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상 총리서리 인준 부결에 '음모론'이 등장했다. 진앙지는 민주당이고, '음모론'으로 키워낸 것은 한나라당이다.
도덕적 흠결이 있는 장상 총리지명자를 낙마시켜, 마찬가지 의혹을 사고 있는 이회창 후보에게 타격을 가하겠다는 것이 '음모'의 내용이다.
***민주당, "우리당 내엔 이회창 후보가 낙마해야 한다는 주장 있다"**
31일 인준 부결 직후 민주당 당직자들은 한결같이 한나라당을 공격했다.
공격의 출발은 한나라당이 국정혼란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낙연 대변인은 논평에서 "야당인 한나라당의 반대로 대단히 유감스러운 결과가 나왔다"며 "국정혼란과 표류에 대해 한나라당은 깊은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번째 공격은 한나라당에 대한 일종의 배신감 토로였다.
정균환 총무는 기자들에게 "한나라당 이규택 총무에게 전화해 도와달라고 했더니 '한 50표 정도만 도와주면 되겠네'라고 해 믿었는데, 형식적으로 자유투표한다고 해 놓고 위장한 것"이라고 분개했다. "한나라당은 철두철미하게 작전을 짜면 목적도 달성하고 국민도 속일 수 있다는 것에 쾌감을 느꼈을 것" 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한나라당이 반대하지 않을 것처럼 태도를 취해 민주당이 표단속을 못하도록 유도해 놓고 철저히 단합해 부결시키는 '작전'을 구사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문제의 세번째 공격이 등장한다.
정 총무는 "장 서리는 가족이 많기 때문에 목동집을 팔아 그보다 싼 서민지역 아파트 2채를 산 것인데, 이제 이회창 후보는 대단히 어렵게 되는 것 아니냐"며 "우리당 내엔 이 후보가 후보로서 낙마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고 말했다.
이 대변인도 논평에서 "아들의 병역문제와 원정출산, 호화빌라 문제, 부친의 친일의혹 등 장 지명자보다 훨씬 더 심각한 도덕적 흠결을 안고 있는 분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운 한나라당이 어떻게 임명동의안을 부결시킬 수 있는지 혼란스럽다"고 공격했다.
장상 총리 지명자가 낙마했으니 같은 이유로 이회창 후보도 후보직을 사퇴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다.
***한나라당, "부표 던져달라 부탁한 민주당 의원 10명 된다"**
이러한 민주당의 공격에 대해 한나라당은 1일 '음모론'을 정식 제기했다. 집권세력이 모종의 시나리오에 따라 장 지명자 인준안 부결을 방조했다는 주장이다.
서청원 대표가 직접 나섰다. 서 대표는 이날 긴급 최고위원회의에서 "민주당이 표결을 앞두고 (의도적으로) 표 단속을 하지 않았다"며 음모론을 공식 제기하고, "민주당 한화갑 대표가 표결 하루전 '백지신당론'을 발언한 속셈, 표결 직전 김대업씨가 우리당 후보 아들의 병역문제에 대해 의혹을 제기한 것도 인준안 부결과 연결시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하순봉 최고위원은 "오늘 아침 민주당 의원들과 접촉해 보니 '대통령 아들 비리가 덮이지 않았느냐' '한나라당 후보를 공격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는 엉뚱한 시각을 보였다"고 말했고, 이상배 정책위의장은 "부표를 던져달라고 부탁한 민주당 의원이 10명 정도 된다"고 밝혔다.
민주당에 조직적 '음모'가 있었다는 일종의 '증거 제시'인 셈이다.
***대통령 전횡의 시대 끝내는 역사적 계기 삼아야**
김대통령과 민주당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 한나라당이 '자유투표'라는 '작전'을 짰다는 주장, 반대로 이회창 후보를 노리고 민주당이 '음모'를 폈다는 주장이 맞부딪히는 형국이다.
어느 쪽 말이 맞을까?
실제 한나라당 의원 가운데 몇명이나 찬성표를 던졌는지, 민주당 의원중 몇명이 반대표를 던졌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한나라당 총무단과 중진급의 찬성표가 있었음을 가정할 때 민주당에서 대략 10 내지 30표 가량, 많게는 50표까지 반대표가 나왔다는 설이 무성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 사태가 한나라당의 '작전'인지 민주당의 '음모'인지 명확히 규명하기는 불가능하다. 다만 양쪽의 주장이 맞부딪히는 대결만 있을 뿐이다.
'작전'도 '음모'도 모두 있었다고 봐야 옳지 않을까? 아니 반대로 '작전'도 '음모'도 없었다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총리 인준안 부결은 42년만에 처음이다. 대통령이 총리를 지명하면 그만인 것으로 알았던 시대, 이른바 대통령 전횡의 시대가 종식된 셈이다. 이번 인준안 부결은 행정권력 독주의 시대에서 입법권력과 행정부 사이의 견제와 균형의 시대로 옮아가는 상징적 계기라 할 만하다.
국회의원들은 개개인이 유권자의 표에 의해 선출된 헌법기관이다. 민심을 읽고 개인의 소신에 따라 움직인다. 이번 인준안 부결은 그래서 가능했다.
'작전'이나 '음모'보다 먼저 강조되어야 할 부분은 바로 이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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