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동시에 한글은, 세계 인구 70억 명 중 고작 한반도 인구 약 7500만 명만의 문자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거친 언어 생태계에서 존재 가치를 잃고 결국 사라지는 문자도 제법 있다. 7500만 명이 사용하는 한글은 언제까지 존속할 수 있을까.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한글을 배우도록 할 수 있을까. 유재원 교수(한국외국어대 그리스학과)의 고민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저명한 그리스 발칸 전문가인 유 교수는 한글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도 유명하다.
유 교수는 "한글의 100년 후가 걱정된다"며 아일랜드어를 예로 들었다. 아일랜드에서 영어와 함께 쓰이는 아일랜드어는 현재 아일랜드 인구의 2% 정도만 사용하고 있다.
그는 "우리는 문화의 핵심을 언어라고 한다. 그 언어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문자"라며 "한글이 생명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그는 내년부터 한글날(10월 9일)에 맞춰 '문자향연'을 개최할 계획을 추진 중이다. 한글이 언제까지나 우리 문자로 존재하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긴 계획이다.
6일 오후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프레시안 사무실에서 유 교수를 만나 '한글 백년대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인터뷰는 박인규 이사장이 진행했다. <편집자주>
▲ 유재원 교수. ⓒ프레시안(손문상) |
중국 지역마다 말 달라도 '한자'로 통합…"문자가 언어를 규정"
프레시안 : '문자'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직은 생소하다.
유재원 : 사람들은 흔히 언어가 기본이고 문자는 언어를 적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만든 발명품, 제도는 일단 만들어지고 나면 우리 가치관을 규정하고 바꾼다. 이처럼 맨 처음에는 언어를 적기 위해서 만들어졌지만 문자를 갖고 났더니 이 문자가 언어생활을 지배하게 됐다. 우리는 문화의 가장 핵심을 언어라고 한다. 이 언어를 좌지우지하는 것이 문자다.
문자는 언어가 가진 시간적·공간적 제약을 벗어난다. 문자를 가졌느냐의 여부는 문명사회냐 아니냐를 결정짓는다. 문자 사회와 부딪혀서 살아남은 무문자 사회가 없다. 문자는 권력을 모으고 지식을 모으고 역사를 창출한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니콜라스 에번스 지음, 글항아리 펴냄)라는 책을 보면 뉴기니아 같은 조그만 섬에 몇천 개의 언어가 있다. 그곳에서 실력 있는 젊은이들은 보통 5, 6개의 언어를 한다. 인사하고 교역할 정도의 말이니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일단 문자가 생기면 언어는 고정된다. 문자를 중심으로 표준어 등이 생기고 그것이 우리의 언어생활을 결정한다.
프레시안 : 문자가 언어를 규정하는 예를 들어줄 수 있겠나.
유재원 : 같은 언어를 사용해도 문자가 다르면 결국 갈라선다. 파키스탄, 인도는 지금도 방언적 차이만 있지 말은 똑같다. 그런데 파키스탄의 우르두어는 아랍 문자를 쓰고 인도는 옛날부터 내려온 인도 문자를 사용한다. 남북한을 비유로 들자면, 우리가 북한에 가서 이야기는 통하는데 간판은 못 읽는 격이다. 그러니까 결국 둘이 갈라서지 않았나. 정 반대의 예도 있다. 중국인과 홍콩인은 서로 말은 통하지 않지만 같은 문자, 한자를 쓰기 때문에 중국 민족이라고 한다.
프레시안 : 문자향연을 준비 중이라고 들었다. 문자향연을 추진하는 이유도 이런 맥락인가?
유재원 : 우리는 한글이라는 정말 우수한 문자를 가지고 있어서 지금 이만큼 발전했다. 문자가 왜 생겼고 문자가 우리 생활에 가진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특히 그럴 자격이 있는 민족이다. 문자에 대해서, 전 세계에서 주도권을 가질 수 있는 자격을 따지자면 한글이 가장 훌륭한 자격을 갖고 있으니까.
문자향연에서 '100년 후에 세계 언어 생태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볼 예정이다. 예산 관련자들이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하니 일단 출발이 좋다.
"특정 문자로 된 텍스트의 질이 민족의 운명을 결정"
프레시안 : 또 문자가 가진 힘이 있다면 무엇인가.
유재원 : 사실 상당히 많은 정보를 말만 갖고 알 수 있다. 전설이니 뭐니 다 말로 전해지지 않나. 그런데 글자가 없어서는 안 되는 인간의 중요한 활동 분야가 있다. 바로 학문이다. 구비 학문이란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학문은 지식의 체계인데, 그 지식은 아무 지식이 아니라 진리, 옳은 지식의 체계다. 이것을 위해서는 기록이 필요하다.
