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씨팔. 끄윽.
굵직하고 막 되먹은, 술 취한 사내 소리다. 어둠 새겨지면 밤거리 포장마차. 손님 둘과 화자, 선배, 친구1. 손님 둘과 화자 일행과는 거리가 좀 떨어져 있다. 손님1은 작업복 차림에 자세가 많이 흐트러졌고, 그 옆에 앉아 손님2는 좀 얌전해 보이는, 와이셔츠 차림이다. 그들 말고는 손님이 없었다. 옆 포장마차 쪽도 손님이 왁자하지는 않았다. 손님 둘은 고등학교 동창인 듯 했다. 하나는 대학을 나와 회사에 들어갔고 다른 하나는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곧바로 기술자가 된. 그러나 서로 꿀릴 것은 별로 없는. 묵중한 몸집에 눈이 째진 포장마차 아줌마가 안주 접시를 준비하다가 간혹 사나운 눈길을 손님1에게 주고 화자 일행은 모두 한데 몰켜 힐끗힐끗 손님들 쪽 눈치를 보는 자세였다. 다른 손님이 없으므로 매우 우스꽝스러운 꼴이었다. 아니, 손님들이 북적대더라도 그럴 터. 그들은 본의 아니게 무슨 모의를 하는 외형을 띠었다. 정작 무슨 말을 주고 받는 것도 아니면서. 크게 보면 그땐, 우리 모두 그랬다. 물론 주정의 폭력 때문이 아니라... 얼음을 재어 놓은 진열창 꼼장어, 닭똥집, 꽁치, 피조개 등이 모두 기분 나쁜 붉은 빛, 아니 피 묻은 빛을 발했다. 손님1이 다시 목젖을 한껏 불거내며 말했다. 그래 씨팔, 막걸리 반공법이다 이거여?... 어허, 이 사람 취했네... 손님2가 말렸지만, 건성이고, 상대는 더 기고만장해졌다. 손님2는 연신 주인여자 눈치를 살피고 화자 일행 쪽으로도 시선을 주면서 미안하다는 시늉을 보이지만, 역시 건성이고, 그를 데리고 나갈 생각은 없는 듯 했다. 그는, 누구나 그렇듯, 동료에 대해 믿음이 깊었다. 그리고 그의 상대는, 술꾼이 대개 그렇듯, 그 믿음을 배반하고 믿음이 깊은 자는 그럴수록 믿음에 집착하고, 그래서 술판은 개판으로 끝이 난다. 손님1이 다이를 주먹으로 쾅쾅 쳐대며 말했다. 니기미, 아, 술 한 잔 먹고 헷소리 해도 반공법 위반이란 말여? 딸꾹... 소줏병이 또 엎어지고 막걸리가 흘러 넘쳤다. 손님2가 후다닥 일어나 바지를 털며 잔망을 떨지만, 화자 일행은 굳어버린 듯 꼼짝도 안 했고, 그게 또 그들을 또 표나게 했다. 포장마차 아줌마는 보기보다 성질이 매우 무던한 편이었다. 그녀는 폭발직전을 참으로 오래 견뎠다. 그러나 그게 분위기를 더 조마조마하게 했다. 야아, 느그덜. 얌마, 짜샤들아... 손님1이 마침내, 아니 예상대로, 화자 일행을 겨냥하고 '예?'하고 선배가 고개를 돌리며 될 수 있는 대로 침착하게, 너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침착하게 되묻고 '어허, 이 사람 왜 그래?' 손님2가 짐짓, 다소 신경질적으로 말렸지만 손님1은 거들떠 듣지도 않고, 취기로 시선 초점을 형편없이 뭉게트리며 목청을 그렁댄 다음, 치올렸다. 끄윽, 좆도 씨팔, 개새끼! 대통령 욕 한 번 했다고, 뭣이여, 징역 12년?... 