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두두둑...
"최근 10년 동안 열린 정상회담 중 가장 중요할 것"이라는 10일(현지시간) 한미정상회담을 위해 워싱턴을 찾은 노무현 대통령을 처음 맞이한 것은 굵은 빗줄기였다.
노 대통령 내외, 수행원단, 기자단 등을 태운 특별기가 9일 오후 5시50분께 앤드루스 공군기지에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워싱턴, 강풍·벼락 동반한 비 쏟아져**
열려진 비행기 출입구로 비가 사정 없이 들이쳤다. 빗발은 우산이 뒤집힐 정도로 강한 바람을 동반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보기 힘든 굵은 번개가 번쩍 번쩍 회색빛 하늘을 절반으로 갈랐다.
예상치 못한 궂은 날씨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 내외는 지난 3년간 숱한 해외 방문 중 처음으로 우산을 쓰고 비행기 트랩을 내려와야만 했다. 노 대통령 내외는 1박3일간의 실무방문이라 별도의 공식 환영 행사 없이 홍석현 주미대사 내외, 워싱턴 한인연합회장,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등의 영접을 받고 숙소로 이동했다.
한편 강한 바람과 번개까지 동반한 비에 미국 기상청이 '낙뢰 경보'를 내려 취재진을 태운 차량은 30여분간 공군기지에 발이 묶였다. 공항 관계자들이 특별기에서 내려 숙소까지 가는 버스로 옮겨타던 기자들의 이동을 금지해, 10여명의 취재진이 특별기에서 내리지 못하고 20여분간 갇혀(?)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폭우는 노 대통령 일행을 태운 차량이 출발한 직후 뚝 그쳤다. 한국 대사관 관계자는 "워싱턴에선 이처럼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는 경우가 많다"며 "액땜이 아니겠냐"고 말했지만 무거워진 분위기를 떨치기엔 역부족이었다.
***"노대통령, 외교 소진되면 대북강경조치 수용" WP보도에 기자단 '술렁'**
앤드루스 공군기지에서 30여분간 이동해 백악관에서 5분 거리인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기자들을 기다리고 있던 소식은 "노무현 대통령이 이번 정상회담에서 외교적 방법이 완전히 소진될 경우에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부 등 미국의 대북 압박 조치를 수용하겠다는 뜻을 미국측에 전달할 것"이라는 <워싱턴포스트> 보도였다.
노 대통령이 9일 서울을 떠나는 순간까지 부시 행정부 내에서 강.온 기류가 엇갈려 이번 정상회담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었던 만큼 "노 대통령이 외교적 노력이 소진할 경우 군사적 대응에 준하는(up to the point of a military response) 것도 지지할 준비가 돼 있다는 뜻을 전달할 것"이란 보도는 예상치 못한 폭우에 위축된 기자들을 더욱 긴장시켰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국내의 한 언론에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 경질설'이 보도되기도 했다. 노 대통령이 러시아 유전 의혹, 행담도 개발 의혹, 열린우리당의 극심한 분열 등 난맥상을 보이고 있는 국정을 수습하기 위해 김우식 비서실장을 교체하는 등 인적쇄신을 단행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청와대는 즉각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했지만 '내우외환(內優外患)'의 청와대 모습을 보여주는 듯 했다.
***럼즈펠드 배석·북한 인권 논의 사실 뒤늦게 전달돼**
밤 9시 넘어 노 대통령의 방미 일정을 수행 중인 정부 당국자가 다음날 있을 정상회담에 대한 사전 브리핑을 가졌다.
이 당국자는 이번 정상회담과 관련해 쏟아지고 있는 부정적 전망에 대해 "북핵문제의 평화적.외교적 해결 입장 이외에 다른 방안에 대한 논의는 없을 것"이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워싱턴포스트> 보도에 대해선 "북한이 계속 6자회담에 북귀하지 않고 상황을 악화시킬 때에는 외교적 노력이 소진했다는 6자회담에 참여하는 관련국 간에 합의가 있으면 그때 취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는 협의할 수 있다는 입장"이라며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또 "정상회담에서는 정상간 대화가 발전하는 대로 협의가 진행돼서 의제 진행 순서를 예측해서 말씀 드리기는 어렵다"고 말해, 한미간에 의제가 완벽하게 조율되지 못했음을 우회적으로 시인하기도 했다.
이 관계자는 또 당초 배석자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던 대표적 공화당 강경파인 도널드 럼즈펠드 장관의 배석 사실 전했다. 유럽을 방문 중이던 럼즈펠드 장관이 일정을 앞당겨 귀국해 정상회담에 참석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갑작스레 "미국이 북한 정세나 인권문제에 대해 관심을 표할 경우 노 대통령도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우리 입장을 설명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인권 문제에 대해 북한이 '내정간섭'이라며 강하게 반발해온 점을 볼때, 부시 대통령이 북한 인권 문제를 끄집어 내는 것은 우회적인 '대북 압박책'으로 풀이된다. 북한 인권 문제는 사안의 민감성 때문에 지난 3년간 정상회담 간에 전혀 논의되지 않았었다.
