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변인의 '진가'는 촌각을 다투는 긴급한 상황에서 드러나기 마련이다. 알려서 좋을 것과 알리지 말아야 할 것의 구분, 일단 알리기로 했다면 가감 없이 투명하게 전달함이 대변인의 자질이자 덕목이다.
그런 면에서 이라크 무장단체에 의한 김선일씨의 피랍 사실이 알려진 21일부터 처형이 단행된 23일까지 언론과 여권의 공식적인 창구 역할을 담당했던 열린우리당 임종석 대변인의 모습에선 실망스런 대목이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 세가지만 짚어보도록 하겠다.
***"정부는 최선을 다했다"?**
우선 이라크 무장단체가 끝내 김선일씨를 처형한 23일 오전 당정청 간의 긴급 협의 결과를 전한 임 대변인의 태도는 정부측의 책임 회피를 옹호하려는 듯한 인상이 강했다.
그는 브리핑을 통해 고 김선일씨의 피랍부터 살해되기까지 정부 활동에 대해 "주어진 시간 안에 정부로서는 최선을 다했고, 외교상의 정보전달 체계에도 문제가 없었다는 게 정부 쪽의 얘기"라고 전했다. 무장단체와의 협상 내용에 대해서도 "짧은 시간 내에 정부가 최선을 다했으나 보이지 않는 상대와의 협상에 따른 어려움은 간략하게 보고가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정작 정부가 무엇을 했느냐에 대해선 "자세히 정리해 조속히 국민들에게 발표하겠다"는 말로 넘겼다.
임 대변인의 이같은 발언은 그러나 '면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적어도 정부 활동의 시시비비가 가려질 때까지 "최선을 다했다"는 말은 하지 말았어야 옳았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이 정부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기자가 쓴 관련 기사에 대한 네티즌의 댓글 중 가장 '점잖은' 꾸짖음 몇 대목이 그 이유가 될 듯 싶다.
"당-정-청. 위치에 걸맞는 분명한 책임의식 가지세요. 이런 식의 주장하다간 정말 국민들에게 외면당할 겁니다. 그럼 이만"(아이디mym68030)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부디 전쟁과 테러가 없는 세상에서 행복하세요. 당신의 죽음 앞에 무능했던 우리정부를 탓하시고 전쟁과 테러가 존재하는 이 세상을 탓하시오"(아이디 zzanggu7980)
"얼마나 많은 국민이 죽어야 제대로 일할 수 있나. 최선을 다한 것이 젊은이의 죽음인가. 이제 우리 군인이 파병되고서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생긴 후에야 잘할 수 있다는 말인가. 최선을 다해도 한 것이 없다는 것은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아이디 kingnwife)
***"언론이 국민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임 대변인은 이날 또 KBS-MBC 등 언론이 이라크 현지교민과 대사관 직원들의 증언을 빌어 제기한 피랍은폐 의혹에 대해서도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 언론과 국민들 사이에 떠돌면서 국민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며 "(5월30일 피랍설 등은) 대체로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라는 것이 외교보고를 통해 확인됐다"고 '언론 탓'을 했다.
그러나 임 대변인의 브리핑이 나온 불과 1시간 뒤, 외교부 최영진 차관은 열린우리당 의원총회에 참석해 추가 확인의 필요성을 전제로 "피랍 시점이 5월30일이라는 진술이 가장 정확하다고 파악된다"고 보고해 임 대변인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임 대변인 입장에서 본다면 더없이 다행히(?) 반기문 외교부장관이 그로부터 몇시간 뒤 김원기 국회의장,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 등을 만나 "가나산업 김천호 사장이 6월17일, 5월31일 등으로 계속 말을 바꿔 정부도 (피랍 시점을) 정확히 모른다"고 최 차관의 말을 다시 뒤집었다.
외교부 장, 차관 사이의 엇갈린 진술 자체가 비판의 대상이지만, 누구의 말이 맞느냐를 떠나 임 대변인이 김씨의 피랍 시점에 대한 혼선을 '언론이 부추기는 풍문' 쯤으로 치부해버릴 사안은 아니었다. 차라리 "정부 내에서도 정확한 진상이 아직 파악 안 되고 있다"고 솔직히 시인하는 편이 정확했을 것이다.
***"모든 경우의 수를 대비하고 있다"?**
임 대변인의 '실수'는 이에 앞선 21일 당정협의 브리핑에서도 드러났다. 당시는 이라크 무장단체들이 김선일씨를 납치한 사실이 알려진 날로, 온 국민이 김씨의 무사 귀환만을 기도하고 있을 때였다.
그럼에도 임 대변인은 브리핑을 통해 "무장단체들이 말한 일몰 후 24시간은 약 내일(22일) 새벽 3시경이 되는 것으로 판단된다"며 "정부는 '모든 경우의 수'를 대비해 대책을 수립하겠다는 보고가 있었다"고 공표해 버렸다. 임 대변인 브리핑을 들은 기자들은 '모든 경우의 수'에 김선일씨 피살까지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 김씨 가족들은 "파병을 재검토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선일이를 구해내야 한다"고 절규하고 있는 상황에서 당정은 최악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 셈이다.
물론 "모든 경우의 수를 대비해 대책을 수립하겠다"는 임 대변인의 말은 아마도 정부가 불철주야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걸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라는 짐작이다. 그렇더라도 임 대변인의 여과 없는 발언은 당시의 국민 정서를 고려치 않은 중대한 실수임이 틀림없다.
실제로 다음날인 22일, 열린우리당 국방-통외통분과위원 연석간담회에서 정부는 "김씨가 참수당할 경우 정부의 보상대책과 시신운송 방안 등도 마련돼 있다"고 보고하다가 질겁한 의원들로부터 질책을 받기도 했다.
아이러니한 대목은 임 대변인은 21일 브리핑 도중 "인질을 구출해내서 생환시키는 것이 목적인만큼 언론도 '테러단체' 등 무장단체를 자극할 수 있는 표현이나 불쾌하게 하는 용어 사용을 삼가주기 바란다"며 '언론 단속'은 철저히 했었다는 점이다.
386정치인의 대명사격인 임대변인이 이번 경험을 뼈저린 자성의 계기로 삼기를 기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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