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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여자, 그리고 영화 -<9場>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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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여자, 그리고 영화 -<9場> 만남

<김정환의 '읽는 영화' - 임옥상 그림> 전태일에 대한 명상

--그 후 태삼이를 우연히 만났다더라... 깡통을 차고... 킁, 하기사, 거지나, 구두닦이나... 킁. 그 뒤에 아버지도 만났고...
남대문 시장 과일점 앞에서 태일이 구두를 닦고 있다. 구두통 위에 백구두. 칼로 벤 듯 양복 바지 주름을 잡은 사내가 휘파람을 부는 둥 마는 둥, 껌을 질겅질겅 씹는 둥 마는 둥, 이따금씩 어깨까지 우쭐해가며 발을 올려놓고 있다. 태일이 잠시 멍한 눈으로 앞을 쳐다보자 단박 호통이 떨어진다. 야 임마, 구두 안 닦고 뭐하니?.... 태일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부지런히 손을 놀리다가,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서 다시 앞을 본다. 아니, 이 자식이 근데... 그랬지만 이번에는 백구두도 태일의 시선방향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태일의 눈이 커진다.
--어, 형!
동생 태삼이다. 깡통을 찼고 양옆에 깡통 찬 거지가 또 한 명씩 붙었다. 태삼이 달려오고, 태일이 구두통을 내팽개치고 그쪽을 향해 내닫는다. 어이쿠 하마터면 엎어질 뻔 했던 백구두는, '야, 야. 이 새끼 너, 이리 안 와?' 그랬으나 옷매무새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나서는, 저도 신기한 듯 두 형제를 쳐다보고, 태일과 태삼이 서로를 부여잡고 엉엉 대성통곡했다. 아주 표 나지는 않는 통곡이다. 워낙 시끄럽고 번잡한 시장통이 그냥 워낙 시끄럽고 번잡해서, 그 통곡을 그냥 숙명처럼, 당연한 엄혹처럼 거느릴 뿐이다. 백구두가 소리친다. 야, 그만하고 빨리 구두닦어... 장면 풀어지면 다시 선명해지는 태일의 발걸음. 그것이 다시 희미해지면, 나란히 구두통을 매고 서울 거리를 헤매는 태일과 태삼. 그들은 남산동 50번지 무허가 하숙집에, 살았다. 태일은 숲이 울창한 남산 중턱에서 맨 아래까지 내려가 물을 긷고 지게를 져 다시 중턱으로 날라 온다. 양쪽의 물통 두개가 제멋대로 움직이며 쇠꼬챙이 같은 그를 마구 휘청거리게 한다. 물이 많이 엎질러진다. 하숙집 주인은 태삼에게 온갖 잡심부름을 시키고 그를 이유도 없이 패대고 그런다. 그 장면 흩어지면 다시 태일의 발걸음. 그것이 다시 흩어지고, 누추하게 내려앉은 동대문 옆 벼락부자처럼 번드레하고 조야한 천일백화점 건물. 그 귀퉁이에 붙은 한식 기와집. 요릿집 도원이다. 대문이 열리면 마당과 손님방. 그 왼쪽으로 주방 가는 길. 주방문이 열리고 국과 반찬을 그릇에 담아 한정식 상을 차리는 여자 종업원 그 옆 귀퉁이 쪽에 김치를 담그는 아줌마들 그 중 한 사람의 등. 몸을 돌리면, 어머니... 어머니의 얼굴이 의아한 표정에서 그냥 멍멍한, 경악의 표정으로 바뀌고, 굳어지고, 입을 벌린 채 아무 말 못하고 그냥 힘없이 눈물을 주룩 쏟는다. 눈물이 제풀에 지쳐 제혼자 나오는 것처럼.
--엄니, 제예요.
--그래, 태일아.
새빨간 김치 국물. 그것이 줄어들면, 허름한 수세식 변기 위에 대량 하혈. 음식점 변소에서 기절한 어머니. 어머니 바지에 엉겨 붙은 피. 흩어지고. 그러는 동안, '휴, 불결해. 아줌마 당장 우리 집 그만 둬.' 시발택시 안이다. 기절한 어머니를 태우고 운전수를 재촉하는 태일.
--이저씨, 빨리요. 우리 엄마 살려주세요, 아저씨.
밀가루 수제비국. 줄어들면, 중부시장 1평짜리 간이식당. 수제비를 먹고 있는 순옥이와 아버지. 태일이 들어선다. 좀 머쓱한 표정이다. 흩어지고, 다시 태일의 발걸음. 천호동 보육원 건물로 이어지는 길이다. 화자의 음성.
