 가까이 오면 분신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잠시 뒤…. 두 청년이 서 있던 건물 옥상에서 불길이 두 덩이 솟아올랐다. 불길이 시야를 벗어나 검은 연기 속으로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쉰 목소리는 울려 퍼졌다….
두 청년은 당시 서울대 미생물학과 4학년이던 김세진(1965. 2. 20 ~ 1986. 5. 3)과 같은 학교 정치학과 4학년이던 이재호(1964. 12. 29 ~ 1986. 5. 26)였다. 무엇이 두 청년들로 하여금 꽃다운 삶에 신나를 끼얹고 불을 붙이게 만들었던 것일까?
두 청년이 불길로 사그라든 지 꼭 20년. 20주기를 맞아 김세진·이재호 기념사업회에서 펴낸 책 <아름다운 청년, 김세진·이재호>에서 그들의 짧고도 길었던 그 삶의 흔적을 만나볼 수 있다.
누가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는가?
"내가 죽나요? 어디가 아파서 죽게 되나요?"
온 몸에 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진 김세진은 어머니 김순정 씨에게 물었다. 칭칭 감긴 붕대 사이로 검붉은 피가 베어나오는 가운데 그는 "나 죽어도 후회하지 않아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머니 김순정 씨는 그런 아들을 바라보던 그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세진이는 살고 싶어했다. 그러나 죽어도 좋다고 했다. 죽음 앞에서 벗어나 보려는 생존의 욕구와 죽어서라도 이루고자 했던 이상의 욕구. 이 둘 사이의 무자비한 충돌, 그 사람이 다름 아닌 바로 내 아들 세진이였다. 만신창이로 불타버린 몸으로도 강렬하게 살고자 하는 의지를 나는 내 아들의 목소리로 생생하게 들었다. 그러나 내 아들의 뜨거운 삶의 의지도 '후회하지 않을' 그 무엇 앞에서는 아주 작은 것이 되어 있었다. 무엇이었을까? 내 아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했으면서도 목숨과 맞바꿀 수 있다고 다짐하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1986년. 대학가는 '낭만'보다는 '어두움'이 가득차 있었다. 1980년, 광주에서의 처참한 광경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던 시절이었다. 대학은 변하고 있었다. '광주의 학살자, 전두환'을 넘어 그 끔찍한 폭력의 뒤에 서 있던 미국에게로 시선이 옮겨가기 시작한 것이다. 두 청년의 고민도 그것이었다.
"대학에 들어와 저는 인간과 세계에 대해 고민을 했습니다. 눈 앞에서 개패듯이 끌려가는 선배와 동료들을 바라보며 저는 우리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고민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그리고 저는 알았습니다. 이 땅의 가난의 원흉은, 뼈아픈 분단의 창출자는, 압살되는 자유의 원인은 바로 이 땅을 억압하고 자신들의 대소 군사기지화, 식민지화시킨 미 제국주의이며 그 대리통치 세력인 군사파쇼라는 것을.
저의 대학 생활은 인간의 해방과 민중의 그리고 민족의 해방을 위한 끊임없는 고민의 과정이었으며 그것의 쟁취를 위한 투쟁의 과정이었습니다. 광주에서의 2000명의 학살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군사 지휘권을 가진 미국이 병력 이동을 허락하지 않았으면 파쇼는 결코 공수부대를 투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 분신 이틀 전인 4월 26일 부모님께 쓴 김세진의 편지글 중에서
더욱이 당시의 대학은 한반도에서 핵전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에 떨고 있었다.
"남한에 배치되어 있던 전술핵이 실제로 사용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현실감있게 제기되었다. 이 점은 당시 미국의 1983년 국방보고서에서도 분명히 확인되고 있다. '소련이 중동 산유국에 개입할 경우 미국은 소련의 군사력을 분산시키고 석유자원지대를 수중에 확보하기 위한 전략으로 동북아시아의 동맹국과 함께 북한을 공격하고 북한에 대해 핵공격을 감행한다.' (<동아일보> 1983. 2. 15 보도)"
이러한 위기감과 미국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당시 대학 2학년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2주간 전방의 부대에서 군사훈련을 받도록 했던 전방입소훈련에 대한 비판으로 모아졌다. '전방입소훈련은 미제국주의의 대학생들에 대한 용병교육이며 식민지 노예교육'이라는 것이 그들의 비판이었다.
"'(전방입소 훈련 전면거부 및 한반도 미제군사기지화 결사저지를 위한) 특별위원회'가 전방입소교육을 미제국주의의 용병교육이라 규정한 것은 한국군이 미국의 용병으로 전락한 현실인식에 근거했다. 한국군에 대한 군통수권과 모든 군사훈련, 병력배치이동, 군장비이동 등에 관련된 작전지휘권은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있었다. 1994년 평시작전지휘권이 한국군으로 이양되긴 했으나, 1986년 당시만 해도 평시와 전시를 막론하고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은 미군의 손아귀에 있었던 것이다. 이 역시 미국인들의 한국군의 인식의 단면을 살펴보면 분명해진다.
