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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여자, 그리고 영화 -<8場> 家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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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여자, 그리고 영화 -<8場> 家出

<김정환의 '읽는 영화' - 임옥상 그림> 전태일에 대한 명상

눈 덮여 새하얀, 그리고 머나먼 들판길. 보퉁이를 이고 떠나는 어머니.
--서울 가 식모살이 돈이라도 부쳐야 애들이 살지. 배고파하는 건 차마 못 보겄드라. 근데...
어두워진 들판, 그 위에 대보름달. 그것이 오곡밥으로 변하고, 작아지면. 태일의 작은 아버지 집. 태일과 동생들이 허겁지겁 오곡밥을 먹고 있다. 호화롭지는 않지만 꽤 실한 가재도구들이 들어섰고, 작은 아버지 손목에 시계를 차고 있다. 태일 그것을 눈 여겨 본다. 그의 눈이, 빛났다. 덜컹, 가슴이 내려앉는 듯한 기차 화통소리. 손목시계를 훔치는 태일의 손. 그것을 팔고 손에 꼬깃꼬깃 쥔 지전 6백원. 기 차 안내 방송 소리. 서울. 서울입니다. 내리실 때 잊으신 물건 없이... 서울역. 밤 깊은 서울역이다. 역구내에 누워 자는 누더기 차림의 거지들이 매우 희미하고 음산하고 황량하다. 역 바깥으로 나서면 뺨을 때리는 눈보라. 광장에 태일이 순덕을 업고 섰다. 더럽고 누추하게, 거리를 덮는 함박눈. 허름한 포장마차 몇 개에서 우동 국물 김이 모락모락 가난하게 피어오르고 그 밖에는 인적이 없었다. 3층 4층의 낡고 키 작은 건물들이 눈을 온통 뒤집어쓰고 우중충했다. 박동소리, 심장박동소리 들리기 시작한다. 헉, 헉, 소리도 들리기 시작한다. 서울역. 인적 없고 밤 깊은 서울역 앞에 선 두 남매. 하늘에, 그칠 사이 없이 내리는 눈. 더러운 외투처럼 눈을 뒤집어 쓴 건물. 기차 화통 소리. 커졌다가 잦아들고 점점 커지는 심장박동 소리. 마구 뛰어가는 태일. 학생복 차림이다. 그 위로, 음식점을 돌아다니며 어머니를 수소문 하는 태일. 목소리. 태일 등에 업혀 기침을 콜록대는 순덕.
--아줌마, 말 좀 묻겠읍니다. 요 이삼일 전에 대구에서...
--그런 사람 없는데, 딴 데 가서 알아 봐.
기침 콜록 소리를 닮았지만, 그보다는 순진무구한 생명을 더 닮은 목소리로 순덕이 말한다.
--오빠, 머리가 아파. 어디 가서 좀 자자. 자부라바 죽겠다.
남대문 과일 도매상 옆이다. 태일과 순덕이 땅콩 굽는 화로에 몸을 쬐며 밤을 새다가 새벽이 밝아 오면서 시장 경비원에게 쫓겨나고, 화초 도매상 옆. 장사꾼들을 상대로 팥죽을 파는 포장마차 앞. 사람들이 녹슨 드럼통 속에 화톳불을 피우고 몸을 녹이는데 순덕은 연신 팥죽 먹는 모습을 보고 침을 흘리고 팥죽 장사가 계속 눈치를 주다가 순덕이 '오빠, 저 죽 좀 사줘, 응, 오빠.' 하고 떼를 쓰자 '아, 빨리 얘 데리고 못 꺼져? 니들 땜에 장사가 안 되잖아!' 고함을 지르면, 놀란 순덕의 얼굴, 정지. 클로즈업 되면서 흩어지고, 다시 커지는, 오랫동안, 점점 더 커지는 심장 박동 소리. 누군가 뛰어가고 있다. 절망적으로, 무너지듯이, 그러나 마지막 단 한 가지를 애원하듯이. 태일의 음성...
--제발, 헉, 기다려, 헉헉, 제발. 헉...
