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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비 없어서 가짜 장례식…'꽃할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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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비 없어서 가짜 장례식…'꽃할배'는 없다!

[TV PLAY] <햇빛 노인정의 기막힌 장례식>

한 노인이 죽은 지 5년 만에 발견됐다는 뉴스를 봤다. 어떻게 5일도 아니고 5년이나 옆집 사람이 죽은 것을 모를 수가 있을까 싶었다. 60대 노인은 두꺼운 옷을 9겹 껴입고 손에는 목장갑을 낀 상태로 반듯이 누운 채 발견됐다고 한다. 평생 혼자 살았던 노인은 1999년부터 살던 곳에서 지난 2008년 숨을 거뒀다. 노인의 싸늘한 죽음은 집세를 받으러 온 집주인에 의해 비로소 세상 밖으로 알려졌다.

MBC 드라마 페스티벌의 첫 작품 <햇빛 노인정의 기막힌 장례식>은 산 사람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미리 장례식을 치른다는 내용의 드라마다.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진 송 노인은 폐암 말기 선고를 받고, 김구봉(백일섭)을 비롯한 노인정 식구들은 송 노인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미리 장례식을 진행한다. 제목 그대로 '기막힌 장례식'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5년 만에 시체가 발견된 노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렇게 기가 막힌 장례식도 아니다. 이민 간 자식들은 연락 두절 상태다. 지금 당장 이런 장례식이라도 치르지 않으면 돈 나올 곳이 없다. '기막힌 장례식'이 아니라 '서글픈 장례식'이다.

노인정 식구들이 언제 들킬지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거짓 장례식을 치르는 이유는 단지 송 노인에 대한 의리, 우정 때문만은 아니다. 나도 언젠가 혼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내가 아팠을 때 과연 자식들이 선뜻 수술비를 내줄까 하는 두려움이 더 앞서기 때문이다. "자식한테 버림받고 길게 살면 뭐해. 차라리 죽는 게 낫지"라는 자조 섞인 신세 한탄에서도 노인들의 씁쓸한 현실을 엿볼 수 있다.

늘 노인정에서 으르렁대며 독설을 던지던 김구봉 노인이 밥을 못 넘기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노인정 친구가 아프다고 밥이 안 넘어가는 나이, 친구의 죽음이 조만간 내 일이 될 수도 있는 나이. 김구봉 노인은 "마음이 서럽고 서러워 좁쌀만한 밥알도 목구멍에 걸린다"고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자신의 방에 들어와 장롱, 이불, 옷가지를 뒤지며 수중에 있는 돈을 찾아내는 김 노인의 뒤태가 그렇게 쓸쓸해 보일 수가 없다. 오죽했으면 친구를 살리기 위해 친구를 죽이는 연극을 했을까.


▲ <햇빛 노인정의 기막힌 장례식>의 한 장면. ⓒMBC

그래서 <햇빛 노인정의 기막힌 장례식>의 중심은 장례식이 아니라 장례식을 준비하는 노인들의 속내다. 노인들은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붙잡을 방법이 없다. 언제 혼자가 될지 모르는 두려움에 맞설 자신도 없다. 한참이나 꼭꼭 숨겨놓았던 진심이 송 노인의 장례식을 준비하며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드라마는 송 노인의 장례식을 준비하며 저마다 혼자가 될 준비를 하기 시작하는 노인들의 하루하루를 차분히 담아낸다.

아들을 먼저 하늘로 보내고 과부 며느리와 함께 사는 최옹식(이호재) 노인은 "딴살림 차렸다"는 오해를 받으면서까지 남몰래 야간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한다. 며느리가 나중에 자신을 버리기 전에 먼저 며느리를 놔주기 위해서다. 준비 없이 맞닥뜨리는 외로움은 죽음보다 끔찍한 법이다. 급기야 최 노인은 아직 의식이 없는 송 노인의 손을 꼭 붙잡고 "나 무섭다. 너라도 제발 내 옆에 오래 있어라. 혼자서는 내가 자신이 없어"라고 울먹거린다. 차마 건강한 노인정 식구들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진심을, 말 없는 환자에게 털어놓는 것이다.

혼자 식당을 운영하는 박 여사(안해숙)는 "우리 나이쯤 되면 돈보다 혼자 남는 게 더 두렵다"고 고백한다. 늘 거침없이 살아오던 김구봉 노인도 그제야 외롭다고 털어놓는다. 자신들의 남은 인생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식들을 향해 김 노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산 송장이 아닌데 내 친구, 내 돈, 내 욕심은 왜 송장 취급을 해? 나도 너처럼 행복하게 살고 싶어." 늙었다고 재미없는 인생을 살라는 법은 없다. 남은 시간은 하루든 1년이든, 모든 사람은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그러나 노인들은 그 권리를 쉽게 거세당한다.

그럼에도 드라마는 우울하지 않다. 시체 노릇을 하느라 다리에 쥐가 나고 숨이 막히는 최 노인의 우스꽝스러운 표정, 박 여사를 향한 최 노인과 김 노인의 소년 같은 구애 등이 드라마의 무거움을 상쇄시킨다. 조문객이 몰려오는 장례식 풍경은 흡사 블랙 코미디 연극처럼 느껴진다. 제작진이 드라마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건, 기막힌 장례식장 풍경에서 문득 느껴지는 짠한 감정이었을 것이다. 마치 tvN <꽃보다 할배>를 웃으며 시청하다가, 처음이자 마지막 배낭여행을 떠난 '할배'들 생각에 갑자기 가슴 한 구석이 짠해지는 것처럼.

<햇빛 노인정의 기막힌 장례식>은 한 시간 동안 노인들의 외로움, 두려움, 허탈감에 집중했다. 이는 부모 자식 사이의 갈등과는 또 다른 문제다. 드라마는 어느 날 갑자기 닥친 친구의 죽음 앞에서 스스로 외로움을 직면하고 극복해가는 과정을 그려냈다. 송 노인이 외롭지 않을 묫자리를 찾다가 결국 돌아가신 부모의 산소로 향하는 노인들의 마지막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살아있는 자식보다 죽은 부모 곁이 덜 외로운 현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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