'한국군은 미국의 용병이다.' (풀브라이트의원, 미상원 외교위원회에서)
'한국군은 미국의 투자를 지켜주는 보초병으로서의 군대이며 또한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성과를 얻어주는 군대이다.' (로버트 전 주한미군 사령관)
'한국군은 어디까지나 철두철미하게 미국의 고용 군대이며, 또한 한국은 아시아 진출의 방패에 불과하다.' (미국의 유력지 '군사평론'에서)"
4월 28일, 준비했던 시위가 몇 차례 무산된 후 그날 입소해야 했던 85학번들과 함께 두 청년은 신림사거리에서 외친 것이다.
"반전반핵, 양키고홈!"
"미제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
그로부터 20년…김세진·이재호, 그리고 오늘의 평택
꼭 20년이다. 세월이 흘렀고, 많은 것들이 변했다.
'반미의 불모지'라 불리던 한국 사회에서 미국에 대한 인식도 많이 달라졌다. 2002년 미군의 장갑차에 깔려 숨진 신효순, 심미선 두 여중생의 처참한 죽음으로 광화문에는 헤아릴 수 없는 인파가 촛불을 들고 모여 들었다. '우리에게 미국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이 던져질 수 있는 사회가 됐다. 한 쪽에서는 "한국 사회는 이제 '반미'를 넘어 '용미'로 나아가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두 청년이 불길로 쓰러진 지 20년을 맞던 지난달 28일, 서울대에서는 그들의 후배들이 모여 '20주기 추모식'을 열었다. 세월은 흘러 대학생들은 이제 '전방입소'가 무엇인지도 잘 모른다. 살아 있었으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을 까마득한 선배들이 왜 자신의 몸에 불을 질렀던 그 날을 이들은 왜 기리려 하는 것일까?
20주기를 맞는 두 청년의 추모식을 준비했던 황인환(서울대 대기과학과 4학년) 군은 "김세진·이재호 두 선배의 외침이 아직까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해 그 뜻을 기억하려고 추모제를 준비했다"고 답했다.
그는 <프레시안>과의 전화 통화 당시 전쟁터를 연상시킨 평택시 팽성읍 대추 분교에 있다고 했다. 폭력적인 경찰과 군부대의 진압 과정에서 자신도 부상을 입었다고 털어놓은 황인환 군은 "오늘 평택에서도 20년 전 두 선배들과 같은 절규가 나오고 있다. 1만여 명의 군병력을 동원해 강제철수를 벌이고 있는 우리 정부가 도대체 누구의 정부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랬다.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또 많은 것이 그대로 남아 있다. 미국의 해외주둔 미군의 재배치 전략에 따른 주한미군 재배치를 '순조롭게' 도와주기 위해 우리 정부는 자국의 국민들을 방패로 찍고, 곤봉으로 내리치고 있었다. 대추분교에 갇혀 있는 주민들과 학생들을 향해 전투병력은 돌을 던졌다. 20년 전 두 청년이 오로지 몸뚱이 하나로 절규했던 것처럼, 또 다른 '김세진·이재호'가 맨 몸으로 평생을 살아 온 땅을 지켜보겠다고 발버둥치고 있다.
"전쟁의 참화를 자기들과는 상관없는 일로 치부하고 소중한 사람의 인생이 파괴되는 짓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해낼 수 있는 그 미국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IMF로 나라를 통째로 뺏어가기 시작하여 FTA라는 요술로 마무리를 지으려는 미국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40대 중반이 되어버린 세진이와 재호는, 평택에 또아리를 틀고 동북아를 겨냥하는 미사일 옆에서 징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한국 은행에 투자한 자기들의 돈이 새끼를 쳐가며 한국인의 식탁에 칼로스 쌀로 지은 밥이 올라가는 것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는 미국을 상대로 아마 새로운 투쟁을 시작할 것이다."
책을 펴낸 김세진·이재호 기념사업회 장유식 회장은 얘기한다.
"책의 제목을 놓고 많은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아름다운 청년'은 우리 시대가 전태일 열사께 붙여드린 명예로운 칭호입니다. 김세진 이재호 두 열사는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계승하는 이 땅의 아름다운 청년이라도 우리들은 생각했습니다. 이들 외에도 우리 역사는 너무나 많은 '아름다운 청년'들을 안고 있습니다."
우리의 현대사가 안고 있는 너무나 많은 '아름다운 청년'들. 오늘 강제집행이 진행된 팽성읍 평택에서 또 다른 이름의 전태일을, 김세진을, 이재호를 만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20년 전 그들의 목소리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던지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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