순덕의 얼굴 흩어지면, 무허가 하숙집이다. 신문팔이들이 홑옷차림으로 뒤엉겨 칼잠을 자고 있다. 그 한 구석을 겨우 비집고 들어앉아 순덕을 눕히고 거적대기를 덮어주는 태일. 그것에 겹치는, 미도파 일대에서 혼자 신문을 돌리는 태일.
--신문이요, 아저씨, 신문 좀 사 주세요.
그것에 겹치는, 신문을 몇 장 못 팔고 호되게 야단을 맞는 태일. 급기야 무허가 하숙집에서 쫓겨나는 태일. 그가 잡은 순덕의, 얼어서 새빨개진 고사리손.
--오빠 . 잠 좀 자자.
기침을 콜록대는, 태일 등에 업힌 순덕. 약국 앞이다. 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다. 약국으로 들어간다. 약국 유리문으로 뭐라 사정하는 태일. 매몰차게 거절하는 여자 약사. 그러는 동안,
--제발, 제발. 기다려, 헉헉.
그칠 사이 없이 내리는 눈. 점점 커지는 심장박동 소리... 불광동 미아보호소를 찾은 태일. 등에 업힌, 기진맥진한, 불덩이처럼 뜨거운 순덕의 얼굴. 순덕을 받기를 거절하는 여자 사무원. 눈보라. 굵은 눈물이 흐르는 태일의 뺨... 마구 뛰는 발자욱. 흩날리는 눈보라. 광화문에서 서대문 쪽으로 마구 뛰어가는 태일.
--제발 순덕아, 헉, 기다려, 기다려 줘.
그 위로 겹치는, 체육대회 날 연탄까스를 마신 채 마라톤을 하는 어린 태일의 모습. 팔다리는 가도 가도 끝없는 길을 가는 듯. 하지만 표정은 제발, 제발 늦지 않았으면 하는 내색이 너무도 절박했다.
--오빠, 자부라바 죽겠다.
땡전 한 푼 없는 그의 빈 손. 순덕을 업고 하염없이 걷는 태일. 서대문 병원 앞에 순덕을 내려놓고 뭐라 이야기하는 태일... 순덕의, 음성.
--오빠. 오빠...
좀 이상하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순덕. 천천히 그녀로부터 멀어지는 태일. 뒤돌아보고 손짓하는 태일. 그것에 어긋난 방향으로 겹치는, 뛰고 있는 태일. 뛰고 있다. 끝없이 뛰고 있다.
--헉, 제발. 헉, 헉, 제발. 헉, 순덕아. 제발. 헉, 헉, 네가, 헉, 헉, 허억, 없으면, 헉, 난, 죽어, 헉, 버릴 거야, 헉헉.
심장박동 소리. 도시 전체에 앞이 전혀 안 보이는 눈보라... 그것을 뚫고 나오는 태일의, 코가 크게 벌어진 검정고무신. 혼신으로 뛰는 태일. 다시 전혀 보이지 않는 눈 앞. 눈을 때리는 눈덩이. 눈 앞에 희미한 광경... 정동 MBC 앞 고개를 넘는 태일. 저 아래, 둘러선 사람들. 달려가는 태일. 헉, 헉, 순덕아 제발·. 카메라도 그렇게 애원하듯 뒤를 따르면,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서는 태일. 그 사이에 엉엉 울고 있는 순덕. 순덕을 와락 껴안는 태일. 엉엉 울며 안 기는 순덕.
--오빠, 어디 갔었어?
--그래, 엉엉, 순덕아, 오빠가 잘못했어.
이상한 눈초리의 사람들. 그것을 뚫고 나오는 태일. 그녀를 안고 울면서 달래면서 마구 달리는 태일
--오빠, 추워, 잉잉.
--그래, 그래. 이젠 괜찮아. 오빠가 너를 지켜줄께. 그래. 그래, 착하지... 잉잉.
그러나 그는 결국 순덕과 다시 헤어져야 했다. 그는 순덕을 데리고 시청 사회과 분실로 찾아 갔는데 그때 시청의 인상은, 결과적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후에도 시청에다 진정서를 냈던 것일까?
--여기서는 어쩔 수 없으니까. 분실로 가봐. 아스토리아 호텔 알지? 거기 가봐라. 여기서 보냈다고 사정해 봐.
