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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여자, 그리고 영화 -<13場> 女子와 男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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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여자, 그리고 영화 -<13場> 女子와 男子

<김정환의 '읽는 영화' - 임옥상 그림> 전태일에 대한 명상

암흑. 음악은 다시 마렝 마레. 그렇게 음악이 암흑을 새기면, 12개 두룸으로 묶인, 삶은 계란들과, 튀김 통닭 반쪽 짜리들. 줄어들면, 교도소 사방 한 구석. 삶은 계란을 까거나 닭다리를 집어 들고 허겁지겁 먹어대는 여수감자들. 그 속에 그녀가 있다. 만삭이었다. 여교도관은 의자에 앉아 거드럼을 피우며 그 광경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사방 소지가 여교도관에게 쪽지를 전해 주고 여교도관이 여자를 불렀다. 167번. 면회다... 예?... 먹다 말고 입에 묻은 튀김기름을 손등으로 씻어내며 여자가 되묻고, 여교도관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 쪽지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한껏 뜸을 들인 후 말했다. 특별면회야...
--뭐야, 뭐? 야, 너 나가게 되나 부다!... 여수감자들이 웅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교도관의 매서운 눈초리에 흠칫 해서 그냥 눌러 앉았다. 교도관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부드럽게 말했다. 누구지? 부모님은 아닌데, 애인인가?...
--뭐, 애인. 어머머... 좋겠다...
-누굴까? 이름을 모르는 사람인데... 더군다나 보안과장실에서... 그녀는 더럭 겁이 났다. 또 조사를 시작하려나... 뭐, 고문을 받은 적은 없었다. 그러나 능멸이 더 고통스러웠다. 너 쌍년. 공순이 주제에. 걔가 너를 데리고 살 것 같아? 지랄하고 자빠졌네... 그 정도는 보통이었다. 그들은 남녀간 은밀한 구석을 흡사 야구방망이로 들쑤셔 대듯 하면서 그녀를 괴롭혔다. 야, 너 벌써 그 맛 알어? 내가 한번 화끈하게 해주까?...
--꽤나 밝히게 생겼는데 뭐. 그 새끼 그게 쎈가봐. 그러니까 이년이 이렇게 일편단심으로 죽고 못 살지... 그건 이미 능욕이었다. 구치소로 넘어온 후에는 신고식이 좀 고됐지만, 취조받을 때에 비하면 한결 편안했다. 다른 수감자들도 그녀 이야기를 듣고는 사상범 대우를 해주었다. 그러나 놀라운 게 있었다. 그녀는 수감자들이 주고받는 진하고 야한 농담들을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자신을 발견했다. 무척 너덜너덜해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너덜너덜'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보안과로 가는 그녀의 발걸음이 휘영청 늘어졌다.
--어머.
여자를 특별면회온 사람은 놀랍게도, 선배였다. 그래. 내가 이 사람 이름을 여지껏 모르고 있었구나... 보안과장은 근엄하게 제자리를 지키며 고개만 끄덕했고 손님접대용 소파에 앉은 선배가 오히려 제 집 처럼 편한 자세라서 어딘가 유들유들 해 보였다.
오랜만이네요... 그녀가 쾌활하게 인사를 했다. 선배는 저으기 놀라는 모양이었으나 금새 표정을 수습 했다. 다 잘 있습니다...
