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화 해소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은 양립할 수 있는 정책과제일까?
노무현 대통령은 26일 청와대 출입기자단과 북악산 등반을 함께 하면서 남은 임기 2년 동안 우선적으로 추진할 과제로 이 두 가지를 꼽았다.
농민, 중소기업 등의 희생이 뒤따르는 한미 FTA와 양극화 해소가 양립할 수 있다면 그 논리적 근거는 한미 FTA를 통해 일단 '파이'를 키운 뒤 이를 희생된 계층에게 나눠주면 된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의 이런 인식은 얼마 전 청와대가 '양극화의 뿌리'라며 통렬히 비판한 서강학파(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출신인 남덕우 전 국무총리를 필두로 한 학파)의 '불균형 성장전략'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노대통령 "한미 FTA는 우리가 미국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한 결과"**
노 대통령은 한미 FTA를 우선과제로 꼽은 이유에 대해 "한국이 보호정책을 통해 경쟁력을 키워갈 것이냐, 개방정책을 통해 경쟁력을 키워갈 것이냐를 선택해야 한다"며 "한미 FTA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 한국경제의 새로운 활로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의 결과"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노 대통령은 "분명한 것은 미국이 먼저 하자고 해서 우리가 응한 게 아니라 우리가 미국의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한 결과"라며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의 결과라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의 말을 이어받아 이해찬 총리도 27일 한국능률협회 최고경영자 조찬 특강에서 "미국 행정부의 한시법 시한이 내년 6월까지 설정돼 있어 이 기간에 한미 FTA를 해내면 선진 통상국가로 발전해갈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며 내년 6월까지 협상을 마무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노 대통령은 또 양극화 해소 문제와 관련해 내달 23일 '국민과의 인터넷 대화'를 하겠다고 하는 등 강한 의지를 피력했다.
문제는 노 대통령의 인식 안에선 양극화 해소와 한미 FTA가 전혀 충돌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GDP 2% 성장 효과 있고 서민경제에는 영향 없다"?**
하지만 노 대통령이 문제를 제기하기 전부터 양극화 해소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많은 이들이 한미 FTA는 결과적으로 양극화를 심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서준석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원은 27일 <프레시안>과의 전화통화에서 "한미 FTA가 체결되면 농축산업의 피해는 불 보듯 뻔한 것이며, 제조업에서도 대기업을 제외한 대다수의 중소기업들이 피해를 볼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 연구원은 "정부는 한미 FTA 결과로 GDP 2% 성장을 얘기하지만 서민경제에서 GDP가 의미하는 바는 거의 사라졌다"며 "대기업 중심의 경제성장이 중소기업에 미치는 영향도 이미 전무한 상태"라고 말했다.
또 정부가 제시하는 '10만 일자리 창출'도 재취업을 위한 직업훈련 등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에 대한 계획도 세워져 있지 않은 상태에선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할 전망이다. 농사 짓고, 소 키우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삼성그룹에 들어가 일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김성훈 상지대 총장(전 농림부 장관)도 지난 22일 <프레시안>에 게재된 인터뷰에서 "한미 FTA로 축산, 곡물, 채소, 원예 등 농업 분야는 모두 쑥대밭이 될 것이고, 그 결과 농촌인구 350만 명 중 절반은 농촌을 떠나야 할 것"이라면서 한미 FTA가 가져올 파급효과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이정우, 정태인 등 '창업공신'도 한미 FTA 졸속 추진에 우려 표명**
또 이정우 전 정책위원장, 정태인 전 국민경제비서관 등 노무현 정부의 경제정책 기틀 마련에 공헌을 한 이들도 최근 정부의 성급한 한미 FTA 추진에 우려를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겨레> 27일자 보도에 따르면 노 대통령은 취임 3주년인 지난 25일 이정우 전 위원장, 정태인 전 비서관, 이창동 전 문화관광부 장관, 영화배우 문성근 씨 등과 오찬을 함께 했다. 이 자리에서 이정우 전 위원장은 "교육·의료 등 서비스 시장이 현 상태에서 그냥 개방될 경우 국가적으로 상당한 부작용을 초래할 위험성이 높다"고 말했다.
정태인 전 비서관도 한미 FTA 졸속 추진은 국가적 재앙이 될 수 있다면서, 스크린쿼터 축소에 대한 우려가 많지만 심각성 측면에서 보면 서비스 시장 문제가 훨씬 크다고 지적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모임에서는 또 정부의 준비나 연구가 충분치 않고, 이런 상황에서 미리 협상시한을 정해놓는 것은 위험하다는 지적도 나왔다고 한다.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노 대통령은 "협정이 체결되면 경쟁력이 뒤떨어진 교육·의료·법률·경영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서비스가 도입되면서 기술 이전, 고용 창출과 함께 일본·중국 등에 새로운 시장이 창출되는 긍정적 효과가 있을 것"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양극화 해소'는 정치적 수사에 불과한가?**
이렇다 보니 노 대통령이 한미 FTA에 앞서 최우선 과제로 꼽은 양극화 해소는 그야말로 '정치적 필요'에 의해 들고나온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양극화가 구조적 문제라는 점에서 그 해결에 20~30년이 족히 걸리는 장기과제라는 것은 분명하다. 노 대통령이 지적했던 것처럼 "참여정부 안에서 다 되지도 않으면서 시끄럽기만 되게 시끄러울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세 등 재정정책을 염두에 둔 듯한 노 대통령의 발언 이외에 구체적으로 제시된 정책대안은 없다. 그 실현 가능성을 믿어주기엔 근거가 너무 빈약하다.
반면 한미 FTA는 '내년 6월 협상 완료'라는 구체적인 '데드라인'까지 정해져 있는 상태다.
현 정부는 "개방은 피해갈 수 없는 대세"라고 항변하고 싶을지 모른다. 하지만 서준석 연구원은 "이미 우리가 가입된 WTO(세계무역기구) DDA(도하개발어젠더) 협상과 FTA는 다르다"고 말한다. 그는 "FTA는 우리가 우선 협상대상국, 협상시한, 협상방법 등을 충분히 조율할 수 있는 문제"라며 "정부가 일본, 미국,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중 어느 나라, 어느 지역과 먼저 FTA를 체결해야 하는지를 면밀히 따져보고 충분한 대책을 세운 뒤에 협상을 해도 늦지 않다"고 지적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