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 얼굴 흩어지면서 흐린 전태일 상. 그 상이 흑백의 어머니 상으로 바뀌고, 흑백이 총천연색으로 물들면서 10년 정도 늙는다. 허름한 여관의 조금 넓은 방. 선배와 화자, 그리고 어머니가 앉은뱅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선배는 표 나지 않고 매우 세련된 양복 차림에 넥타이는 매지 않은 반면 화자는 새로 산 듯한, 값싼 잠바에 청바지를 입었고 탁자 위에 필기도구와 메모지를 펼쳐놓았다. 어머니는 흰 저고리 검정 치마에 안경 쓴 동그란 얼굴. 곱상한 기는 남아있지만 무척 고집스러워졌고 그녀 앞에 재떨이와 청자 담배 한 갑이 뜯겨진 채 놓여 있었다. 어머니가 담배를 한 모금 빨다가, 연기에 '푸우, 크읍. 컥컥' 목이 메이고 가슴을 주먹으로 턱턱 두드리고 나서 말했다.
--후, 난 답답하면 한 대 태야 해...
--그럼요. 오죽 답답하시겠어요.
화자는 오로지 필기만 할 자세고, 선배가 매우 정중하게 분위기를 거들지만 어머니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어머니는 할 말이 너무 많은 듯, 누가 중간에 끼어드는 것을 매우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특히 태일이 얘기 하려면. 그 뭣이냐, 내가 담배를 배운 게...
다소 난데없이, 그러나 너무 끼어들지는 않고, 어떻게 보면 조마조마하게, 기차 화통소리다. 대구발 서울행 팻말. 출렁, 덜크덕거리며 출발하는 기차 바퀴 소리. 1964년 2월. 의자가 형편없이 고물인, 창이 틀니처럼 쉴 새 없이 덜그덕대는 기차 안이다. 좌석 한 귀퉁이에 가출보따리를 움켜쥔 어머니가, 보였다. 아직 앳된 기가 남아있지만, 고생으로 퉁퉁 부은 얼굴이었다. 유리창 밖으로 지나가는 대구역 구내 풍경. 그것이 아주 분명해지기 전에 희뿌옇게, 일제시절 그녀가 정신대로 끌려가던 그 일장기 휘날리는 역전 광경이 겹쳐지고, 기차는 일본의 강제 노역장 행렬로 도착한다.'나 하나 없어지면 형제분들이 도와주겠지 싶어서...' 그 소리와 함께 강제 노역장 행렬이 흩어지고 다시 그녀가 가출--상경하던 기차 안이다. 기차가 속도를 올리는 소리, 잦아들고, 음성이 계속되고, 장면이 계속된다.
--여름날 불에 달군 기왓장을 배에 대고 가슴을 쓸어내리긴 했어도 담배는 안 배웠는데...
찻간에 떨어진 담배꽁초. 그것을 밟는 구둣발... 거의 짓뭉개진 담배꽁초. 그것을 집은 손, 어머니의. 열차 화장실 내부. 심하게 덜컹거리는 열차 화장실 문, 안간힘을 쓰며 문을 열고 들어오는 어머니. 문을 걸어 잠그고 변기 위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빼꼼빠꼼 피우는 어머니. 쓰러지는 어머니. 암흑. 기차 덜컹대는 소리. 화면 선명해지면 피, 붉은. 변기에 흥건히 뿌려진. 피로 물든 어머니의 고쟁이... 화자 목소리.
--피? 아, 어머니의 피! 그는 정말 언제부터 죽음을 보았던 것일까?
먼데 산이 보이는 서울 변두리 길가다. 화자가 어머니와 걷고 있다. 행인들이 지나가고 화자는 어머니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흘끗흘끗 주위를 살폈다...
--내 말 듣는 거여?
--네? 네, 그럼요.
어머니는, 들리지 않지만 혀를 끌끌 차는, 우리 태일이 얘기를 써준다니 고맙지만, 배운 놈들은 역시 다 이해 못해, 뭐 그런 표정과 말투였다. 화자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런 그의 등을 어머니가 툭 쳤다.
--예?
어머니는 말을 하지 않고 그냥 고개 짓으로 전방을 가리켰다. 이런. 그 앞에 파출소가 있었다. 마치 산 속에 매복한 자세로. 움찔하는 그를 어머니가 다시 툭 쳤다.
--아뭏지도 않게.
