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부시 미 행정부가 이라크 전쟁의 수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적들'의 도움이 필요한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이라크에서 미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수니파 저항세력, 그리고 오랜 적대적 관계인 이란 정부가 바로 부시 행정부가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그 '적들'이다.
이라크는 지난해 12월 총선에서 시아파가 의석의 다수를 차지한 후, 정파간 분쟁이 확산되고 있으며 수니파 저항세력의 반발도 거세지고 있다. 더욱이 지난해 7월 사둔 알둘레이미 이라크 국방장관이 이란을 방문해 양국 간의 군사적 협력을 논의하는 등 시아파는 이란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총선 이후 이라크에 대한 이란의 영향력은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미국 관리들은 지난해에야 미국의 대 이라크 정책이 모순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제3세계 전문통신 〈인터프레스 서비스(IPS)〉가 17일 보도했다. 지금까지 미국이 싸워 온 수니파 저항세력은 정작 알카에다나 이란과 반대편에 있는 반면, 오히려 미국이 적극적으로 지원해 온 시아파가 그들의 '적'인 이란과 가깝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됐다는 것이다.
***칼릴자드 대사 '적들'과 협력 모색…부시 정부 "대사는 그럴 권한 없다"**
잘마이 칼릴자드 이라크 주재 미국 대사를 비롯해 바그다드의 미국 관리들은 공공연히 적들과의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고 〈인터프레스 서비스〉는 전했다.
칼릴자드 대사가 지난 4일 이란 정부에 이라크 문제와 관련한 미국ㆍ이란 양국의 협력을 제안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런던에 본사를 둔 아랍신문 〈알 하얏〉이 이란과 이라크의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하는 등 그는 이란에 대해 적극적인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칼릴자드 대사의 이란에 대한 러브콜은 이라크 문제에 대해서 시아파의 협력을 얻으려면 이란의 적극적 협조가 필요하다는 반증으로 볼 수 있다.
이란뿐 아니라 칼릴자드 대사는 수니파 저항세력을 미국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도 벌이고 있다. 그는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가 이끄는 알 카에다와 사담 후세인 체제의 관리들을 제외하고는 어떤 저항세력과도 대화할 수 있다고 지난해 11월 〈ABC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칼릴자드 대사의 이런 행동을 못 마땅해 하고 있다. 미 국방부 대변인은 칼릴자드 대사가 이란 정부에게 협상을 제안하는 편지를 보낸 직후 대사는 이라크와 관련된 특별한 문제들만을 다룰 수 있는 "매우 작은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칼릴자드 대사는 지난해 11월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백악관에 의해 '친이란파'로 분류됐으며 미국의 입장을 대변하기보다는 '조정자'로 인식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란 대통령 "급한 건 우리가 아니라 미국"**
칼릴자드 대사의 러브콜에 대해 부시 행정부가 못마땅하다는 반응을 보이자, 이란 정부도 즉각 반발했다. 마누세르 모타키 이란 외무장관은 이란은 미국과 협상할 의향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란은 이라크 안정화 문제를 미국의 대이란 정책에 연계시켜 해결하기를 원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인터프레스 서비스〉는 분석했다. 이란 정부가 핵 문제 및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 문제를 이라크 정책과 연계시켜 협상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란 정부의 이런 희망에도 불구하고,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을 비롯한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들은 여전히 이란 체제의 붕괴를 바라고 있으며, 이란 정부의 '빅딜' 제안도 거부했다. 부시 행정부는 이란인들이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을 그저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이란 정부는 급할 것은 없다는 입장이다. 지난 14일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은 "우리가 미국을 필요로 하는 것보다는 미국이 더 우리를 필요로 할 것"이라고 미국의 고자세를 비난했다. 이란 대통령의 이 같은 발언은 이라크 안정을 위해서는 이란의 도움이 절실할 것임을 명료하게 표현한 것.
이런 이란 대통령의 발언이 있기 며칠 전, 이라크 시아파의 지도자 압둘 아지즈 알 하킴은 이라크 정부 구성과 관련한 어떤 변화도 거부한다고 밝혀, 총선 이후 이라크 안정을 바라던 미국은 더 난처하게 만들었다. 미국은 총선 결과에 반발하는 수니파와 협상을 통해 정부를 구성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하킴의 선언은 미국이 이라크 문제에 대해 이란과 진지하게 협상하도록 압력을 넣기 위한 노력으로 해석할 수 있다.
***수니파 "미군 철수하면 대화하겠다"**
이라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니파와의 협력 문제도 미국에게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뉴욕타임스〉는 미국 관리들이 "저항세력과의 직접적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으며 "대화의 중간 매개자로서 저항세력 원로 지도자들과도 대화하고 있다"고 6일 보도했다.
한 저항세력 지도자는 미국이 알 카에다와의 싸움을 위해 수니파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부 아민 전 이라크 관리는〈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관리들이 저항세력에게 "너 알카에다와 관련 있어? 그럼 너 알 카에다 공격하는 거 도와줄래? 너는 이라크에서 알 카에다를 소탕할 수 있니?"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말했다.
미군과 저항세력의 협력의 길을 어둡게 하는 것은 저항세력이 협력의 조건으로 미군 철수 문제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시 행정부가 미군 철수를 보장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미국인들에게 항복하는 것은 나의 신념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저항세력이 알 카에다의 소탕을 위해 미국에 협력할 리는 만무하다.
***체니, 이집트에 이슬람권 군대 파병 요청**
부시 대통령은 그의 소망대로 이라크 문제를 빨리 매듭짓기 위해서는 수니파 및 이란과의 협력이 절대적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내키지 않는 협력을 하느니 다른 협조자를 찾아보겠다는 움직임도 최근 보이고 있다.
이와 관련, 〈UPI〉는 17일 딕 체니 미국 부통령이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과 이라크 안정화 작업에 아랍권 군대를 참여시키는 방안을 논의했다고 보도했다.
16~17일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한 체니 부통령이 이집트 정부에 이라크 파병 요구를 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아랍권 국가들은 아랍권 내의 반발을 의식해 미국의 거듭된 파병 요청을 거부해 왔다. 터키가 유일하게 파병을 추진하다가 이라크 내 쿠르드족의 반발로 현실화시키지 못했다.
아랍권 국가들이 체니 부통령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일지 여부는 아직 분명하지 않고, 이라크 상황은 점차 '안정'과는 더욱 더 멀어지고 있다. 이처럼 이라크 안정화를 두고 부시 행정부가 사면초가에 빠짐에 따라, '적과의 동침'에 대한 부시 대통령의 거부는 점차적으로 조정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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