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현지시간) 미군 폭격기들이 바그다드 소재 이라크 국영 TV 방송사 건물을 폭격한 것에 대해 국제 언론단체 및 인권단체들이 거세게 비난하고 있는 반면, 미국언론들은 '잘한 일'이라며 박수갈채를 보내 국제언론계의 따가운 눈총을 사고 있다.
미국의 언론감시단체인 FAIR(Fairness & Accuracy in Reporting: 보도에서의 공정성과 정확성)는 지난 30일(현지시간) ZNet에 올린 '미언론, 이라크 TV 폭격을 칭찬하다(U.S. Media Applaud Bombing 0f Iraqi TV)'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이같은 미국언론의 태도는 언론의 본분을 망각한 수치스러운 짓이라고 질타했다.
개전 초기 방송국, 발전, 수도시설 등 사회기반시설에 대한 폭격을 자제했던 미ㆍ영군은 지난 3월23일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이들 민간시설에 대해서도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3월25일 이라크 TV 폭격은 이러한 전략의 일환이었다.
미국과 영국 정부는 이라크 국영 TV가 미군포로 인터뷰를 비롯해 후세인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해 온 만큼 폭격이 불가피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국제 인권단체들은 방송을 비롯한 민간인 시설에 무차별 폭격을 가한 것은 제네바 협정을 위반한 명백한 전쟁범죄라며 그 책임은 미국이 져야 한다고 비판했다.
국제기자연맹(IFJ)의 에이단 화이트 사무총장은 폭격 다음 날인 3월26일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이라크 국영TV에 대한 폭격이 제네바 협정을 위반했는지 여부에 대해 국제적 조사가 수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화이트는 26일 “민주주의 국가에서 왔다는 정치 군사 지도자들이 단지 이라크 TV의 방송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폭격을 가했다”고 말했다.
26일 앰네스티 인터네셔널도 방송국 폭격은 ‘전쟁범죄’에 해당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방송국이 단지 선전 목적에 사용된다는 이유만으로 폭격을 가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앰네스티는 “설령 TV 방송이 군사적 목적에 이용됐다 하더라도 민간인 희생에 대한 책임은 연합군측에 있다”고 주장했다. 제네바 합의는 군사적 용도로 사용되지 않는 민간인 시설(국영이건 아니건)에 대한 폭격을 금하고 있다.
인권단체인 휴먼 라이츠 워치(HRW)도 이라크 TV방송국에 대한 폭격이 불법이라고 비판했다. HRW는 “이라크의 선전수단을 무력화하면 이라크 국민들의 사기는 떨어지고 이라크 정부의 정치적 기반도 손상될 수 있다”면서 “그러나 그러한 목적이 민간인 방송시설을 폭격해도 괜찮다는 합법성을 뒷받침하는 직접적인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이라크 국영TV 폭격 종용한 美 주류언론**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은 CNN, 폭스, NBC 등 미국 주류 언론의 태도다. 폭격 전부터 이라크 국영TV에 대한 폭격을 종용해 온 이들 언론은 제네바 협정이나 민간인 피해에 대해선 아무 말이 없다. 언론감시기구인 FAIR은 이라크 국영TV가 미국 포로들을 인터뷰한 장면을 내보냈을 때 이들 언론이 제네바 협정을 들먹이며 이라크를 비난했던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라며 이라크 국영TV 폭격에 대한 미국 언론의 보도태도를 비판했다.
폭스 뉴스의 존 깁슨은 폭격 전날인 3월24일, “이라크 TV 방송국을 공격해야하지 않겠느냐”고 종용했다. 같은 날 폭스의 빌리 오레일리도 “TV 방송국을 파괴했어야 했다. 왜 연합군은 이라크 TV 방송국을 파괴하지 않는가?”라고 가세했다.
MSNBC의 데이비드 슈스터는 “연합군은 이라크 국영 방송국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는데도 왜 방송이 계속되도록 내버려두는지 의구심이 쏟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CNBC의 포레스트 소우워는 “방송국 건물이나 송전탑을 파괴할 수도 있을 것”이라며 선택적인 폭격을 주장했다.
같은날 NBC 저녁뉴스에서 안드레 미첼은 “놀랍게도 미국은 아직 이라크 TV 방송국을 제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미첼은 “방송국이 민간인 지역에 있어 이를 폭격하면 아랍세계의 분노를 유발할 것이다. 또한 연합군이 바그다드에 입성한 후 방송국을 활용할 필요성이 있다”는 미국 관계자들의 미온적 입장을 전하며, “그러나 이라크 TV가 방송을 계속하면 후세인에게 그의 권력을 유지하는 강력한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폭격을 종용했다. 미디어 시설에 대한 폭격을 금지한다는 제네바 협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제네바 협정 위반 여부는 무관심**
이라크 국영 TV가 결국 폭격되자 미국 언론에선 만족감이 터져나왔다.
25일 CNN의 아론브라운은 “많은 사람들이 왜 여태까지 이라크 TV가 방송을 하고 있는지, 왜 연합군이 이라크 TV의 방송을 허락했는지 이해를 못했었다”고 말했다. CNN 특파원 닉 로버트슨은 TV 방송국을 폭파함으로써 “이라크 지도자들이 이라크 국민들에게 건재를 확인시키며 이라크를 여전히 통치하고 있다고 과시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을 제거하게 됐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의 미셸 고든은 25일 CNN에 출연, 이라크 국영TV 폭격의 정당성을 설파했다. 그는 “이라크 국영 TV가 사담 후세인이 이라크 국민들을 선동하고 자신의 건재를 과시하는 장면을 봤을 때, 이라크 방송에 대한 폭격이 필요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한술 더 떠 26일자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폭스 뉴스의 존 깁슨은 “사담 후세인의 대국민 담화가 방송되도록 허용한 것에 대한 폭스의 비판이 효과를 거두었다”며 이라크 TV를 폭격하도록 만든 공로를 자화자찬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라크 TV에 대한 공격이 합법적이냐에 대한 논의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 주류언론의 이 같은 태도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라크가 미국인 전쟁포로들의 화면을 방송하자 백악관이 제네바 협정 위반을 들어 이라크를 비난했을 때, 이들 언론은 국제법 위반 여부를 관심사로 들먹인 장본인들이다. 미국 언론이 미국의 행위에 대해 똑같은 잣대를 적용하지 못한 것은 그래서 더욱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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