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기독교 사회에서 고리대금업(이자율 수준과 무관하게 이자 받는 모든 사업을 가리킴)은 신에게 속하는 시간을 훔치는 중죄에 속했다. 전쟁과 사치 때문에 자주 화폐 부족에 시달렸던 중세의 왕들은 금화의 순도를 떨어뜨리는 방법으로 돈을 훔치곤 했는데, 당시의 한 학자는 환투기, 고리대금업, 화폐 변조 중에서 이 화폐 변조를 가장 악덕으로 꼽았다.
20세기 초까지 활동했던 미국의 금융사업자 존 P. 모건이 교회의 넉넉한 후원자가 된 것은 '돈을 빼앗아 가는 자'라는 자신의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희석하고자 함이었다. 당대의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은 산업 활동과 영리 활동을 완전히 다른 원리에 의해 작동하는 영역으로 구분 짓고, 영리 활동 피라미드의 최상층에 '금융 거물들'을 앉혀 놓았다. 그가 경제학적으로 묘사한 금융 거물들의 실체 역시 전체 공동체의 부에 대한 최상의 '약탈자'였다.
최근 우리 사회를 달구는 대규모 금융피해 사건들의 내막을 보고 있노라면 금융은 원래 약탈적인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 동양그룹의 사기성 기업어음 발행으로 피해를 입은 개인투자자들이 5만명에 육박하고 피해액은 1조원이 훌쩍 넘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런 대형 금융사고가 규제당국의 직무유기가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사진은 9일 동양 사태 피해 투자자들이 금융감독원 앞에서 집단 항의 시위를 벌이는 모습. ⓒ연합뉴스 |
특정금전신탁상품인데, 투자처 모르는 고객이 태반
동양증권은 계열사들의 재무 상태가 기관투자가들이 기피하는 투기 등급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정보에 취약한 개인 투자자들을 상대로 계열사들이 법정관리를 신청하기 직전까지 기업어음(CP)과 회사채를 재주껏 열심히 팔았다. 양재동 복합물류센터 프로젝트, 일명 '파이시티' 사업에 투자된 우리은행 특정금전신탁상품의 경우도 은행이 주로 자사의 우량고객들을 타깃으로 상품을 집중 홍보한 다음, 은행의 신뢰도를 이용해 판매 상품이 예금처럼 안전하다고 고객을 기만한 정황들이 농후하다.
두 케이스에서 모두 문제가 된 특정금전신탁상품은 상품명에서 알 수 있듯 형식적으로는 고객이 투자처를 지정하는 상품인데, 시민단체에 찾아온 피해자들은 자신이 어떤 사업에 투자하라고 지정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피해가 발생한 모든 상품 계약자들이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몰랐으므로 전혀 책임이 없다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상품에 대한 판매자와 구매자의 현격한 정보 비대칭, 구매자가 실제 경험하는 상품 구매의 실질과 판매자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는 법적 형식의 괴리가 심각하다는 점이다. 피해자들은 호소한다. 은행이 어떻게 이런 식으로 상품을 판매하는지, 이런 판매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묻는 길이 왜 이렇게 어려운지, 금융감독기관은 왜 존재하는지…. 퇴직금, 노후자금, 한푼 두푼 평생 모았던 적금을 날릴 위기에 처한 21세기 피해자들의 눈에는 이 모든 것이 중세 말 금융업자들이 환어음이나 환율 거래를 통해 고수익을 올리는 모습을 이해할 수 없는 '모략'으로 보았던 당시 일반 서민들의 심정이 될 수밖에 없다.
동양그룹 사태로 지금은 대형 금융피해 사건이 현안으로 떠올랐지만, 우리나라 금융의 약탈성이 수치상으로 다가오는 것은 이자율이다. 현행 이자제한법은 최고 이자율을 30%로, 사채 양성화를 목적으로 제정된 대부업법의 시행령에서는 최고 이자율을 39%로 정하고 있다. 이게 얼마나 높은 수준일까?