그녀가 무척 음흉하게 속삭였다. 그래 아뭏지도 않게. 그런데, 그가 가는 게 아니라. 그 놈의 파출소가, 거대하고 온통 시커먼 흉물처럼 보이는 그 파출소가 왜 그리 성큼성큼 그를 향해 다가오는 거지? 그 괴물의 4각형 눈이 보이고 그 속에 그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수배자 전단이었다. 그 얼굴이 말을 걸 것 같아서, 그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얼굴을 들었다. 너무도 가깝게 그의 얼굴이 그를 스쳐갔다. 어머니가 팔짱을 끼었는데만, 그녀도 굳어 있었다. 파출소 안은 한산했다. 창 밖으로 내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둘은 서둘러 등을 행렬 속으로 숨겼다. 행렬 속에 둘의 등이, 굳은 것이 표가 났다. 어머니가 긴장을 풀로 팔짱을 풀었다.
-- 후, 지랄할 놈들. 내가 이게 무슨 팔잔지. 아니, 내 얘기가 아녀. 그 아이 진짜 고생 많이 했다.
어머니가 그렇게 말하는 동안 두 등을 섞인 행렬이 흑백으로, 변하면, 11년 전 대구 산동네 길이다. 그 위에 판잣집 하나, 있었다. 그 위로, 겹쳐, 청옥국민학교 운동장에 만국기가 흩날렸다.
--지 나이 열여섯에 중학교 1학년인데,
광포한 이 목소리는, 누구지? 태일 아버지다. 술 취하고 노기등등하고 울분에 가득 찬. 누구를 때리는 듯 군데군데 힘이 들어간. 그는 음성만 들리고, 그 음성이 장면과 더불어 계속 이어졌다. 고등공민학교 대항 체육대회, 배구경기 중이었다. 열렬한 양팀 응원. 청옥 고등공민학교 응원단 속에 눈에 뜨일 만치 예쁜 한 소녀. 그녀가 주시하는, 배구선수 중 한 명인 태일...
--어떻게 공부해서 공부로 성공한단 말야, 장관이나 국회의원,
공중으로 떠서 강 서브를 성공시키는 태일, 그리고 환호하는 그 예쁜 소녀, 맑은 가을하늘.
--공부 가지고 하는 줄 알아, 돈 갖고 하는 거야, 돈,
태일의 서브가 성공했고 게임 셋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 환호하는 응원석. 요란한 박수갈채 소리.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치는 그 소녀. 한없는 행복감에 젖어있는 태일. 박수 서서히 노기를 쌓아오던 아버지 음성이 그 환호 속에서 환호를 장막처럼 찢어버릴 듯 절규했다.
--이 병신 새끼야, 지랄용천하지 말고 썩, 못 나가!
흩날리는 만국기, 사라지고, 판잣집 내부. 아버지가 태일을 마구 발길질 하고, 있었다.
--아구, 여보, 제발, 아구구.
보다 못한 어머니가 뛰어들어 태일을 몸으로 감사고 대신 그 발길질을 당하며 그렇게 애원하고 , 태일은 반항심으로 이를 악물고 비명을 안 지르고, 남동생 태삼, 여동생 순옥, 순덕이 무서워 오들오들 떨다가 어머니 쪽으로 자지러졌다.
--스무살 서른 살이 넘어도 공부는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이 병신들아
아버지의 짓밟는 듯한 발길질이 멈추지는 않고 좀 느리게, 매우 규칙적으로 진행되는데, 그게 더 잔인했고, 어머니의 제발, 여보, 사정조는 갈수록 필사적으로 되고 동생들이 그제서야 훌쩍훌쩍 울기 시작하고 너무도 잦은 일이라 시늉 같은데 그게 더 참혹하고 그러다가, 제일 어린 순덕이는 눈치 없이, 너무 크게 울었다... 어머니의 몸은 이제 짓밟아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꼭 치러야할 마지막 고통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표정으로. 그냥 늘 치르는 일이라는 듯 고개까지 끄덕이며. 그리고 흡사 장단을 맞추듯, 아버지가 길길이 뛰기 시작했다.
--야, 이 쌍년아. 애새끼들 데리고 나가! 확, 불을 싸질러 몽땅 태워 죽여버릴라, 이 문둥이 같은 년. 니 안 벌면 내가 굶어죽을 것 같애? 뒈져라, 이년!
아버지는 오랜 습관을 깨듯 어머니를 크게, 겨냥하듯, 발로 내지르고 어머니는 격렬한 고통에 '아악, 아구구, 여보!' 그랬지만 침을 한번 꿀꺽 삼키더니 다시 습관을 고수하고, 아버지는 부엌살림을 다 깨부수고, 어머니는 꿈쩍하지 않고, 그런 어머니를 시체처럼 부여잡고 아이들이 징징, 칭얼대듯 울고, 아버지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들판이다. 차가운 진눈깨비 내린다. 화자에게 구술하는 어머니 음성이 들리고, 계속된다. 그때가 설날 새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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