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가 등장한다. 자신의 유년의 죽음과 청년의 죽음을 뚫고. 얼굴은 아직 희미하지만 분명 흑백이다. 막연한, 그러나 충격적인 기억들이, 흩어지려는 그의 프로필을 또한 필사적으로 추스린다. 그것은 속도와 갇힘의 기억이다. 속도가 팽배 할수록 갇힘이 좁아드는, 좁아들수록 깜깜하고 안전한, 이곳은 어디지?... 누가 쫓기며 오들 눈을 어둠 속에 반짝이고 있지?...마지막으로 할머니의 치마 속이다. 낡고 퀴귀한 냄새나지만,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 기차바퀴가 그 속을 한바탕 짓이 기고 철길을 내는 그 위로 무수한 속도의 비명소리. 쏟아지는, 포악한 아버지의 발길질. 그것을 뿌리치고 달리는 길, 철길. 그 것이 숨죽임으로 잦아들며, 암흑. 그 위로
전태일 연보
1948. 8. 26. 경북 대구시 남산동 출생 (이스라엘 공화국 수립, 대한민국 정부수립, UN 세계인권선언)
1950. 6. 25.(2세) 한국동란 (1953. 7. 휴전 협정)
1954. . (6세) 여름 전 가족 상경 (제네바 회담 인도차이나 휴전협정, 이승만 자유당 체제 확립(1956. 대통령 3선)
1956. (8세) 남대문 초등공민학교 2년 편입 (한국 TV 방송 시작, 수에즈 동란, 폴란드 고물카 10월 혁명-헝가리 반소 폭동)
1960. (12세) 남대문 국민학교 편입, 곧 중퇴 (동서 대립 격화, 아프리카 식민지 독립, 4.19혁명)
1961년. (13세) 첫 번째 가출 (5.16 군사쿠테타, 베오그라드 제1차 비동맹국 회의, 서베를린 空輸)
1963. 5. (15세) 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 입학 (아프리카헌장, 중소 대립 격화, 한국 군정 연장 반대 데모)
1963. 겨울 동생 태삼 데리고 두 번째 가출 (월남 고 딘 디엠 정권 붕괴, 미국 대통령 케네디 피살, 박정희 대통령 취임)
1964. 2. (16세) 어머니 단신으로 상경. 그는 막내동생 순덕을 업고 어머니를 찾아 상경 (한일회담 반대 데모, 소련 후르시쵸프 실각, 중국 최초 원폭 실험)
1965. 가을 (17세) 평화시장 내 삼일사 견습공 (아랍공동시장 발족, 한국군 베트남 파병, 미국 흑인 투표권법)
1966. 10. (18세) 한미사 재단보조 (한국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가나 엥크루마 실각, 중국 문화대혁명)
1967. 2. (19세) 한미사 재단사 (이수근 위장 자수, 제3차 중동전쟁, 유럽공동체)
1968. 말. (20세) 재단사 모임 준비 시작 (북한 공비 서울 침입, 푸에블로호 피납, 향토예비군, 프랑스 68혁명, 체코 프라하의 봄)
1969. 6. (21세) 아버지 사망 (베트남평화 확대 파리 회담, 한미합동 군사훈련, 드골 퇴진)
1969. 6. 평화시장 내 재단사 모임 <바보회> 조직 (모스크바 세계 공산당 회의, 일본 전공투 투쟁, 아폴로 11호 달 착륙)
1969. 8~9. 노동실태 조사용 설문지를 300매 인쇄, 바보회를 통해 돌리고 근로감독관과 노동청에 진정 (호치민 사망)
1969. 9. (~1970. 1.) 공사판 막노동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 중소 무력충돌, 박정희 3선 개헌)
1970. 4. (22세) 5개월 간 삼각산 에마뉴엘 기도원 신축공사장 잡역부 (미소 SALT 협상, 와우아파트 붕괴, 김지하 담시 `5적`, 경부고속도로, 남산 1호 터널)
1970. 9. 왕성사 재단사 (낫세르 사망)
1970. 9. 16. 바보회를 투쟁단체 성격의 삼동친목회로 재조직, 회장에 선출됨 (공산군, 캄보디아 8개 대대 포위)
1970. 9~10. 평화시장 근로조건 실태조사 설문지를 돌림 (칠레 아옌데 사회주의 정권)
1970. 10.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조건 진정서를 노동청장 앞으로 제출
1970. 10. 7. 경향신문에 평화시장 기사특보 (51회 전국체전 개막)
