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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은 왜 '97년 대선자금'을 덮자고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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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노 대통령은 왜 '97년 대선자금'을 덮자고 했을까?

<기자의 눈> 또 여론과 '불일치'…'우군'은 다 어디 갔을까?

노무현 대통령은 왜 갑자기 '안기부 X 파일'에 담긴 지난 1997년 대선자금 관련 의혹 수사에 대해 반대 입장을 밝혔을까? 또 노 대통령의 이런 입장 표명은 어떤 정치적 파장을 불러 일으키고 있을까?

***盧 "야박한 대통령 되기 싫어", 靑 "처음부터 갖고 있던 생각"**

노 대통령은 '97년 대선자금 수사를 원치 않는다'는 입장을 24일 있었던 출입기자단과 오찬간담회를 통해 밝혔다. 노 대통령은 이날 미리 준비해 온 메모를 참고해가며 말했다. '작정'하고 한 말이었다.

이 발언에 앞서 노 대통령은 과거사 청산에 있어 세 가지 원칙도 밝혔다. 노 대통령은 "직접 피해자가 없는 정경유착이나 국가적 범죄 등은 구조적 요인을 밝히는 데까지만 진상규명이 필요하다"며 "10개만 딱 조사해서 1000개의 구조를 다 이해할 수 있으면 그 수준에서 정리할 것은 정리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노 대통령은 "대통령 선거 때 많은 자금을 동원했다는 것은 이미 다 알려져 있는 일"이라며 대선자금 수사 문제를 끄집어냈다. 지난 2002년 대선자금에 대한 검찰 수사를 통해 정경유착이라는 '구조적 요인'이 이미 밝혀졌기 때문에 97년 대선자금 문제를 다시 조사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노 대통령은 그러면서 "이회창씨를 또 조사하면 대통령인 내가 너무 야박해지지 않겠느냐"고 그 이유를 밝혔다.

청와대는 노 대통령의 이같은 입장 표명이 갑작스러운 게 아니라고 밝혔다. 지난 7월 MBC가 'X 파일' 내용을 보도했을 당시부터 참모들에게 이런 입장을 밝혀 왔다는 것이다.

청와대는 또 노 대통령의 언급이 현재 진행 중인 검찰 수사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김만수 청와대 대변인은 24일 노 대통령의 발언 직후,"대통령의 말씀은 검찰에 대해 한 얘기가 아니라 시민사회와 국민여론에 대해 한 얘기"라고 서둘러 해명했다.

한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97년 대선자금은 법적으로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대상도 아니다"며 "이미 지난 대선자금 수사를 통해 전모가 드러난 문제를 다시 들춰서 이회창 전 총재, 김대중 전 대통령를 조사하는 일을 하지 말자는 뜻"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진행 중인 검찰 수사를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이 전 총채, 김 전 대통령을 검찰 포토라인에 세우고 싶지 않다는 것"이라고 부연 설명했다.

***노대통령, 이회창-김대중-이건희 배려한 발언?**

노 대통령은 "야박한 대통령이 되고 싶지 않다"는 감성적 이유를 댔지만, "97년 대선자금 의혹을 덮자"는 것은 그것을 넘어서서 여러가지 정치적 효과를 가질 수밖에 없다.

우선 임기 하반기를 맞아 '분열 극복'을 화두로 제시하고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한 노 대통령 입장에서 이회창 전 총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또 국정원 불법도청사건에 대한 조사결과 중간발표 이후 최악에 이른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관계도 얽힌 문제다.

이회창, 김대중이라는 두 원로 정치인은 한나라당, 민주당이라는 현실 정치세력과 직접적 연관성이 있고, 영남과 호남 지역정서를 대변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X 파일'에 대한 검찰 수사로 이들이 만에 하나 검찰에 소환되기라도 할 경우 영.호남 지역 정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두 사람을 검찰 포토라인에 세우고 싶지 않다는 말은 바로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된다.

또 노 대통령의 발언은 검찰이 97년 대선 당시 벌어진 '세풍'(국세청 대선자금 불법모금 사건) 수사의 기록을 재검토하고 천정배 법무부 장관이 '세풍' 재수사에 대한 의지를 밝히는 등 최근 'X파일 내용 수사'가 본격화 되는 듯한 시점에서 나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의식한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될 수밖에 없다.