--가출은 그들의 탈출구였다. 더 큰 탈출구는 죽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가난은, 나의 탈출구였다. 나는 그의, 전태일의, 죽음이 아니라 가난을, 마지막 지푸라기처럼 필사적으로 붙들고 늘어졌다...
남산동 50번지 셋집. 방안. 순덕이를 데려온 다음 날 새벽이다. 아버지가 출근 채비를 하고 있다. 어머니는 방을 들락거리며 이것저것 부산하다. 둘 사이가 아직 서먹하다. 태일은 방금 일어났고 태삼과 순옥은 자고 있다. 순덕이 세수를 하고 들어와 거울 앞에서 머리를 열심히 빗는다. 그리고 말없이 앉아 부동자세를 취한다. 어머니가, 그냥 지나치려다, 다시 뒤돌아본다.
--순덕아. 와 그라고 앉아 있노?
순덕은 대답이 없고, 태일이 부시시하다가 잠이 화들짝 깨서 순덕이 쪽을 쳐다보고 아버지가 다소기를 펴면서, 조금 신경질적으로 '순덕아. 야, 순덕아.' 했으나 순덕은 여전히 말이 없고 아버지가 다시 보다 가정적으로, 그러나 벌써, 이미 저질러진 사태를 반쯤 짐작하고 반쯤 내팽개치듯 '이놈 보소? 너, 와 그라고 앉아 있어?' 그랬고, 태삼과 순옥이 뭔일인가, 멀뚱멀뚱 잠이 깨고, 태일은 순덕에게 달려가 벌써, 절망적으로, 그렇게 애원하지만 또 조금은 윽박지르는 꼴로 말한다.
--와 그라노, 순덕아.
순덕은 앉은 채로 몸을 움찔하더니, 자세를 더욱 꼿꼿이 하고 태삼과 순옥도 정신이 퍼뜩 들어 일어나고 순덕이 입을 삐죽 오무렸다가 야무지게, 흡사 자기만 아는 것을 가르쳐준다는 듯, 말했다.
--이렇게 하고 있지 않으면 선생님께 야단맞는다.
--그, 그래. 괘않다. 이젠 괘않다.
태일이 순덕에게 무너지며 울먹이고 어머니가 가슴을 치며 땅바닥에 주질러 앉고 아버지는 괜히 화를 주체 못하고 나가 버린다.
--이젠 괘않아. 이젠.
--아이다. 이렇게 하고 있지 않으면 선생님께 야단맞는다...
암흑. 새겨지면 어두운 방. 애인과 누워있는 화자. 서로 등을 맞댄 자세, 였다. 여자가 말했다.
--쥐꼬리 월급이지만 그래도 입에 풀칠은 했는데...
왜 저렇게, 삽시간에, 누추해졌지? 얼굴이 상하고 몸이 축 늘어진 게. 애인이 더 그랬다. 남자는? 될 대로 되라, 까지는 아니지만, 좀 능글맞아 졌다.
--어떻게 되겠지ㅡ뭐. 언젠 안 힘들었나?
--애가 생기면...
짧은, 그러나 깊고 깊은 침묵이 둘 사이를 흐르고, 둘을 가르는 듯 함몰시키는 듯 애매했다. 그리고, 남자는 체념 투로 말했다.
--알았어. 아버지를 뵈울께.
여자가 화들짝 놀랐다. 남자는, 분명 그 놀람을 눈치챘지만, 몸을 돌려 그 오들오들 떠는 여자를 안아주지, 않았다.
--뭐 어차피 한번은 치러야 하잖아?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요... 여자 입에서 그 말이 맴돌다가 사라졌다.
--하, 어쩌다 이렇게 됐지? 당신 정말 저 사랑하죠?
--왜 또 그래?
'또'라는 말이 여자의 가슴을 예리하게 긋고 지나갔다.
-- 괜히 책임감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죠?
끙, 하고 남자가 여자 쪽으로 몸을 돌렸, 리려했지만, 그녀가 먼저 몸을 돌리며 손으로 화자 입을 막았다.
--아니, 아무 말 마세요. 제가 사랑하니까... 됐어요.
--사랑해.
사내가 여자를 껴안았다. 너무 무덤덤했다. 여자가 적극적으로 그를 안았다. 사내가 달아오르지 않았다. 애가 생길까봐 그러는 거야... 복잡하고 무거운 생각이 그녀 뒤통수를 쳤고 그걸 떨쳐내느라 그녀가 더 격렬하게 몸을 움직였다. 그는 감내하는 자세를 끝까지 유지했다. 암흑. 음성. 사과궤짝 속이라 춥진 않다, 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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