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백48석을 거머쥔 원내 제 1당. 그에 따른 막강한 조직력과 자금력. 타 후보와 비교가 안되는 화려한 참모진. 이른바 '조중동'으로 일컬어지는 주류 언론의 전폭적인 지원. 게다가 투표일을 하루 앞둔 상황에서 상대 진영의 핵분열까지.
선거에서 휘두를 수 있는 무기란 무기는 모두 지닌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또다시 집권에 실패한 원인은 무엇일까.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한나라당과 이 후보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끝내 노무현 후보를 21세기의 첫 지도자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감동의 정치'에 실패**
그것은 한마디로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채, 낡은 수법의 정치로 일관해 변화를 갈망하는 국민들에게 감동을 선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거 막바지까지 이 후보는 '법과 원칙', '합리'와 '안정'을 내세웠다. 상대방인 노무현 후보의 감정적이고 즉흥적 이미지와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이회창만의 캐릭터였다. 10개월동안 펼쳐진 대선 레이스에서도 이 후보에게는 이렇다 할 '악재'도 없었고, 그렇다고 특별한 '악수'도 두지 않았다. 정치권을 휩쓴 '노풍', '정풍' 앞에서 이 후보 지지율이 꾸준하게 30%대를 유지한 '비결'이었다.
그러나 이 후보는 고정표만을 지켰을 뿐, 변화와 개혁을 갈망하는 국민적 기대를 수렴해 내는 데는 한계를 보였다. 노무현, 정몽준 후보의 지지율이 최저치로 하락한 1강2중구도 상황에서도 이 후보의 지지율은 '마(魔)의 35%'라는 장벽을 뛰어넘기가 힘겨웠다.
가장 큰 이유는 '감동의 정치'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일시적 바람이든, 월드컵 성공에 힘입은 허상이든 '노풍', '정풍'에는 낡은 정치의 개혁을 바라는 국민들의 기대심리가 응집돼 있었다. 정작 정치 입문 6년 동안 '대세론'이라는 수식어가 떠나지 않았던 이 후보에게서는 한번도 발현되지 않은 현상이었다.
***'안티의 정치'에 기댄 네거티브 선거전**
그 사이 이 후보와 한나라당은 도청 문건 폭로, 색깔론 시비, 무차별한 의원 영입 등 낡은 정치의 악습을 되풀이하며 변화에 대한 국민적 열망에 등을 돌렸다. 특히 이번 대선처럼 세대간 분화가 뚜렷한 구조에서 젊은 유권자들의 표심을 사로잡는 데 이 후보 진영은 실패했다.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탓이다.
또한 지난 5년간 오로지 '반DJ 정서'에 기댄 채 정치적 희망을 제시 못하는 '안티의 정치'에 대한 유권자들의 염증을 이 후보와 한나라당은 눈치 채지 못했다.
대선의 전초전 격인 6.13 지방선거와 8.8 재보궐 선거에서 한나라당은 'DJ 때리기'로 톡톡한 재미를 봤다. 그러나 반사이익에 기댄 네거티브 선거전의 효과가 대선까지 이어지리라는 기대는 한나라당의 착각으로 드러났다. 국민들은 이 후보에게 부패정권을 심판할 자격을 결국 부여하지 않은 셈이다.
***선거전략 차원의 실패**
이 후보는 또 자신에게 덧씌워진 '특권층' 이미지를 끝내 떨쳐버리지 못했다.
30여년간의 법관생활, 감사원장, 국무총리를 역임하며 쌓아온 '대쪽' 이미지는 '병풍'과 '빌라 파동' 등을 겪으며 현 정부의 권력비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실추됐다. 특히 9월까지 이 후보의 발목을 붙들었던 병풍 파동은 사실상 이 후보의 손을 들어준 검찰 조사에도 불구하고 여론의 저변에 쌓인 의혹까지 털어내지는 못했다.
한편 선거 전략적 차원에서도 보면 자신의 지지세력인 이른바 보수세력을 견인해 내는 데 실패한 점은 이 후보의 결정적 패인으로 꼽힌다.
노-정 단일화 전, 이념과 성향 면에서 이 후보에 가까운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가 "이회창 후보와도 연대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표했으나 이 후보와 한나라당은 엄청난 파급력을 지닌 '정몽준 효과'에 상대적으로 둔감했다.
자민련 김종필 총재와의 갈등도 잇따른 자민련 의원 영입 등으로 선거 막판까지 끝내 풀리지 않았다. 의원 영입은 곧바로 여론의 '역풍'으로 귀결됐고 이로 인해 김 총재의 적극적 지원을 끌어내지 못한 점은 접전이 예상되던 충청권에서 패배한 한 요인이 됐다.
또한 인터넷의 영향력 등 변화된 미디어 선거전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금력과 조직력에 의존한 선거로 일관했다는 점도 이 부분에 발빠른 대응을 보인 노무현 후보와 대조되는 부분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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