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영수회담에서 "세금을 올리지 않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노 대통령에게 감세를 요구했다. 과세 대상이 상위 2%에 불과한 종합부동산세가 '세금 폭탄'으로 왜곡돼 노무현 정부를 괴롭히던 때다. 한번 가동하기 시작한 이 세금 폭탄 프레임은 노무현 정부 끝까지 꼬리표로 남아 정권교체의 큰 이유로 작용했다.
증세 정책은 정치적 이득이 별로 없다. 자기가 국가에 내야 할 돈은 빤히 보이는 반면 국가가 그 돈으로 내게 무얼 해줄 것인지는 막연하기 때문이다. 조세저항이 강하게 일어 '세금의 저주'가 되풀이될 수 있다.
민주당 김한길 대표가 11일 "세금 폭탄 저지 서명운동을 12일부터 시작하겠다"고 했다. 그는 박근혜 정부가 발표한 세제 개편안을 '월급쟁이에 대한 세금폭탄'으로 규정하고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김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은 중산층 복원을 강조했으나 이번에 발표된 세제개편안은 중산층과 서민으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걷는 것이 중점으로 돼 있다"고 했다.
김 대표는 전날 서울광장에서 열린 '민주주의 회복과 국정원 개혁 촉구 2차 국민보고대회'에서도 "민주주의가 무너진 자리에 세금 폭탄이 터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당시 절대로 증세는 없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 말은 재벌과 슈퍼부자들에게만 증세가 없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는 "서민과 중산층에게 그 돈을 뺏는 것은 갓난아이에게 우유값을 뺏는 것, 아이들 학원비를 뺏는 것, 어르신들에게 드릴 용돈을 뺏는 것"이라며 "서민들의 십만 원, 이십만 원은 재벌들의 천만 원 이천만 원보다 훨씬 더 소중한 돈"이라고 했다.
김 대표가 세제개편안 저지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장외 투쟁의 추가 동력을 확장하고 대중적 이슈인 세금 문제로 박근혜 정부를 압박해 가려는 조치로 풀이된다.
민주당에게도 '양날의 칼'
실제로 세금 인상은 대중 수용성이 매우 높은 이슈다. 게다가 노무현 정부 때의 세금 폭탄 프레임이 허구에 기반한 정치공세였던 것과 달리, 박근혜 정부의 이번 조치는 (세금을 더 내야 할) 대기업에 대한 세금 혜택은 유지한 반면 봉급생활자 등 중간계층을 쥐어짜는 방향으로 맞춰져있다.
정부와 새누리당의 해명이 먹히지 않는 건 이같은 형평성 문제 때문이다. 새누리당 나성린 정책위부의장은 "세 부담이 16만 원 늘어나는 것을 세금폭탄이라고 하는 것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며 "한달에 1만 원가량 늘어나는 것은 국가적인 세수 증대 채원에서 십시일반 기여하는 것으로 봐야한다"고 했다. 그러나 상위계층이나 대기업과의 세 부담 형평성이 교정되지 않은 탓에 중간계층의 반발만 더 사고 있다.
민주당의 '세금 폭탄' 공세는 단기적으로 효과를 볼 가능성이 있다. 보수 언론은 정부의 세제개편안을 '사실상의 증세', '세금 폭탄' 등으로 비판하고 있다. 새누리당도 국회 검토 시 손질을 예고했다. 직접 증세를 회피한 정부의 재정확충 계획이 성공할 가능성도 낮다. 내가 낸 돈으로 국가가 돌려줄 가시적인 조치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박 대통령은 자신이 8년 전에 재미를 본 세금 폭탄 프레임과 똑같은 정치적 부메랑을 맞을 수 있다.
당장은 공격수의 위치이지만, 민주당에게도 세금 문제는 양날의 칼이다. '중산층 서민 세금폭탄 저지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게 될 장병완 정책위의장은 "이명박 정부 때 만들어진 부자감세를 철회하면 매년 24조 원의 세입을 늘릴 수 있다"고 했다. 법인세 인상, 고소득자에 대한 세 부담 강화 등을 염두에 두고 재정 계획의 방법론에 포커스를 맞춘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월급쟁이 세금폭탄' 프레임에 충실해 중간층에 대한 세 부담 완화 쪽에 무게중심을 둘 경우 당 안팎의 '증세론'과 마찰을 빚을 수 있다.
세금과 복지는 동전의 양면이다. 노무현 정부의 감옥이던 세금 폭탄 프레임은 감세를 실천한 이명박 정부에 와서야 터진 무상급식 이슈로부터 깨지기 시작했다. 민주당이 세수 증대 방법론으로만 줄다리기를 할 것인지, 무상급식과 같은 복지 논쟁으로 전면화해 정치적 승부를 걸 것인지도 지켜볼 대목.
김한길 대표는 "세금이나 예산은 숫자로 된 정치철학서라 할 수 있다. 각 정치세력이 어떤 철학을 가지고 정치를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구체적인 예산이나 세제를 통해 말해지는 것"이라고 했다. 다시 벌어진 세금 논쟁, 박근혜 정부의 친기업적 속살과 함께 민주당의 실력도 도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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