-바깥 소식을 전해 주면 안되요... 아, 알았습니다. 보안과장님, 에프엠이시네요, 하하... 선배는 최소한 보안과장보다는 높은 사람의 끝발로 온 거였다. 사실 보안과장은 그를 껄끄러워했고 그는 보안과장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곧 나올 거예요... 이렇게 신경 안 써주셔도 되는데... 아, 아녜요... 선배가 그렇게 손을 내젓다가 보안과장을 한번 흘끗 보더니 말을 이었다. 아니, 무슨 진 죄가 있어야지. 제가 검사 만나서 단단히 따졌어요. 아 도망다니는 애인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것도 죄냐구. 하여간 이 새끼들... 으흠, 하고 보안과장이 헛기침을 했다. 선배가 말을 끊었다가, 이대로 끊기기는 억울했던지, 한 톤 낮추어서 말했다. 더군다나 임산부를... 그 억양은 묘한 데가 있었다. 마치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을 마지못해 인정하는 듯한. 선배는 나를 좋아하는 걸까?... 그 너덜너덜한 생각은, 꿈틀거리며, 여자를 화들짝 놀라게 했다. 그래. 이제 곧 애기가 태어날 텐데... '곧 나올 거'라는 선배의 예언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예정일 때문인지 선배 끝발 때문인지 애매했지만. 둘 다였다. 아니, 둘의 중첩이 애매했다. 그녀가 나가는 날은 사방 전체가 술렁댔다. 교도관도 진심으로 축하를 해주었다. 여자는 배를 앞으로 쭈욱 내밀고 뒤뚱거리며 각방마다 인사를 했고, 교도관이 그런 그녀를 흡사 안내했다. 몸조리 잘 해요... 여수감자 한 명이 창 밖으로 손을 내밀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그녀는 고개 숙여 절하고 그 손을 잡았다. 내가 무슨... 교도관이 몸을 돌려 딴데를 쳐다 보았다. 그건 대단한 배려였다. 출소자를 통해 외부에 편지 쪽지라도 전달되면 큰일 아닌가. 그래서 출소자는 격리시키는 것이 절대 원칙이었다. 아마도 뱃속에 든 아기, 이제 막 태어날 새 생명이 그토록 너그러운 장면을 가능케 해주었다. 하지만, 이 아기를 내가 키울 수 있을까?... 여자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시부모(!)가 데려 가겠지.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내가 이 아기를 키울 수가 있을까... 수감자 또 한 명이 고개를 삐죽 내밀고 밉지 않게 음탕을 떤다. 카. 좋겠다. 서방 만나면. 아흐. 생각만 해도 짜릿해... 감방 안이 호호깔깔로 시끄러워졌다. 호호. 저년은 그저 그 짓밖에 몰라... 뭐 어째, 이년? 이년이... 접시 주제에... 뭐라, 뭐라꼬?... 우당탕 싸우는 소리가 감방 안을 구르고, 교도관은 쇠창살을 탁탁 두들길 뿐 별 말이 없었다. 구치소 밖에서 그녀를 맞은 사람은 선배뿐이다.
'응애, 응애.' 애 태어나는 소리. 사방 복도가 변하면 대학 강의실 복도. 강의실 안에서 남자, 친구1, 2, 선배가 앉아 회의를 하고 있다. 선배는 종이에 메모를 했다. 너 괜찮아, 이렇게 다녀도?... 친구1이 남자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남자는 '뭐, 나야 흐지부지 된 거 아냐?' 그렇게 정말 흐지부지하게 대답을 했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듯이. 사형 받았던 사람들도 나왔는데. 뭐, 아니라도, 학교가 제일 안전한데고. 특히 이리로 와서는... 산이 있으니까... 마누라 나왔다며?... 친구1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고, 남자가 '응? 응, 아직 못봤어.' 그렇게 대충 끊었다. 선배는 남자에게 여자의 출감 및 출산 소식을 전해주었다. 아이를 시부모에게 전해 준 것도 그였다. 그러나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뭘 하는지에 대해서는 그냥 '잘 있다'고만 할 뿐이었다. 오늘은 좀 자세히 물어 볼까?... 하지만, '장례식' 날짜가 너무 긴박했고, 좀체 기회가 오지 않았다. 친구1의 무턱 댄 질문은 그런 점에서 화자를 배려하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친구2가 그래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걸... 남자는 그런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드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건 친구 1의 탓이 컸다. 애는?... 친구2가 물었고, 예상대로 편하게 들렸지만, '애'라는 말과 어감이 피차 매우 낯설었다. 부모님이... 보긴 봤어?... 남자는 대답 대신 고개를 흔들었다. 흠... 친구2가, 안됐다는 표정과 약간은 야릇한 표정을 섞더니 무지근한 훈계조로, 스스로 낙착하듯 말했다. 애는 봐야지... 큰일 날 소리. 자 보자. 그러니까 종교계는 되겠고... 자넨... 그 말은, 선배였다. 그는 최초로 그 문제에 대해 의견개진을 하는 셈이었는데 앞의 '큰일 날 소리'를 뒷말이 전광석화로, 아뭏지도 않게 지워버리는 거라서, 한편으로 매우 능란하게 다른 한편으로 매우 잔인하게 들렸다. 그런데 화자한테만 그렇게 들린 것이 아니었다. 학생회는 다 됐어요. 대대적으로 치르게 될 겁니다... 친구1이 대답했는데, 능란함이든 잔인함이든 선배의 그 무언가에 압도당한 엉겁결 투가 배어있었던 것. 하여튼 이 친구 조직엔 귀신이군... 친구2가 그렇게 분위기를 때웠으나 그는 사태의 긴박함(?)을 눈치 챘는지 못했는지 좀 애매했고, 선배는 일사천리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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