사회과 안은 사무적이고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순덕은 등에 업힌 채 허기가 져 자다 깨다 했다. 그는 인사를 꾸벅 하고 터덜터덜 걸어나왔다. 시청에서 아스토리아 호텔까지는 멀지 않았다. 그리고 그를 감싸듯 적당하게 지저분하고 적당하게 구두닦이며 신문팔이들이 많앗다. 그러나. 그는 2중으로 아득했다. 헤어진다면 어쩔 것인가. 그렇다고 헤어지지 않는다면 또 어쩔 것인가? 등에 업힌 순덕이 그렇게 무거울 수 없었고 동시에 그 촉감이 그렇게 간절할 수 없었다. 호텔 옆 후미진 골목 쪽으로 붙은 사회과 분실은 냄새가 지독했지만, 그래서 더 편했다. 담당직원은 깡마르고 광대뼈가 억센, 나이든 여자였는데, 의외로 친절했다. 그래? 하루라도 빨리 오지...
--예?
그가, 가슴이 철렁했고 그녀가, 이번에는 미소까지 지으며 말했다. 그랬더라면 고생을 덜했을 꺼 아니니...
--그럼?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선심을 쓰듯 득의에 가득 차 말했다. 오후 4시에 미아보호소로 가는 차가 있으니까, 그때 다시 와·..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고개가 자꾸 쇳덩이처럼 그의 가슴을 쳤다. 그는 시장통으로 들어가 옷가게에서 자기 옷을 벗어 팔았다. 가게주인은 안 사겠다고 쳐다보지도 않다가 그가 너무도 간 절하게 애원하자 돈 30원을 주고 옷을 받았다. 딱 백반 1인분 값이었다.
--정말?
밥을 먹으면서도 순덕이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다가 이따금씩 반색을 하며 눈을 반짝였고 그때마다 그는 그럼, 하면서도 그녀의 시선을 애써 피했다. 눈물은, 없었다. 눈물을 흘려서도 안 되었지만 . 애당초 남은 눈물이 없었다. 서러운 표정도 없었다. 다만 메마른 채로 찢어진 가슴이 그의 얼굴에 보였다.
--엄마가 보고 싶다.
배를 채운 순덕이 여느 아이처럼 매우 천진난만하게, 또 명랑하게 말했다. 둘 사이에 존재하는, 아니 가로 놓인 현실과 너무도 무관한 그녀의 말투가 다시 면돗날처럼 그의 가슴을 그었다... 시청차는 너무도 오래 걸려 왔지만, 낭떠러지로 등장한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순덕의 손을 움켜쥐었다.
--아, 아파.
그녀가 그렇게 얼굴을 찡그릴 정도로 강하게. 그리고 곧장 시청차가 검은 아가리를 벌렸고. 그가 그 속으로 추락했다... 암흑 속으로. 아, 아파.. .여기는 어디일까? 몹시 덜컹거렸다... 아, 이렇게 덜컹대다가 산산조각 나서, 어둠의 한 조각으로 파탄 났으면... 누구? 화자? 나? 아니면 그? 암흑. 그것에 새겨지는, 희미한 얼굴들. 덜컹거린다. 시청차 안 컴컴하다. 다른 거지 두 명과 함께 시청차에 탄 태일과 순덕. 태일이 순덕의 손을 잡으며 말한다.
--응? 알았지. 거기 가면 밥도 주고 잠도 따뜻한 곳에서 잔단 말야. 오빤 엄마를 더 찾아보고 갈께, 응?
순덕이 고개를 끄덕이며 응, 한다. 태일이 고개를 돌리고 순덕은 두 거지를 쳐다본다. 좆 까네... 거지 1이다. 살벌하거나 공격적인 건 아니고, 뭔가 스스로 포기하는, 자기비하까지 스며든 음성으로. 순덕은 그 말뜻을 이해 못하고 그냥 긴가 민가 바라본다. 거지를 노려보는 태일이 얼굴 표정이 소름끼칠 정도로 무섭다. 나이가 태일보다 위인 듯한 거지 2는 귀찮은 내색으로 고개를 무릎에 파묻고 거지 1이 태일의 쏘는 듯한 눈빛을 어떻게든 받아치려다가 기세에 눌려, 칫, 하고는 시선을 피한다. 태일의 표정이 곧 누그러진다... 순덕이 무슨 낌새를 치고 불안해하며 태일 품에 안겨 안 떨어지려 한다... 태일이 애원조로 말한다.