여전히 다음날 정상회담이 끝날때까진 어느 것도 예단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韓-美, 정상회담 시작 직전까지 조율에 조율**
한미정상회담이 열리는 당일까지도 한.미 양측은 의견 조율에 조율을 거듭했다. 북핵문제, 한미동맹 등 핵심 의제를 둘러싼 양국간 견해 차이가 쉽사리 좁혀지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또 미국은 딕 체니 부통령, 럼즈펠드 국방장관 등 강경파와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 크리스토퍼 힐 국무장관 등 협상파 사이에도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날 오전 7시 반기문 외교부 장관, 권진호 국가안보좌관 등 공식수행원들과 조찬을 함께 하면서 정상회담을 앞두고 우리 정부 입장을 최종 조율했다.
또 오전 10시반 반기문 장관은 라이스 국무장관과, 권진호 보좌관은 해들리 국가안보좌관과 별도 회동을 갖고 정상회담에 앞서 의견을 조율했다. 불과 정상회담을 55분 앞두고 가진 회동이었다.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한.미 외교 실무자들은 전례없이 갖은 회동을 가져 심각한 분위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지난 4월말 이종석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 5월말 서주석 NSC 전략기획실장, 이달초 권진호 청와대 국가안보보좌관, 송민순 외교부 차관보 등이 연쇄적으로 방미해, 미국 외교.안보 실무자들과 협의를 벌였다.
***盧 "한미동맹 잘 돼 가냐" 묻자 부시 "매우 강력하다" 답변**
노무현 대통령은 이날 오전 11시 25분 정상회담 시작에 앞서 백악관에 도착해 의전장에서 영접을 받고 루즈벨트룸에 들어가서 방명록에 서명을 했다. 노 대통령은 한국어로 "영원한 우정을 위하여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이라고 썼다.
노 대통령은 이어 회담장인 대통령 집무실인 오벌오피스(Oval Office)로 옮겨 부시 대통령과 인사를 나눴다. 부시 대통령은 "웰컴, 웰컴, 하우 아 유 두잉(Welcome, how are you doing)"이라고 인사를 건냈고, 노 대통령은 "나이스 투 씨 유(Nice to see you)"라고 답했다. 이에 부시 대통령은 "당신의 영어 실력이 내 한국어 실력보다 더 낫다(Your english is better than my Korean)이라고 덕담했다. 이어 부시 대통령은 노 대통령에게 럼즈펠드 국방장관과 인사를 나눌 것을 권했으며, 라이스 국무장관 등 다른 배석자들도 차례로 소개했다. 노 대통령은 마지막으로 소개 받은 멕틀레런 대변인에게 "TV에서 자주 봤다"고 한국말로 인사를 건냈고, 정상회담 자리에 착석한 뒤 50여분 동안 정상회담에 임했다.
양국 정상은 12시 15분 정상회담을 마치고 10분간 언론 회동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부시 대통령은 "양국은 같은 목표를 갖고 있다. 한반도 평화와 세계 도처의 평화가 우리 목표"라며 두루뭉술한 얘기를 했다. 반면 노 대통령은 좀더 구체적으로 "한.미 사이에 북핵 문제에 대한 기본원칙에 완벽하게 합의했으며, 한미 동맹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또 부시 대통령에게 "한미동맹 잘 돼 가고 있다고 해도 괜찮냐"라고 물어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매우 강력하다"는 대답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한-미, 북핵·한미동맹 "한 목소리" 도달했지만...**
이날 업무 오찬을 포함해 2시간 동안 진행된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은 북핵 문제에 있어 "한 목소리"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한미동맹에 있어서도 "여전히 돈독하다"는 확인했다고 한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이 특히 강조한 "북핵 문제에 있어서 한 목소리"라는 양국 합의의 의미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특히 "노 대통령이 외교적 노력이 소진될 경우 준군사적 대응(up to the point of a military response)도 지지할 것"이란 외신 보도까지 나왔었다는 점에서 미국 행정부 내 강경파들의 '한 목소리'에 대한 해석은 분명 다를 것이다.
또 반기문 외교장관은 북한이 6자회담 등에 끝내 복귀하지 않을 경우 추가 조치를 논의했냐는 부분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여기서 협의 내용을 다 말씀드리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며 "이런 내용이 알려질 경우 6자회담 재개에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미묘한 여운을 남기기도 했다.
한편 권양숙 여사는 이번 회담이 정상회담 만을 목적으로 하는 실무회담이어서 공식 일정이 하나도 없었다. 권 여사는 로라 부시 여사와의 별도 면담 일정도 잡지 않았다.
노 대통령은 이날 정상회담이 끝난 뒤 해들리 국가안보보좌관의 예방을 받고 이날 오후 7시(한국시간 11일 8시) 앤드류스 공군기지를 통해 서울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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