당시 '세풍' 사건은 삼성의 개입 의혹이 농후함에도 불구하고 삼성은 수사망에서 빠져나가고 '받은 사람'들만 처벌 받은 사건이다. 따라서 이번에 재수사가 이뤄진다면 삼성이 주요 표적이 될 가능성이 크고, 참여연대, 민중연대 등 시민사회단체들로 구성된 'X파일 공대위'도 이건희 회장에 대한 수사를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X파일 공대위'는 "삼성 수사 중단을 위해 검찰 수사에 압력을 넣는 것"이라며 노 대통령 발언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노대통령, 이번에도 국민 여론과 '불일치'**

이렇게 노 대통령의 "덮고 가자"는 발언이 여러 정치세력과 관련자들을 배려하고 그들을 다독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은 오히려 불쾌감을 드러냈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25일 "대통령이 마치 한나라당이 대선 자금과 관련해 잘못이 많은데 이를 덮어주고 은전을 베푸는 듯이 오도하는 발언을 한 것에 대해 상당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강재섭 원내대표도 "노 대통령식의 과거사 정리는 유리한 것은 철저히 밝혀내고 불리한 것은 덮어 주자는 것이냐"며 비판했다.

불만스럽기는 검찰도 마찬가지다. 조기숙 청와대 홍보수석은 25일 "공소시효가 다 지난 사건을 도청 테이프 내용 하나 가지고 조사하려니 난감한데 시민단체나 국민의 압력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니까 대통령이 여론에 호소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오히려 대통령 발언이 검찰을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뜨린 측면이 있다.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X파일 공대위'까지 꾸려 검찰 수사를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대통령 발언은 오히려 검찰에 큰 부담이 된 셈이다.

무엇보다 노 대통령의 입장은 'X파일' 관련 이건희 회장에 대한 수사를 요구하고 있는 여론과 배치되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이회창-김대중'을 지칭했지만 'X파일'에 담긴 97년 대선자금 의혹은 '이건희 회장이 제공하고 이회창 전 총재,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받았다'는 게 구체적 내용이기 때문이다.

<한겨레>가 노무현 대통령 임기 반환점(25일)을 맞아 전국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안기부 'X 파일'에 대한 검찰 수에서 "이건희 삼성 회장도 수사해야 한다"는 여론(59.2%)이 "수사할 필요가 없다"는 응답(36.4%)보다 훨씬 높았다. 특히 비교적 다른 계층에 비해 노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높은 20대와 30대에서 '이건희 회장 수사'는 각각 73.4%와 71.0%로 압도적이었다.

***노대통령, 스스로 제시한 원칙 깨뜨려**

'97년 대선자금 조사 불원' 발언으로 노 대통령이 얻고자 하는 '소기의 목적'을 일정 정도 달성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두 원로 정치인을 검찰 포토라인에 세우지 않는 일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는 노 대통령이 굳이 말하지 않았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일 같다.

하지만 이를 위해 노 대통령이 치러야 할 정치적 대가가 결코 작지 않다. 우선 청와대가 거듭거듭 부인하고 있지만 "검찰 수사에 개입했다"는 비난은 피하기 힘들 것 같다. 노 대통령은 취임 후 국정원·검찰·경찰·국세청 등 4대 권력기관에 대한 불개입 원칙을 강조해 왔다.

또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하는 순간 이미 어느 정도 포기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노 대통령 스스로 트레이드 마크로 여겨 온 '개혁성' 역시 상당한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 특히 노 대통령은 "97년 대선자금 문제를 덮자"고 하면서 이 정경유착 문제에 대해 "직접적인 피해자가 없어서 구조적 요인만 밝히면 되는 문제"라고 밝혔다. 97년 대선자금 문제를 넘어서서 정경유착에 대한 이런 인식은 취임 초부터 강조해 온 '부정부패 척결 의지'를 무색하게 하는 발언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연정'에 도움이 될지도 미지수다. '대연정' 파트너인 한나라당이 우선 노 대통령의 제안에 대해 오히려 불쾌감을 표시했고, 연정 자체에 대해서도 부정적 여론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한겨레> 조사에선 노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에 대해 '공감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60.3%로, '공감한다'는 응답 30.9%의 두 배 가까이 됐다.

***'우군'을 모두 떨구고 임기 후반기에 진입하는 노 대통령**

결국 노 대통령의 "97년 대선자금 문제를 덮고 가자"는 발언은 김대중과 이회창이라는 두 정치인, 그리고 그들의 세력기반이 되는 지역의 정서에는 일정부분 위무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이를 위해 노 대통령은 너무도 큰 댓가를 치르게 되는 셈이다.

이것이 과연 국민적 공감대를 확보할 수 있는 제스처인지는 차치하고 노 대통령의 입장에서만 보더라도 과연 정치적으로 손에 쥐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곰곰히 생각해볼 일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관련해 국정원 도청 문제가 불거지니 부랴부랴 해명하느라 진을 빼고, 이회창 씨 문제와 관련해 정치자금 문제가 불거지니 다시 "덮자"고 하는 '땜빵'식 정치로는 아무 것도 생산적인 것을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그런 점에서 명시적이건 잠재적이건 우군이라고 할만할 세력들을 스스로 다 떨구며 임기 후반기에 진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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