1970. 10. 8. 삼동회 대표들, 평화시장 주식회사 사무실로 물려가 다락방 철폐, 노동조합 결성 지원 등 8개항을 요구 (독과점 폭리 26.4%, 생필품 22개 품목 시장조사)
1970. 10. 24. 근로조건 개선 시위 계획, 그러나 실패 (대전서 김대중 대통령 후보 유세 스타트)
1970. 11. 13.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치르던 중 분신결행, 얼마 후 성모병원 영안실에서 사망 (드골, 유언 따라 간소한 장례식)
이렇게 약소한 참극이 있었던가. 그러나 음악은?... <그날이 오면>. 가사도 없이. 언제부터?...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실제보다 훨씬 전부터 흐르듯 흐르는 것이 중요하다. 눈물처럼. 눈물이 샘솟아 가슴을 적시고 슬픔의 힘으로 되는 과정처럼. 그 사람의 생전 사진 조각들이 모여 사후의 생애를 총체적으로 이룩하는 과정처럼. 그리고, 무엇이 또 흐르는가, 눈물의 음악의, 가사로? 전신이 불에 타서 뭉그러진 그, 비탄으로 몸이 꿋꿋한 그의 어머니, 그리고 하염없이 무너진 친구들의, 음성이다. 유언을 남기는 죽음의 고통이 길게, 잔인할 정도로 길게 이어지는 음성.
--어머니 담대하세요. 마음을 굳게 가지세요. 그래야 내가 말을 하겠습니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만은 나를 이해할 수 있지요?... 어머니, 저를 원망하십니까?
그것을 끊어주려 점점 더 단호해지는 어머니의 음성.
--너를 이해한다, 어찌 원망하겠니.
--어머니. 제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주십시오
--아무 걱정마라. 내 목숨이 붙어있는 한 기어코 내가 너의 뜻을 이룰께.
--정말 하실 수 있습니까?
--기필코 하고 말겠다.
--자네들... 자네 부모님께 효도하고 조금 시간이 남으면 우리 어머님께도 날 대신해서 효도해주게... 우리가 하려던 일, 내가 죽고 나서라도 꼭 이루어 주게. 아무리 어렵더라도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되네... 내 말 분명히 듣고 잊지 말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알았나?
--...
--왜 대답하지 않는가!?
--네 말대로 하겠다.
울음을 삼키는 친구들. 그가, 보이지 않는 그가, 시커멓게 탄 숯덩이의 목구멍이, 마지막으로, 마지막을 소리친다.
--큰 소리로 맹세하라.
암전. 그리고, 다시 인터뷰 장면이다. 음악은 멈추었다. 언제?..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멈추는 것이 중요하다. 눈물이 자신의 그침을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화면 치칙거리고,
--지금 생각해도 정말 모르겠다.
그래, 친구다. 그의 친구1. 맹서했던 친구. 그의 얼굴이 점점 젊어지면서 배경이 60년대 흑백 풍경으로 멀어지고 선명해진다. 그리고 완연 살아 숨쉰다. 그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운명과 한계처럼. 1970년 9월 청계천 평화시장 근처 다방이다. 레지가 어수룩한 채로 벌써 때 묻고 마담이 짙은 화장으로 나이를 지워버린. 아 그땐 타락이 매우 어설펐군. 지금처럼 야시시하게 세련되지 못했군. 눈물도, 한숨도, 나 혼자 씹어삼키며. 밤 거어리에, 뒷 고올목을, 누비고 다녀도... 최희준이 부르는 <맨발의 청춘 > 깔린다. 남자가 들뜬 허스키로 간드러지게 신을 내지만 벌써 마음이 소울과 재즈보다 가난하고 얇은, 아니 얕은 눈물이 맨발이다. 다방은 2층이고 창 밖으로 음대 건물이 보였다. 머리를 빡빡 깎은, 시커먼 동안(童顔)에 서글서글한 눈매의 태일과 친구1, 친구2. 친구3. 모두 군복에 물을 들인 작업복 차림이고 얼굴이 꺼칠하고 까무잡잡하다. 체격이 설겅한 친구1이 창밖을 내다보다가 툭 뱉는다. 침을 뱉듯.
--하, 삼삼한 것... 니기미 어떤 놈은 팔자 좋고... 하, 좋다.
태일이 착한 웃음을 싱긋 지으며, 짐짓 지지 않을 태세다.