화자 일행 중 친구1이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으나 선배가 손짓으로 만류했다. 어허, 안되겠군. 어이, 이 사람, 나가세. 어서... 손님2가 손님1을 부축하여 일으키려 하고 선배는 다시 짐짓 여유를 찾느라 오징어를 한 접시 더 시켰고, 아줌마는 다시 한번 꾸욱 눌러 참으며 오징어를 뜨거운 물에 데쳤다. 다시 짧은, 그러나 깊이가 파란만장 침묵, 을 손님1이 깼는데, 화자 일행은 그게 차라리 나았다. 에이, 이거 놔!... 손님1이 손님2의 부축을 격하게 뿌리쳤고 그렇게 두 사람이 뒤엉켜 휘청거리자 포장마차가 기우뚱하고 소주병들이 또 몇 개, 이번에는 아예 널부러지고 화자 일행은 모두 질겁을 해서 일어나, 바지 위로 쏟아진 술을 털어냈는데, 벌써, 오줌 싼 것처럼 으시시, 떨리고 오금이 저렸다. 아, 죄송합니다. 이거... 손님2가 전혀 쓸모없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아줌마는 말없이 오징어를 쓸고, 있었는데 식칼, 그 식칼이 정말 디룩대며 살기를 품고, 그게, 그 흉기가 된 생계의 도구가, 더 무서웠다. 일어나지, 우리도... 선배가 짐짓 체념 투로 그랬다. 예. 그러죠... 일행이 한꺼번에, 무언가를 박차고 일어나고, 아줌마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 괜찮아. 앉아 있어요... 그 말은 매우 침착하고 또 자연스럽게 친절해서 셋은 모종의 무게에 눌린 듯 다시 앉았다. 우린 정말 엉거주춤 인생이야... 그런 생각이 들만 했다. 그리고, 아줌마가 손님1, 2를 향해 돌변했는데, 그게 또 놀랍지 않았다. 아니, 이 양반들 왜 이래. 좋은 술 먹고 어디서 행패야... 침착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소름끼칠 정도로 감정이 없고 표독스러운, 그리고 자연스러운 말투였다. 손님2가 두말 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아, 죄송합니다. 자 자, 나가자니까, 어서!... 손님1이 잠시 무너진 자세더니, 그런 채로 내뱉았다. 좋은 술? 어 씨벌년. 이게 좋은술야? 끄윽.. 어허, 이 사람 참... 그래, 너 잘났다. 씨벌년. 끄윽. 좋긴, 좆이 좋냐? 끄윽... 선배가 다시 일어서려 했다. 친구1, 화자도 아주 재빠르게 따라 일어섰다. 그러나 아줌마가 다시 그들을 손으로 제지하는, 동시에, 손님1을 제압한다. 이번에도, 그 양면성이 너무 자연스럽게. 근데 이 자식이 손님 다 쫓고 있네?... 선배가 '아, 아녜요. 많이 먹었어요.' 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손님1이 거꾸러진 채 '어, 씨벌년.' 했지만 한 풀 꺽인게 완연했고, '아니래잖아, 끅. 어, 학생들인가?' 그렇게, 다소 교활하게, 화제를 딴데로 돌렸고, 화자와 친구1이 어색하게 그렇다고 얼버무리듯 대꾸했고, 선배는 대꾸없이 단호하게 나갈 태세였고 아줌마가, 정곡을 찌르듯 손님2를 겨냥하며, 냅다 질러댔다.
--·이거 정말 못 데리고 나가? 경찰을 불러야 알겠어?...
--니미, 씨벌년...
