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이라크 공격은 2001년 9.11 테러에 의해 촉발된 것이 아니다. 이미 10여년전부터 미국 내 강경우파들이 치밀하게 준비해온, 군사력에 의한 세계 지배의 첫 신호탄이다."
미국의 진보적 학자이자 언론인이 이같은 주장을 내놓아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진보파의 정치평론을 소개하는 인터넷 사이트 크라이시스페이퍼(The Crisis Papers) 편집자인 버나드 바이너 박사는 지난 6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게재한 ‘부시는 어떻게 실패를 향해 거만하게 걸어가게 되었나: 부시의 외교 모험주의(How to Swagger and Bully Your Way to Disaster: Bush's Foreign Adventurism)’ 제하의 논평을 통해 일방적인 이라크 공격 계획이 수립된 역사적 맥락을 소개했다.
<사진: 체니 >
바이너가 10년간의 이라크 공격 계획을 세웠던 주역으로 꼽은 인물들은 현재 부시 미 행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소위 ‘강경우파(HardRight)’들이다. 이들은 부시 현 대통령 당선 전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향한 프로젝트(PNAC, Project for the New American Century)’라는 우파 싱크탱크를 거점으로 저술활동을 펴왔던 체니 부통령, 럼즈펠드 국방장관, 리처드 펄 국방정책위원장, 폴 월포위츠 국방부 부장관, 존 볼튼 국무부 차관 등을 포함한다.
***10년간 내놓은 7개의 전략보고서**
바이너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하원 의회에서 보수주의와 싸우고 섹스 추문으로 벼랑끝에 몰린 정치생명을 구하고자 애쓰는 동안 강경우파들은 다음 세기의 외교정책을 만들고 있었다”며 이들이 10여년간 발간한 보고서를 중심으로 현재의 이라크 공격 계획이 무르익어가는 동안 제시된 7개의 문서를 증거로 제시했다.
첫번째는 지난 92년 폴 월포위츠(당시 국방부 정책담당 차관, 현 국방부 부장관)가 작성해 딕 체니 당시 국방장관(현 부통령)에게 전한 보고서다. 월포위츠는 이 보고서에서 유일 초강국인 미국이 호전적이고 군사중심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보고서는 언론에 유출되었으나 당시에는 이 정책을 집행할 수 있는 객관적인 정치력이 결집되지 못했기 때문에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이 보고서를 반려했다.
두번째는 현재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된 미국 특사인 잘마이 할리자드가 1995년에 쓴 <봉쇄에서 전 지구적 리더십으로: 냉전 후의 미국과 세계>라는 책이다. 당시는 클린턴 행정부에 참여하지 않는 많은 강경우파들이 책과 주요 잡지를 통해 앞선 92년 보고서의 정책을 선전하기 시작한 때였는데, 이 책은 그 대표격이었다.
할리자드는 미국이 호전적으로 세계를 대하고 지구상의 천연 자원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1년 후인 96년, 신보수주의자인 빌 크리스톨(현재 우파 잡지 위클리 스탠다드 편집장)과 로버트 케이건은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스>에 “신(新)레이건주의 외교정책을 향하여”라는 논문을 발표, 미국의 목표는 “자비로운 세계 헤게모니국”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바이너는 이것이 미국의 전면적 세계지배를 완곡하게 표현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평했다.
세번째는 강경우파 싱크탱크 PNAC가 클린턴에 보낸 98년의 서한이다. 서한에는 “유엔에서 동맹국들의 지지를 모으지 못하더라도” 미국은 이라크 전쟁을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당시 관직을 맡고 있지 않던 빌 크리스톨, 럼즈펠드, 월포위츠가 클린턴 대통령에게 이라크를 공격하라는 로비였다. 바이너는 “동맹국 지지 없이도 전쟁해야 한다는 말은 어디서 많이 들어보지 않았나?”며 오늘날의 상황과 98년의 주장이 유사함을 강조했다.