--허어 이 친구 여전하네. 하긴, 그게 좋지...
--아무렴. 너 겉은 쑥맥이겠냐? 아니, 하긴 너야 뒷구멍으로 호박씨 까는 놈이지.
그가, 그도 아는가?... 태일, 표정에 변화가 없고,. 그게 오히려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다. 태일이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그 일이 그토록, 아직도 상처로 남아 있었던가, 금희 누나를 좋아하던 어린 소년의 짝사랑이?... 약간 무안해진 친구1이 정색을 하며 `그래 무슨 일야?` 묻고, 태일이 금새 자신의 무표정에 환한 웃음을 깔며 '뭐, 그냥 보고 싶어서.` 답하고, 친구1은 다시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해 아뭏지도 않은 듯 `그래, 삼각산에 있었다며? 뭘 한거야?` 묻고 태일이 애써 가벼워지며 `뭐, 그냥 인생 설계 좀 했지.` 답하고 친구1은 기세를 좀더 올리며 `인생설계?` 반문하고, 친구3은, 소심한 만큼 구체적이지만, 그의 말투도 어딘가, 겁에 질렸다.
--또 바보들끼리 바보회하자구? 난, 싫다.
덜렁한 친구1은, 친구 3이 주저주저할 때 더욱 기세를 올리지만, 그의 억양에도, 뭔가 처음부터 어긋난 것 아닐까, 눈치챈, 낌새가 묻어난다. .
--바보회? 거 갖구 되나? 왕창 엎어버리던지.
--쉿. 이 친구 왜 이래? 그렇잖아도 태일이 나타났다구 사장들 낌새가 심상찮은데.
--뭐, 낌새씩이나. 저 친구 취직도 됐잖아. 그건 뭐 시다가 시켜준건가?
친구1의 말은 사장들 때문에 겁먹을 것 없다는 뜻인지, 우리가 뭐래 봐야 그들이 눈 하나 꿈적 안한다는 뜻인지 애매모호한 채로 이야기를 공전시키고, 태일은 상념에 빠졌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설문지다. <바보회>에서 돌렸던 설문지... 그의 음성이 묻고 스스로 대답한다. 그리고 장면, 아니 참상들이 그의 뇌리에 펼쳐진다...1개월에 며칠을 쉬십니까?... 이틀 위태위태한 현재 3. 1고가의 10년 전 청계천 6가 3층 연쇄 건물. 또 10년 전의 그 건물, 2~3층 안으로 들어가면서 또 10년 전의 다락방 작업장. 악취 나는, 추악한, 그러나 무엇보다 눈물겹고 충격적인 내부다. 1개월에 며칠 쉬기를 희망합니까? 일요일마다... 왜 주일 마다 쉬지를 못하십니까... 기업주가 강요하기 때문에...1일에 몇 시간을 작업하십니까...오전 8시부터 오후 10시 반까지. 점심시간 30분. 총 14시간... 그러는 동안 카메라 눈에 잡히는 평화시장 작업장의 흐린 백열등. 쇠금속 소리. 재봉바늘 끝. 그것에 고정된 미싱사의 시선. 뻣뻣이 힘을 주어 옷감을 누르는 손. 쉴 새 없이 재봉틀을 밟는 발. 작업장 내, 다리미 등 작업도구들. 그리고 키 작은, 영양실조의 애늙은이 여공들. 허리를 꺾는 다락방. 다닥다닥 붙은 작업대. 재단일을 하고 있는 태일.
--야, 이, 쌍년! 너, 다림질 확실히 못해?
미싱사가 옷감을 내팽겨 치며 시다를 닦아 세우지만 시다는 계속 멍청한 표정으로 머뭇댄다.
--어, 이년이 귀먹었나?
태일이 그 시다와 눈이 마주치고 그녀가 와락 울음을, 터트렸다.
--재단사요, 난 이제 아무래도 바보가 되려나 봐요.
--와? 니, 또 굶었노?
그녀가 다시 멍한 표정으로 돌아간다. 뭔 말을 하려했는지 까먹은 눈치다.
--와? 말을 해 보거라.
--사흘 밤이나 주사 맞고 일했더니 이젠 눈이 침침해서 아무리 보려고 애써도 보이지 않고, 이 손이 마음대로 펴지지가 않아요.
태일이 더 멍한 표정으로 되고, 정지. 그리고,
--으아악!