.손님1이 다시 그랬지만, 형편없는 반복인 건 그렇다 치고, 몸을 심하게 고꾸라트렸다. 선배와 화자, 친구1은 '경찰'이란 말에 화들짝 놀라 발을 떼지 못하고, 어느새 부드러워진 말투로 아줌마가 말했다.자 자, 앉으라니까... 한참을 더 머뭇거리다가 선배가 앉았고 나머지도 앉았다. 어여 데리고 나가, 어여... 아줌마가 크게 인심이나 쓰는 듯한 말투로 손님2에게 말하니 손님2는 감지덕지하며 손님1을 잡아끌었고 손님1도 순순히 일어났다. 그리고, '학생놈들이, 공부는 안하고... 나라 꼴이 이 지경인데 너거들은 시방 뭘 하고 있다냐?' 그렇게 횡설수설하면서 손님2에게 못 이기는 체 끌려 나가더니 포장마차 밖으로 다 나가서 다시 기세를 돋구어 한 마디 더했다. 어, 좆겉은 세상. 이게 감옥이지, 뭐가 감옥이냐, 야아, 너 누구야!... 그가 버팀대를 차는지 포장마차가 심하게 출렁댔지만 아줌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줌마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그걸로 끝이었다. 손님들의 말소리가 금새 멀어져 갔다. 어, 취했어, 나도... 그러게 임마, 나 술 처먹이지 말라고 했잖아, 끄윽. 어, 씨팔... 배냇빙신 같은게... 저런 게 집에 가면 마누라가 쥐패고 그런다구. 자, 자, 이제 괜찮아. 안주는 뭘로 하지?... 아줌마 음성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화자 일행은, 더 어색하다. 그런 채로 포장마차 광경이 흑백 사진화한다, 마치 그것이 자연스러워지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듯이. 사진이 변하면서, 흐드러지게 취한 재단사들, 여공들, 그 중에 숟갈을 입에 대고 있는 전태일, 기분좋게 술잔을 높이 쳐든 그의 친구 1, 2, 그리고 조금은 위축되어있는 친구 3. 다방 레지의 얼굴도 보인다. 최희준 노래 <하숙생> 아주 느리게 깔리고 카메라가 각각의 얼굴들을 느리게 스쳐지나가는 동안 음성이 들린다. 너는?... 침묵. 관둬 너 없으면 못할 것 같냐?... 그렇게 윽박지를 것이 아니라... 왜. 너도 못하겠냐? 니기미, 다 집어쳐! 나 혼자 할 거야... 해야 돼. 이건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냐... 우린 모두 마찬가지 처지야... 너무 빠른 것 아닐까? 우린 힘이 없잖아? 아직 어리고... 어리다니? 무슨 소리야 우린 스무살이야. 그리고, 정말로 어린 여공 동생들을 저렇게 놔두었다가는... 결핵 3기라구... 그대로 인생 끝장나는 거야. 더 이상 시간이... 지금, 꼭 해야 할 때야... 하겠어... 그래. 그래야지... 야호! 야, 전태일! 넌, 역시 지도자야. 자질이 있다구!... 호호, 그렇네요, 정말. 멋진 오빠야... 자, 박수. 여러분, 박수!... 자, 자. 전태일. 맨발의 청춘, 맨발의 청춘!... <하숙생> 커지고, 갑자기 중단되며, 암흑. 암흑이 말했다.
--이 친구 정말 삼각산에서 노동운동 연구했나 보네?
암흑 새겨지면, 스산하고 살벌한 밤거리, 시내 찻길대로였다. 선배는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그 다음은 친구1과 친구2가 함께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홀로 남은 화자에게 육중하게, 덜컹덜컹대며 버스가 왔다. 오라이!... 하염없이, 제 무게와 속도에 밀려, 그것 말고는 정말 정처 없이 가는 버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네온싸인 창궐한 풍경들. 그 위로 겹쳐지는 체포 장면. 묵음이다. 미아리 버스 정류장 근처 빵집에서 전화를 거는, '민청학련 배후조정자' 유인태. 그 손을 나꿔채는 수갑... 건장한 사내. 너, 유인태지... 줄어들면, 파출소 안. 겉늙은 얼굴의, 고등학생 차림. 순경이 모자를 벗기자 이마에 드러나는 흉터. 소스라치게 놀라는 순경. 너, 너 이철이지... 튀려는 이철을 꽉 붙잡고 , '이철, 이철이다!'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스스로 멈칫멈칫 놀라는 순경. 다시, 버스 달리는 소리, 자동차 빵빵 소리다. 거리에 꽉 찬 소음이 무겁고 차갑다. 차창 밖에 주위보다 좀 어두운 불 꺼진 건물이 보이고... 지나갈 듯 하다가 클로즈업하면, 동아일보 사옥. 그 위로, 1970. 10. 7일자 경향신문 사회면이, 겹쳤다.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 '소녀 등 2만여명 혹사', '거의 직업병... 노동청 뒤늦게 고발키로', '근로조건 영점... 평화시장 피복 공장' 등 잇달은 미다시가 보이다가, 신문이 줄어들면, 태일이 그 신문을 사들고 미친 듯이 평화시장으로 내달리고 있다. 행인들은 의아한 표정이고 삼동회원들이 태일을 얼싸안고, 암흑. 시계 초침 소리. 전면의 시계, 줄어들면, 삼동회원들 그것을 풀어 경향신문을 뭉치로 사고 있다. '평화시장 기사특보'라고 쓴 모조지 띠를 어깨에 두르고 이 건물 저 건물을 누비고 다니며 신문을 나눠주는 삼동회원들. 다시 포장마차다. 이번에는 사진이 아니다. 삼동회원들이 술을 마시며 유쾌하게 웃고 떠들고 그런다. 그러다가, 암흑. 전태일 음성 들린다.
