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발물을 설치한 악당과의 통화를 위해 30분 안에 뉴욕의 '교통지옥'을 뚫고 90 블럭이나 떨어진 곳에 도착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 택시를 빼앗아 타고 가던 형사는 차가 막히자 곧바로 전화를 걸어 "앰뷸런스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잠시 후 나타난 앰뷸런스는 형사가 타고 있던 택시 앞을 달리며 막혔던 길을 열어 줬다. 이 순간 형사는 "블로커를 달고 엔드 존으로 향하는 러닝백이 된 것 같다"고 기뻐했다. 영화 〈다이하드 III〉의 한 장면이다.
주인공은 택시를 타고 가는 형사지만 그가 임무를 완수하는 데에 결정적 도움을 준 조역은 앰뷸런스다. 미국인들이 열광하는 미식축구의 정수도 바로 여기에 있다. 러닝백과 와이드 리시버의 화려한 터치 다운이 있기까지는 상대 수비를 막아 주고, 동료에게 길을 열어주는 수 많은 블로킹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3일 귀국한 슈퍼보울 MVP 하인스 워드의 포지션은 와이드 리시버다. 빠른 스피드로 상대진영에 돌진해 좋은 위치를 선정한 뒤 쿼터백이 던져 준 공을 잡는 게 와이드 리시버의 주된 임무다. 스피드, 유연성, 볼 캐치 능력은 물론이고 자주 공중 볼을 잡아야 하기 때문에 키도 커야 한다.
하지만 워드(183cm)는 와이드 리시버치고는 작은 키다. 전광석화 같은 스피드도 갖추지 못했다. 천부적인 볼 캐치 능력도 없다. 한 마디로 그는 '전형적'인 와이드 리시버가 아니다. 조지아 대학시절 쿼터백, 러닝백, 와이드 리시버를 돌아 가며 뛰었던 워드는 NFL(북미풋볼리그) 피츠버그 스틸러스에 입단할 때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렇다면 워드가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NFL 무대에서 성공한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워드의 힘은 희생 정신에 있었다. '나는 와이드 리시버니까 공을 잘 잡아서 터치 다운을 많이 해야지'라는 생각이 아니라 '팀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겠다'는 사고 방식이 워드의 성공을 이끌었다. 워드는 이른바 '블루 칼라 워커(Blue-collar worker)'였던 셈이다. 블루 칼라란 미식축구 용어로 러싱 공격을 주로하며 강력한 블로킹이나 태클을 강조하는 팀을 지칭한다. 워드가 뛰는 피츠버그 스틸러스는 블루 칼라 성격을 지닌 대표적인 팀이다.
워드는 와이드 리시버지만 블로킹을 즐긴다. 동료 공격수의 돌진을 위해 상대 수비수를 막아 주기도 하고, 때로는 쿼터백이 위기에 빠졌을 때 몸을 던지기도 한다. 필라델피아의 디펜시브 코디네이터(수비 담당 코치) 짐 존슨은 "그는 최고의 블로커다. 아마도 와이드 리시버로서는 최고일 것이다"라며 팀 플레이에 능한 워드를 극찬했다.
피츠버그의 오펜시브 코디네이터(공격 담당 코치) 켄 위센헌트도 "워드는 완벽한 팀 플레이어다. 개인 기록이 떨어져도 그는 신경쓰지 않는다. 오로지 팀이 이기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워드는 경기 중에 상대 수비수로부터 심한 태클을 당해도 항상 환하게 웃는다"고 밝혔다.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팀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워드가 선수들에게 인기가 좋은 이유다.
워드는 "NFL의 대표적 스타 와이드 리시버들인 랜디 모스, 마빈 해리슨이나 테럴 오웬스처럼 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난 그저 여러가지 능력을 갖춘 선수가 되려고 노력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워드는 '팀을 위한 희생은 곧 나를 돋보이게 한다'는 말을 몸소 보여줬다. '우리'가 아닌 '나'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 범람하는 현대 사회에 던진 워드의 메시지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적지 않은 정치인들이 '홍보효과'를 노리고 워드와의 만남을 청했다는 얘기가 더욱 귀에 거슬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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