문자가 만들어지고 나서 인류 역사를 가장 크게 바꿔 놓은 것이 바로 이 체계적인 지식이다. 이 분야에서 인류가 우열을 비교하면서, 학문을 발전시킨 나라가 그렇지 못한 나라보다 강해졌다.
그렇다면 문자의 힘은 어디서 나오느냐. 그 문자로 쓰인 텍스트가 어느 만큼 가치를 갖느냐에서 나온다. 어떤 문자를 읽었을 때 얻을 게 별로 없으면 그 문자를 배우지 않는다. 우리가 영어를 배우는 까닭은, 영어로 된 텍스트를 볼 때 가장 풍부한 식견을 얻을 수 있어서 아닌가.
그리스 인구는 약 1000만 명이지만 서양에서 학식 있는 사람은 거의 그리스어를 배운다. 플라톤, 호메로스, 헤로도토스의 책을 읽어야 하니까. 특정 문자로 된 텍스트가 얼마나 훌륭하고 생산적인 가치를 갖느냐에 따라 언어의 생명이 결정된다. 또 그에 따라 민족의 경쟁력과 운명까지 결정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유재원 교수. ⓒ프레시안(손문상) |
한글의 생명력 필요…힘은 '좋은 글'에서 나온다
프레시안 : 그런데 요즘 좋은 텍스트는 한글보다는 영어로 나오는 것 같다. 대학에서 영어로 강의하고 논문 내는 일이 굉장히 의무화되어 있다. 학문에서 영어의 기세가 매우 거세다.
유재원 : 비단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영어를 쫓아갈 수는 없다. 다만 한글이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야 한다. 한글로 된 좋은 글들이 안 나온다는 것이 문제 아니냐. 어차피 우리만 위협당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 같은 나라는 영어의 유입을 막지 않았지만 옛날부터 일본어로 모든 것을 번역해서 일본만 해도 모든 지식을 얻을 수 있게 했다. 자국어로 된 훌륭한 텍스트를 영어로 번역하는데도 일본이 세계 제일이다. 2008년 노벨물리학상 공동수상자인 일본인, 마스카와 도시히데는 영어를 전혀 못 한다. 그렇지만 전문가들이 그의 논문을 영어로 번역해서 세계 학지에 싣게 해서 노벨상을 받게 됐다.
프레시안 : 그렇다면 이런 혼란 속에서 한글이란 문자의 생명력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유재원 : 한글로 된 좋은 글을 써야 한다. 굉장히 똑똑한 사람들이 남의 언어를 사용하며 남의 언어를 위해서 봉헌한 비극적인 이야기가 있다. 20세기 최고의 문학가로 꼽히는 제임스 조이스는 아일랜드 사람이지만 모든 소설을 영어로 썼다. 영국의 극작가로 유명한 버나드 쇼와 오스카와일드, 시인 예츠도 사실은 아일랜드 사람이다. 여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영어를 잘해서 세계적 학자가 나오는 것은 좋지만 우리 것 다 잃고 세운 업적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한글이 생명력 잃을 때 가장 피해 보는 사람은 일반인"
프레시안 : 영문 텍스트를 생산하되 한글 텍스트를 그에 못지않게 중시하자는 뜻으로 들린다.
유재원 : 그렇다. 학문의 언어와 일상의 언어가 분리돼서 고급 정보와 고급문화 생활을 한글로 얻을 수 없을 때 가장 피해 보는 것은 일반 사람이다. 영어를 쓰면 무식해지는 국민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어떤 나라 국민이 지식을 얻지 못할 때, 그 나라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까.
현재 인도네시아는 상류층부터 영어를 쓰기 시작하면서 인도네시아어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 언어 장벽, 문자 장벽은 가진 자에게 가장 유리하다. 일단 한번 만들어지면 가장 견고한 장벽이다. 자기 자식에게 영어를 교육함으로써 자손들이 계속 지배 계층으로 남게 하겠다는 의도가, 인도네시아 민족을 사라지게 하는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프레시안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유재원 : 어떤 숲에 한 종류의 나무만 쫙 있으면, 병충해 하나에 모든 나무가 다 죽는다. 잡다한 나무가 있어야 한 쪽이 죽을 때 한 쪽은 견디면서 건강한 생태계가 갖춰진다. 언어도 똑같다. 지금 언어가 7000종인데 50년 안에 3000종으로 줄어든다고 한다. 이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견뎌야 할지 생각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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