--잘 부탁해. 내 동생이야. 정말 찾으러 올 거야, 응? 잘 부탁해.
거지1이 시답잖다는 투와 잘 보이라는 투가 반반씩 섞인 내색으로 몸을 웅뚱그려 차 한 구석에 처박힌다.
--이봐, 정말, 응?
--...
--내 동생 잘못되면, 니들 죽일 거야, 응? 알았어?
--웃기네. 동생 갖다 버리는 주제에...
의외로, 거지 2다. 그 말에 순덕보다 태일이 더 화들짝 놀란다.
--아니, 아냐. 정말 아냐!
태일의 어투가 그렇게 절박해지자 순덕이 다시 울먹이려 한다. 야야, 좀 봐주라, 불쌍하잖니... 거지 1이다. 태일이 무턱대고 고개를 마구 끄덕인다.
--그래. 봐주라, 제발 잘 좀 뵈줘, 응? 순덕아.
--응?
--이 오빠들 말 잘 들어야 해, 알았지?
--응, 알았어.
거참, 오늘 기분 좆겄네, 킁... 거지 1이다. 그가 코를 푼다. 거지 2도 끙, 하며 몸 뉘인 방향을 돌린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그런 태일의 심정을 깨며 덜컹, 차가 멈추고 어둠이 직사각형으로 열린다. 모든 것이 확연해진다. 새까만 얼굴에 눈동자가 굶주림 등등한 누덕 차림의 거지1, 2. 런닝 차림인 태일의, 눈물 범벅인 얼굴. 깡말랐지만 초롱초롱한 표정의 순덕... 태일이 급히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서둘러 내리고 그 뒤로 다시 문이 철컹 닫히고 차가 떠난다. 시청 앞이다. 그의 등이 솟고 그 앞으로 떠나는 버스의 꼬리가 길게 늘어진다. 카메라가 그것을 쫓아가면 쇠창살에 순덕의 얼굴. 순진무구해서 더 가슴 아픈. 그런 채로 정지.
--잘 봐주세요, 제발.
태일의 음성이다. 그가 걸어가고 있다. 판잣집 몇 채 드문드문 백인 좁은 비포장도로를 지나 논밭이 나오고 산 속으로 조금 들어서면서 천호동 보육원 안내표지가 앙상한 나무에 못 박혀 있다. 무척 녹 슬은 못 대가리. 그 주위로 붉은 쇠 녹이 번져 있다. 태일은 발걸음이 빠르지만 경쾌하지는 않다. 그 위로 겹치는, 신문을 파는 태일. 신문 판돈으로 과자를 사는 태일. 보육원을 들어서면 기인 복도가 나온다. 그리고 방문이 열린다. 여러 아이가 들어있지만 모두 생기가 없고 멍한 표정이다... 그 중에 보이는 순덕의 얼굴. 순덕이 좋겠네. 오빠 왔어요... 태일을 데려간 보모가 매우 상냥하게 말한다. 그러나 오빠를 보고도 그녀는 훌쩍훌쩍 울기만 할 뿐 말을 하지 않는다. 보모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그녀는 태일의 존재를 아예 무시하는 투다. 과자 받아야지, 오빠가 사왔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외양만 친절하고 속은 위압적이다. 움찔한 순덕이 과자를 받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리고 과자를 바닥에 놓고는 그냥 멀뚱멀뚱 바라볼 뿐이다.
--잘 있거라, 순덕아이.
태일이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냥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며 돌아 나온다. 순덕은 여전히 멀뚱멀뚱할 뿐 따라 나오지도 않는다.
--우리 순덕이 좀 잘 봐주세요, 제발.
염려 말아요. 걔는 좀 내성적이라서... 보모가 존대 반 반말 반으로 말을 끊는다. 고개를 푹 숙이는 태일. 그 앞에 되돌아가야 할 먼 길. 그 위를 타박타박 걷는 태일의 발걸음. 어머니가 말한다. 음성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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