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의 핵심 당사자인 미국은 북핵문제가 자신들의 대외정책에서 아예 뒷전이다. '아시아로의 귀환' 정책은 기실 중국과의 전략적 구도를 염두에 둔 것이지 결코 북핵문제 해결을 시급한 과제로 여기는 게 아니다. 더구나 최근 시리아 사태가 초미의 관심이 되면서 북핵과 한반도 문제는 관심에서 한참 멀어져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유엔총회 연설의 대부분을 중동에 할애했고 아시아는 중국만 한차례 언급되었다. 북한과 한국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최대 관심은 미·중 관계고 최근 아베(安倍晋三) 정부의 집단적 자위권을 공식지지한 것도 그 맥락임을 부인할 수 없다.
▲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 9월 24일 (현지시각) 유엔 총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
오바마 행정부에서 북핵문제는 잘되어야 본전인 애물단지에 불과하다. 전임 정부가 매번 북핵협상으로 정치적 실패와 부담만을 떠안았고 지금 상황에서 북핵문제가 획기적으로 진전될 뾰족한 돌파구도 안 보이기 때문이다. 괜히 적극적으로 나섰다가는 본전은커녕 정치적 손해만 보기 십상이다. 더욱이 북핵문제가 교착상태를 지속하면서 한반도의 안보현안으로 남아 있는 것 자체가 냉정하게 따지면 미국에 그리 나쁠 것도 없다는 계산이 가능하다. 북핵의 현상유지는 미국으로 하여금 한국 정부를 공고한 한미동맹에 붙잡아 둘 수 있고 고가의 미국산 무기를 판매할 명분도 되고 전작권 전환 재협상이나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서 미국에 그리 불리할 게 없기 때문이다. 길게 보면 북핵교착이 오히려 한국을 동맹의 그늘에 강력하게 존속케 함으로써 중국 견제에 기여하는 효과가 있는 셈이다.
북한에 최대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중국 역시 요즘엔 역부족이다.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미·중, 한중 정상회담에서 비핵화 원칙을 강조하고 북한의 핵보유와 핵실험을 아무리 '결연하게' 반대해도 북한의 핵포기를 실제로 강제하거나 이끌어낼 뚜렷한 해법은 갖고 있지 못하다.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고 핵실험을 한 뒤에야 겨우 안보리 제재에 동참하는 정도일 뿐이다. 사실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은 북을 조금 더 힘들게 하는 정도이지 북의 입장에 반해서 정책을 바꾸도록 할 수 있는 정도는 결코 아니다.
중국도 북핵문제의 시급성보다는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대한 전략적 대응이 훨씬 더 중요하고 선차적이다. 미·일의 군사동맹 강화와 센카쿠(釣魚島) 분쟁에 대한 미국 지지, 동남아 국가에 대한 미국의 접근 등은 중국에 묵과할 수 없는 상황들이다. 중국이 6자회담 선(先)개최를 주장하면서 한국과 미국에 회담 재개를 요구하는 것도 사실은 북핵해결의 수단과 계기가 있어서라기보다는 협상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일반론적 원칙과 이를 통해 중국의 외교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의도가 강하다. 중국 역시 북핵문제의 현상유지가 꼭 나쁜 것만도 아니다. 북핵문제가 교착되면 한국과 미국이 중국의 대북 영향력에 기대게 되고 북한도 대미 협상의 우리를 위해 더욱 중국에 가까이 가게 될 수밖에 없다. 북핵이 진전되어 북·미 관계가 개선되는 것보다 오히려 북·미 갈등 상황이 전략적 구도로는 중국에 유리할 수 있는 셈이다.
지금 미국과 중국이 북핵의 교착을 타개하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상황에서 정작 먼저 움직여야 할 곳은 한국이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도 아직은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이른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내세워 원칙 있는 남북관계 정립에 첫째가는 관심을 보이고 북에 끌려가지 않고 우리가 주도하는 남북관계 만들기에 주력하고 있다. 새로운 남북관계를 위해 북한 길들이기가 우선이고 상대적으로 핵문제는 뒷전인 셈이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비전코리아 프로젝트,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 등에서 북핵문제의 선차적 관심은 미약해 보인다. 물론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 3000' 구상처럼 북핵해결에 올인하면서 이를 남북관계의 핵심 전제조건으로 삼았던 우를 범해서는 안 되지만 관심의 우선순위를 놓고 본다면 상대적으로 북핵문제가 뒤로 밀려있는 듯하다.
미국, 중국 등의 북핵관심이 시들할 경우, 한국 정부는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한반도 정세의 호전을 주도하고 이를 토대로 미국과 중국의 협력을 이끌어 북핵협상의 진전을 추동해내는 촉진자 역할을 해야 한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미협상의 진전이 그러했고 2005년 6.17 면담이 9.19 공동성명 채택에 기여했음이 대표적인 사례다. 심지어 이명박 정부 시기에도 북미협상이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형식적으로라도 남북대화가 우선했다. 2011년 남북의 비핵화 회담을 거쳐 북미 협상이 진행되었고 그 결과 2.29 합의가 도출되었다.
북미 협상이 우선되고 그 연후에 한국 정부가 뒤쫓아가는 방식은 이제 그리 현실성이 없다. 오바마 1기 내내 이명박 정부의 북핵 정책은 '그랜드 바겐'이라는 선핵포기 고수 정책으로 일관했고 그 결과 오바마 행정부는 한국 정부를 제치면서까지 한국 정부가 원하지 않는 북미협상에 나서려 하지 않았다. 지금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한국이 먼저 북핵해결을 위한 적극적 노력과 시도와 의지를 가시화하지 않는다면 굳이 미국과 중국이 어렵고 지루하고 복잡한 북핵문제에 자신의 정치적 업적을 걸지 않는다.
북한도 핵협상에 절실하게 매달리지 않는다. 이미 3차 핵실험 이후 '핵무력과 경제건설 병진노선' 채택으로 핵포기가 사실상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북이 먼저 아쉬워하며 협상을 구걸하거나 애원할 필요가 없다. 시간이 갈수록 북의 핵능력은 증대되고 핵무기고는 늘어나게 되어있다. 지난 6월 미국에 제안한 고위급 군사대화 역시 그들이 원하는 평화체제 논의를 새로운 협상 의제로 제시해놓고 기다릴 뿐이지 과거처럼 미국에 협상을 구걸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결국 지금의 구조적 북핵교착 국면에서 나서야 할 쪽은 한국밖에 없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이다. 북한의 핵무기를 결코 용인할 수 없다면, 북핵폐기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정책목표라면, 북한의 핵을 머리에 이고 살 수 없다면 박근혜 정부는 말로만 북핵 불용과 비핵화를 반복할 게 아니라 북핵문제가 진짜로 해결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적극적 의지와 구체적 액션을 보여야 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결국 남북관계 진전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이산가족 상봉 중단 이후 박근혜 정부는 남북관계 교착에 대해 크게 아쉬워하지 않는 모습이다. 내심 하고 싶지 않았던 금강산관광 재개가 불가능하게 되었으니 속으로 반기는 것 아니냐는 의심마저 든다. 남북관계 개선이 아니라 북한 버릇 고치기가 원칙이 되는 순간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의 전철을 다시 밟을지 모른다. 북핵교착보다 더 답답한 것은 이를 풀기 위한 박근혜 정부의 진지한 고민과 현실적 해법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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