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관대해진다. 세상사, 날이 선 시각으로 지내오다가 왠지 많은 것들을 용서하고 싶어지고 또 쉽게 용서가 되는 모양이다. 그러다 보면 자신 스스로 솔직담백해지는 모양이다. 하기사 그래야 자신의 모든 과오도 용서받을 수 있긴 할 것이다. 예컨대 일본의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을 보면 그렇다. 그가 젊었을 때 만든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을 보다가 노년에 만든 <우나기>나 <간장선생>, 특히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같은 영화를 보고 있으면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을 찍을 때 팔순이 넘은 이 노 감독은 레디 고 액션 소리도 할 힘이 없어서 그 옆에서 자신을 간호하는 아들이 대신 했다고 할 정도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이 노친네가 만든 영화 내용이 참 재밌다. 사에코(시미즈 미사)라는 여자가 요우스케(야쿠쇼 코지)라는 남자를 만나 질펀한 정사를 벌이는데, 이 여자가 흥분을 하면 그야말로 다리 사이에서 물을 펑펑 쏟는다는 것이다. 물을 쏟는 게 어느 정도냐 하면 방바닥이 흥건이 젖는 것은 물론이요 온 집안이 물난리가 나서 그 물이 동네 개천가까지 흘러 들어간다는 것이다. 영화를 처음 볼 때는, 이 노친네 진정코 망년이 들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차츰차츰 노감독이 하려는 얘기가 귓전에 살살 다가오기 시작한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 같다. 욕망이라는 거 그게 사실 별거 아니라는 것, 그러니까 자꾸 숨기려고 하거나 참으려고 하지 말고 니들 나이 때 마음껏 발산하며 살라는 것, 사람들이 그걸 자꾸 억누르면서 인생사와 세상사가 뒤틀리기 시작했다는 것, 그러니 당당하게 니들의 욕망을 대면하면서 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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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 ⓒ프레시안무비 |
개인적으로 너무 좋아해서 <리바이어던>에서 <달빛 궁전><뉴욕 스토리><환상의 책><신탁의 밤> 등등 지금까지 나온 책 15권 이상 모두를 읽은 폴 오스터의 신작 <브루클린 풍자극>만 해도 그렇다. 이 책을 읽으면 폴 오스터 역시 노년으로 가고 있다는 것, 작가적 엣지(edge)보다는 세상에 대한 관용, 그럼으로써 이룰 수 있는 구원의 문제에 대해 보다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9세의 퇴직한 보험설계사 네이선은 암치료 후 브루클린에 새 거처를 마련하지만 이제 주변에 남은 것은 별로 없다. 이혼으로 아내는 떠났고 애지중지하던 딸 아이와도 소원한 상태다. 그래서 그는 조용히 죽을 만한 장소를 찾기 위해 브루클린으로 스며 들었지만 삶이란 계속된다는 것, 좌절끝에 새로운 생을 다시 살아가기 위해서는 예전과 달리 주변을 끊임없이 포용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폴 오스터는 소설 속 소설, 소설 속의 또 다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있어 천재적 기량을 발휘하는데 이번 <브루클린 풍자극>에서 나오는 프란츠 카프카의 이야기가 가슴을 친다. 매일 오후가 되면 카프카는 공원에 산책을 나갔는데 어느 날 소녀가 울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사연을 들어본 즉슨 아이가 인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카프카는 아이에게 이렇게 둘러댄다. "네 인형은 지금 여행을 떠난 거야." 거짓말을 한 이상, 카프카는 아이의 환상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매일 저녁 자신이 그때까지 쓰던 모든 작품을 전폐하고 여행을 떠난 인형이 아이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매일 오후 다시 공원에서 아이를 만나 그 편지를 읽어 주게 된다. 그렇게 하기를 3주. 카프카는 마침내 마지막으로 그 인형이 결혼을 하기로 결심을 하게 됐고 공원의 아이를 몹시도 사랑하지만 이제는 서로 작별을 할 때라고 편지에 썼음을 전한다. 폴 오스터는 주인공 네이선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그 아이는 이제 더 이상 인형을 그리워하지 않는다고. 카프카가 그 아이에게 대신 다른 무엇인가를 주었고, 그 아이의 불행은 치유가 되었다고. 그건 결국 아이가 자신만의 '이야기'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폴 오스터는 이렇게 독자의 머리를 친다. 「사람이 이야기 속에서, 상상의 세계 속에서 살 수 있을 만큼 운이 좋다면 이 세상의 고통은 사라지고 마는 거요. 그 이야기가 지속되는 한 (지독한) 현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거지요.」 그런 것이다. 우리의 비루하고 남루한 삶을 잊게 만드는 게 비단 '이야기'뿐이겠는가. 그건 폴 오스터와 같은 작가가 만들어 내는 소설일 수도 있고 장생과 공길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왕의 남자>와 같은 영화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 모든 것을 바라고 꿈꾸고 생각할 수 있는 상상력일 수도 있다. 우리가 '이야기'를 잃지 않는 한 우리는 좌절하지 않을 수 있다. 희망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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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게이샤의 추억, (中)무극, (右)뮌헨 ⓒ프레시안무비 |
나와 함께 일하는 후배 가운데는 영화를 보고 나오면 반응이 늘 시큰둥하다.그 영화 어땠느냐고 물으면 한결같이 그냥 그렇다라든가 영 아니라든가, 기대보다 못하다든가 하기 일쑤다. <무극>을 봐도 그렇고 <게이샤의 추억>을 봐도 그렇고 <뮌헨>을 봐도 그렇다. 차라리 이 후배의 반응은 적대적이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게이샤의 추억>을 볼 때, 옆에 앉아 있던 새파란 평론가와 그의 친구들은 영화 내내 몸을 비비틀며 화를 내기조차 했다. 이상하게도 요즘엔 그런 태도들과 마주하면 마음이 몹시도 불편해진다. 혹시 이 친구들은 이러다가 영화 자체를 잃지 않을까, 이야기 자체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그래서 결국 세상과 교유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노파심때문이다. 노파심이 느는 건 나이를 먹는다는 증거일 수 있다. 후배들은 이제 나에게 공개적으로 영화에 대해 품평을 하는 것을 자제하라고 한다. 너무 용서하고, 너무 관대하며, 입장이 모호하며, 그래서 너무 줏대가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글쎄 근데 그게 과연 그럴까. 영화에 대해 관대해지고 싶은 것이 문제일까. 설날 연휴다. 모두들 조금씩 용서하고 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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