<사진: 럼즈펠드>
네번째는 PNAC가 2000년 9월 공화당의 선거 승리를 예견하며 발행한 “미국 방위의 재건: 새 세기를 향한 전략, 힘, 자원” 제하의 백서다. 백서를 발간한 이들은 공화당 극우세력의 전략을 쥐고 흔드는 인물들로 체니, 럼즈펠드, 리처드 펄(현 미 국방정책위원장), 폴 월포위츠, 빌 크리스톨, 엘리엇 아브람스, 존 볼튼(현 미 국무부 군축 및 국제안보 담당 차관), 루이스 리비(현 체니 부통령 비서실장) 등이었다.
2000년의 PNAC 보고서는 왜 미국이 제국주의적 군사주의인 팍스 아메리카나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매우 솔직했다고 바이너는 평했다. 보고서는 “소련이 해체된 지금은 미국의 이해관계와 이상을 좇는 데 가장 좋은 시기이며... 새로운 세기의 과제는 미국의 평화를 지키고 향상시키는 것”이라며 “팍스 아메리카나를 지키고 향상시키는 방법은 “여러 개의 동시적인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PNAC는 또 세계 경찰로서의 미국은 어떤 대항세력도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며 이를 위해 “유엔이 아닌 미국의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다섯번째는 부시 대통령의 백악관 입성 직후 행정부에 우호적인 대외관계협의회(CFR)가 작성한 “21세기를 위한 전략적 에너지 정책”이라는 2001년 보고서다. 이 보고서는 미국이 더 호전적이어야 한다며 “미국 대외정책에 있어 에너지의 역할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했다. 이 보고서는 석유를 “필수 안보 요건(security imperative)”으로 반복 언급했다.
여섯번째는 9·11 테러 발발 5시간 후 이라크 공격 계획을 세우라고 보좌관들에게 지시한 럼즈펠드 장관의 말을 받아 적은 노트다. 럼즈펠드의 정보 보좌관들은 테러가 알 카에다의 소행이고 이라크와는 무관하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럼스펠드는 “크게 가자. 관련이 있건 없건 싹 쓸어버려라”라고 말했다.
일곱번째는 2002년 9월 부시 행정부가 발행한 문건인 “미국국가안보전략”이다. 이로써 십여년간의 비공식·민간 보고서는 명실상부한 공식 국가전략이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바이너는 미국 정부의 공식 정책이 과거 10년간 PNAC에서 발행한 여러 백서들에서의 정책 제안과 정확히 일치했다고 주장했다.
<사진: 존 볼튼>
***“'무장해제'와 '체제교체'는 특수효과에 불과”**
바이너는 지난해 선포된 선제공격독트린과 미국의 제국주의적 목표를 위해서는 국제조약이나 국제여론도 무시할 수 있다는 미국의 태도가 강경우파 보고서들의 핵심이라며 “부시 행정부는 미국을 새로운 로마제국으로 간주하는 듯 하다”고 말했다.
그는 10년이라는 세월동안 준비해온 이라크 공격의 맥락을 짚어내는 데 있어 “이라크 공격은 부시와 그의 일당들이 거론하는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며 “무장해제나 체제교체(regime change) 같은 말들은 사람들을 현혹시키기 위한 ‘특수효과(smoke nd mirrors)’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바이너는 이번 전쟁이 수만명의 민간인을 희생시키고 테러리즘을 만연시킬 것이며, 미국은 더욱 고립될 것이고 경제는 좌초해 세계적인 경기침체나 공황이 뒤따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 헌법의 정신이나 정치적 반대자를 정중히 다뤄야 한다는 지혜, 존경받아왔던 외교적 전통 따위는 조금도 생각지 않는 자들에 의해 미국 정부가 강탈되었다(hijacked)”며 전쟁은 “수치스럽고 역겨우며, 부시를 탄핵할 만한 일”이라고 개탄했다.
바이너는 이번 전쟁을 “미국과 미국을 화나게 하는 모험을 원치 않는 부하 나라들(hangers-on nations)에 의해 저질러지는 일방적인 선제공격”이라고 표현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