--친구여, 나를 아는 모든 이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화면이 거꾸로 돌아가고 그러는 동안, 화자의 음성 들린다.
--언론이 없었다면 그가 죽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땐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그에게 그토록 짙게 배어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나는 좀체 볼 수가 없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그때 우린 죽음과 공포에 익숙해져 있었다. 언제든 죽을 것 같은, 그리고 늘 죽고 싶은 공포에 시달렸고, 그게 아뭏지도 않았다. 역사, 그것은 죽음이었고, 죽음이라는 태풍의 눈 속에 우리는 있었다. 그래. 그래서 그랬을까? 그땐, 죽음인 그가 생각나지 않았다. 정말 이상하게도 그는, 악착같은 삶이었다.
남자의 방이다. 낡은 장롱 하나. 방에 들여 놓은 냄비며 조촐한 식사도구들. 휴대용 가스렌지와 녹슨 석유곤로. 작은 평상 하나. 그 위에 전태일 자료 및 원고가 놓여있고 남자는 이불을 덥고 누워 있었다. 여자가 물 묻은 얼굴로 주인집 쪽 쪽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공 작업복 차림이다. 그녀는 냄비에 쌀을 안치고 전태일 자료들을 이리저리 뒤적였다. 이따금씩 입덧으로 밥 짓는 내에 진저리를 치면서. 몰래 훔쳐보는 듯 하지는 않았지만 잠든 남자의 얼굴을 이따금씩 확인해보기는 했다. 남자가 코를 벌름대더니 부시시 잠이 깼다. 그도, 여자가 이것저젓 뒤적이는 것을 그냥 바라보았다. 여자가 그런 그의 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응, 깼네? 일어나요. 밥 먹어야지.
남자가 끙하고 상체를 일으키더니 머리를 이리저리 뒤흔들었다... 그녀가 자료를 제자리에 놓다가, 좀 머뭇대다가, 자신감이 좀 지나치다 싶게 그에게 물었다.
--이거 그 전태일 이 쓴 거죠? 나도신문에서 봤는데....
--골치아픈 얘기지, 뭐.
--어머머, 나한테보다 더 지성이면서? 그래. 철자법은 엉망이지만, 이 사람 공부는 꽤 했나봐요?
--....
남자의 침묵이 그녀를 좀 캥기게 했다.
--우리공장 애들은 이런 거 관심없어. 아니, 세수하고 오세요. 밥 다 됐으니까.
--그래. 그럴께.
남자가 여자를 능숙하게, 와락 끌어안았다. 여자가 키들대며 남자 품에 달겨들었다. 둘은 그렇게 한참을 엎치락 뒤치락댔다. 그렇지만, 여자는 바랬지만, 남자는 그렇게 그녀를 얼싸안고 하체를 부벼댈 뿐 여자의 옷을 벗겨내리지는 않았다. 여자가 이중으로 머쓱해졌다... 둘은 그렇게 어설프게 서로에게서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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