여럿의 비명소리. 원단 위에 핏자국 각혈을 하며 속수무책으로 우는 여공. 비명을 지르는 다른 여공들. 득달같이 달려와 그녀를 윽박지르는 사장.
--아니, 이년이 결핵 조심하라고 그토록 일렀건만.
--잘못했어요, 사장님.
--나가, 빨리. 병 옮기기 전에. 못 나가?
--한번만, 한번만 봐주세요, 네?
고개를 돌리는 여공들, 정지. 그것을 알처럼 품는, 70년대식 고층 빌딩 풍경. 암전.
--재단사요, 어디든지 주일 날마다 쉬는 데를 좀 알아봐 주세요.
이건 각혈한 여공이 아니다. 그녀는 이미 낙향했고, 아마 죽었을 것이다. 이건 그때의, 그리고 그 후 20년 동안 대부분 여공들의 소원이었다.
--글세... 어디 그런 곳이 드물텐데... 하여튼 알아보기는.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다시, 설문지. 그 위로 음성이 흐르고 음성을 따라 장면이 변해간다. 시다는 전체가 13~15세의 어린 소녀. 1만 2천명. 1개월 월급 3천원. 다락방 1. 5미터. 건평 2평에 종업원 13명. 건강상태는?... 신경성 위장병. 식사를 못한다. 안질, 눈곱이 낀다. 날씨가 좋은 날 눈을 뜨지 못한다. 진폐증. 코를 풀면 새까맣다. 그리고 폐결핵... 400여평 공장에 만명이 사는데 세면장은 딱 세군데. 1평 정도. 그리고 변소는... 500명당 1개 정도...세면대. 의외로 복잡하지 않은, 다만 어둡고 칙칙한. 그러나 그것이 벗겨지 면 세면장 밖으로 뱀처럼 길게 늘어선 여공들. 그것이 6. 25 때 피난 행렬로 언뜻, 흐릿하게 바뀌었다가 다시 줄지어 서서 발을 동동 구르는 여공들로 결정(結晶)되면, 똥 오줌 냄새가 진동하는, 질퍽하게 젖은 벽돌담 화장실 입구다.
--어휴, 저년 왜 안 나오는 거야? 설마 똥 싸는 건 아닐테고.
세 번째 차례 여공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하고, 그 뒤의 여공들이 제각각 한마디씩 퍼부어 댔다.
--거, 빨리 좀 나오라 그래, 씨팔.
두 번째 여공은 짐짓 점잔을 빼고, 앞을 보는 채로 뒤쪽을 향해 힐난조다. 기둘려, 기둘려...그녀는 휘파람까지 불 태세지만 얼굴은 이를 악문 표정이 이미 오래 전부터 굳은 상태다. 하긴 그보다 더 오래 전부터, 단신으로 상경하여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마지막으로 평화시장 작업장에 취직한지 얼마 안 되고부터 굳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것도 잠깐이다.
-- 어휴, 씨. 사장한테 또 찜바 먹겠네. 아니, 먹은 것도 없는데 웬 배탈이야.
첫 번째 여공의 말이 그녀 눈에 일순 쌍심지를 돋군다.
--뭐, 배탈? 아니, 너 큰 거냐? 그럼 이리 나와!
--아니, 이년이 미쳤나!
--뭐, 이년? 이런 염치도 없는 년이 있나, 점심시간에 똥을 싼데니.
이 개 같은 년이!...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그렇게 두 여자가 머리 끄뎅이를 움켜쥐고 난투극을 벌이고, 다른 여공들이 뜯어 말리고, 그러는 통에 새치기 하려는 여공들. 하여, 변소 앞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경비원이 호루라기를 삑삑 불며 달려오고, 비명이 난무하고, 그러나 곧바로 암흑. 오랫동안, 암흑. 부디 눈 뜨면 전혀 다른 세상이기를... <맨발의청춘> 다시 조용히 흐르고, 앞의 다방이다. 친구2가 머리를 감싸 쥐고 말했다.
--어떻게, 우리가 그 일을 또, 어떻게...
--좋다, 씨팔.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지.
친구1이 그러더니 그예 주먹까지 불끈 쥐고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다시 암흑.
--걱정마세요 어머니. 이제 곧 아주 내려 갈께요.
--아아, 어머니, 피. 죽음. 죽음이라... 그가 노동운동을 시작했을 때 나는 그의 죽음 속으로 빨려 들었다...
누구지? 사내, 그래. 내 친구다. 화자. 그가, 언제 깨어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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