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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타올랐던 '50개의 촛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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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타올랐던 '50개의 촛불'

<독자 편지>7일, 파리 여중생 추모시위 풍경

지난 7일 오후 6시 광화문에 2만여명의 시민들이 고 신효순·심미선 양 추모 촛불시위를 벌인 바로 그 시간 멀리 프랑스 파리에서도 교민과 유학생들이 "광화문 시위에 촛불 하나 보태는 심정"으로 추모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이 시위에는 50여명의 유학생, 교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석해 프랑스인들에게 '의정부 여중생 사망 사건'과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의 부당성'을 알렸다. 시위대는 전단지를 배포하고 촛불시위를 벌인 뒤 파리 소재 미대사관에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현지 교민과 유학생들의 추모시위는 7일 스웨덴, 네덜란드, 호주, 미국 L.A 등에서도 열렸다.

이같은 움직임은 빠르게 퍼져 지난 9일 미국 L.A 로욜라 법대에서 촛불시위 및 위령제가, 10일 캐나다 토론토 크리스티역에서 추모시위가 열렸다. 또 오는 13일 오후 5시(현지 시각) 미국 유니온 콰드 앞 일리노이주립대와 14일 오후 3시 30분(현지 시각) 독일 베를린 Zoo역 근처인 미 문화원에서, 오후 2시(현지 시각) 러시아 모스크바 주재 미 대사관 앞에서 추모시위가 열릴 예정이다. 호주에서는 지난 7일 이후 매일밤 8시 시드니 시내 타운 홀(Town Hall) 앞에서 촛불시위가 열리고 있다.

한 독자가 파리에서 추모시위를 주도한 박영신씨가 쓴 글을 프레시안에 보내와 전문을 게재한다. 편집자주.

***파리에서 타올랐던 '50개의 촛불'**

지난 12월 7일 오전 10시(한국 시간 오후 6시) 파리의 마들렌 광장(place de la madeleine)에서 '여중생 미군 장갑차 사망 사건'에 항의하는 교민, 유학생 집회가 열렸다. 이것은 한국의 제2차 광화문 촛불시위와 때를 같이한 것으로 철저히 평화적, 비정치적 의도로 기획된 것이었다. 50여명의 유학생, 교민의 자발적 참여로 진행된 집회는 프랑스인들에게 '여중생 사건'과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의 부당성'을 알리는데 역점을 두었으며, 시위대는 전단지를 배포하고 촛불침묵시위를 거쳐, 파리 소재 미대사관에 항의서한을 전달하는 것을 끝으로 자진해산했다.

지난 12월 1일 저녁, 필자는 파리의 한인신문 '오니바(oniva)', '한위클리(hanweekly)' 등의 게시판을 통해 '파리에서도 추모의 촛불을 밝힙시다!'라는 제목으로 파리 집회를 제안한 일이 있다. ID를 jocaste로 쓰고 있는 파리 교민이다.

시작은 혼자서 했지만 주변의 도움으로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4일 저녁부터 집회 사실을 알리는 전단을 제작해, 파리 시내의 각 대학과 한인 식당, 식품점 등을 중심으로 홍보 작업에 들어갔으며, 5일 파리 경시청(préfecture de police de paris)에 집회 신고를 내고 6일 오전 허가를 받았다. 경시청 담당자는 '집회신고는 늦어도 5일전에 접수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번 집회의 특별한 의미를 감안해 허가해 준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집회장소는 계획했던 미대사관 앞이나 콩코르드 광장(place de la concorde)이 아닌 마들렌 광장으로 제한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그리고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는 2차, 3차 집회를 원활히 진행 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필자는 순순히 동의했다. 곧이어 6일 저녁, 유학생 4명과 프랑스인 2명이 모인 가운데, 플래카드와 전단, 서명용지 등이 제작되었다. 대중 집회를 염두에 둔 까닭에 과격한 언어사용은 자제했다.

집회 당일인 7일 아침, 손에 손에 촛불을 든 유학생, 교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물론 경시청 담당자도 집회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이중에는 바띠뇰 교회의 김태환 목사님, 지난 79년 조작된 '한영길 사건'으로 망명하신 이유진 선생, 수필가 황순애씨의 모습도 보였다. 기독교 방송 파리 객원기자 하석건씨는 현재 스페인에 있는 관계로 그의 부인과 두 자녀만이 참석했으며, 나머지는 유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준비된 플래카드를 고정시키고 일렬로 늘어선 참가자들은 곧 침묵시위에 들어갔으며, 몇몇은 프랑스인들에게 사건을 알리는 전단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항간에서는 '주최측이 누구냐', '솔직하게 집회의 의도를 밝히라'는 비난도 적지 않았으며, 현장에 나온 한 교민은 경시청 담당자들에게 '이 집회는 좌익에 의해 주도되고 있고, 북한과 관계있는 인사도 몇 명 있다'고 말해 순수한 목적의 참가자들을 경악케 했다.

한 유학생은 '파리 교민의 정치의식이 한국의 7-80년대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시대착오적인 냉전 논리로 집회를 퇴색시키려한 그분의 발언에 필자도 통탄을 금할 수 없다. 열네살 꽃다운 나이의 아이들이 미군 장갑차에 희생되었고, 미군 법정에서 미군 배심원에 의해 살인 미군이 무죄 석방되었다. 우리가 말하고자 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정치적 의도를 묻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것은 없다. 엄밀히 말해 주최측은 필자 한사람뿐이다. 필자는 이전에 단 한번도 대중 집회를 조직해 본 경험이 없는 파리 거주 한국인에 불과하다.

반정부 집회는 더욱이 아니었다. 필자는 바로 이런 오해의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한인회를 비롯한 기존의 단체와 연계하지 않았다. 그저 한국에서 들려오는 기막힌 소식에 분노했고, 광화문 시위에 촛불 하나 보태는 심정으로, 또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멀리 파리에서도 연대(solidarité)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집회를 소집한 것이다. 집회 참가자들은 개인의 자격으로 현장에 나와 주었고, 면식도 없던 그들은 같은 생각으로 그 자리에 모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쉽게 마음을 열어 주었다.

집회가 끝나고 현장을 정리한 후 오페라 부근의 한국식당에 모인 20여명의 참가자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의견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한 유학생은 "더 적극적이지 못해 부끄럽다.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일이라 많은 사람이 참여하지 못한 것 같다"며 아쉬움을 토로했고, 이유진 선생은 "바로 한국민을 위해 한-미 관계는 재조정되어야 한다"면서 젊은이들이 모이는 자리에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참석했다고 말했다. 집회 참가자들은 또 "수적으로 미약했다 해서 실패한 집회는 아니"라는 데에 의견을 모으고 "해야할 말을 했다"는 점에 무게를 두자면서 이번 집회가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도록 연속적인 홍보를 통해 점차적으로 확대해 가자고 결의를 다졌다.

적은 인원으로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이번 집회는 많은 한계에 부딪쳐야 했다. 집회를 준비한 이들은 밤샘 작업으로 지칠 대로 지쳤다. 그러나 좀더 많은 교민, 유학생들이 힘을 모아 준다면 우리는 다시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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