18세기 말에 출판된 <국부론>은 이자율에 관한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다. 그중의 하나는, 이자 받는 것이 허용된 대부분 유럽 국가들이 고리대 폐해를 막기 위해 법정 이자율 제도를 두고 있는데 상업이 발달한 지역에서는 이자율이 연 6% 이상인 곳은 없다는 것이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대부업 시장의 최고 이자율이 29.2%였다가 2006년부터 모든 시장에 적용되는 최고 이자율을 대부 금액에 따라 15∼20%로 대폭 낮추었다. 같은 시기 프랑스와 독일(독일에는 법정 이자율 한도가 없다)에서는 각각 시장평균금리의 1.33배, 2배가 넘는 이자를 폭리로 규정해 금지 내지 심하게 단속하고 있다. 이후 계속된 저금리 기조 아래서 두 나라가 금지 또는 규제하는 폭리의 상한선은 절대 20%를 넘지 않을 것이다.
금융이 태생적이고 내재적으로 약탈적인가 하는 질문은 매우 논쟁적이고 학술적인 주제이다. 그러나 저축은행을 비롯한 제2금융권, 특히 대부업 시장의 최고 이자율과 그로부터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는 영화 <피에타>나 <화차>가 그 약탈상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이 영역에서 금융은 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 야수라 표현해도 과하지 않다.
금융 규제 강화의 근거는 금융의 공공성
우리가 야수와 함께 살 수밖에 없다면, 최선은 야수를 길들이는 것이다. 시장 규제 일반이 그렇듯, 금융에 대한 규제 역시 이미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고 또 불가피하므로, 현실의 논쟁은 규제의 필요 여부가 아니라 어떤 분야를 무슨 방법, 어느 수위로 규제할 것인가를 놓고 벌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규제 자체를 악으로 보는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상황에서는 금융 규제의 근거를 초보적인 수준에서 재확인할 필요가 있겠다.
의사에 대한 국가 면허제를 폐지하고 의료 서비스의 수급을 시장 논리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자유시장을 신봉했던 밀턴 프리드먼은 2006년 한 언론 인터뷰에서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은행의 폐지 필요성을 묻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그것이 바람직하지만 전혀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생전에 자신의 이론이 꽃피어나는 세계 경제질서를 목도하는 영광을 누린 그이지만, 중앙은행과 그 역할만큼은 각국에서 여전히 건재하다.
많은 은행이 사기업임에도 중앙은행은 최종 대부자가 되어 영업을 망친 사기업 은행의 부도를 막거나 지연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은 음미할 가치가 있는 상식이다. 더 근본적으로, 국가는 화폐의 발행과 유통, 각종 신용제도의 관리 등 금융제도의 안정에 치안과 국방에 그런 것처럼 많은 세금을 쓰고 있다. 금융의 중요한 문제를 근사치라도 시장의 수요-공급 메커니즘에 오롯이 맡기는 체제는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체제는 단기라도 지속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치안과 국방처럼 금융도 공공재라는 뜻이고, 결국 금융 규제의 근거는 금융의 공공성이다.
참여연대는 지난 6월 금융소비자보호법 제정안을 국회에 입법 청원하였다. 금융기관의 금융상품 판매 준칙을 대폭 강화하고, 금융기관의 재무 건전성만 걱정하느라 소비자 보호는 뒷전에 두었던 감독 당국으로부터 독립된 금융소비자보호기구를 설립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 법이 통과된다면 동양증권이나 우리은행 특정금전신탁상품과 같은 대형 금융피해 사건의 사전적 예방 효과, 피해 발생 이후 피해자 구제 효과가 획기적으로 높아질 것이다. 무엇보다 금융기관 스스로 '약탈 본능'을 억제할 것이다.
4년마다 수많은 이자제한법 개정안이 국회를 찾아가지만 최고 이자율을 문명국가의 수준으로 낮추자는 요구는 늘 찬밥 신세였다. 최고 이자율을 20%로 낮춰야 한다. 한 번에 20%로 가기 어렵다면, 우선 25%로 낮추는 단계적 접근도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공약이었던 '모든 금융기관 대주주에 대한 적격성 심사'는 고객의 돈으로 자기 뱃속을 챙기는 뻔뻔한 대주주들을 어느 정도 걸러내는 역할을 할 것이다. 사실 제2금융권의 금융피해 문제의 상당 부분은 사익을 추구하는 대주주나 경영진의 문제에 속한다. 개인 파산에 대한 금융기관의 책임성을 대폭 높인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 개정안 처리도 늦출 수 없는 과제다.
이 밖에도 금융을 순치시키는 많은 과제들이 있다. 핵심은 금융이 순기능을 잃지 않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그 약탈성을 거세하는 것이다.
※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기획·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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