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전태일의 32번째 기일(忌日)이 '조용히' 지나갔다. 1970년 11월 13일 22살의 몸뚱이에 불을 질러 지식인 등 양심 있는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 속을 환하게 비추었던, 이 청년을 얘기하는 사람은 이제 별로 없는 듯하다. 그러나 삶이 계속되는 한, 노동 또한 그러할 것이며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는 노력도 계속될 것이다.
온 세상이 머니게임으로 미쳐 돌아가는 지금이야말로 전태일의 삶을 되돌아 볼 때가 아닐까. 시인 김정환이 전태일의 삶을 소재로 한 '읽는 영화'를 기고했다. 임옥상 화백의 판화와 함께 20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작가의 말**
'할 말, 안 할 말' 시리즈로 배우 문성근을 인터뷰해놓고도 두 달 동안 연재를 중단했다. 선거 기간 동안 무조건 몸을 움추리고 '발언을 자제하는' 평소 버릇이 또 발동했기 때문이다. 아직 후보 중 누구를 지지하고, 지지할 대상이 없을 경우 누가 차선인지를 밝히는 '정치적' 의무 혹은 권리를'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데 미숙하다. 다만 특히 대선 기간 중에는 '전태일' 이야기를 되새겨보는 것이 가장 문학적인 동시에 정치적이라는 생각은 든다. 전태일의 생애와 글은 지도력 부재를 뼈아프게 웅변하고 죽음으로 역전시켰다. '할 말, 안 할 말' 시리즈의 기나긴 '막간'으로 이 글을 연재한다. '문성근 편'은 대선 전 적절한(?) 시기에 발표하고, 대선이 끝나면 '할 말 안 할 말' 2부를 연재할 예정이다.
몇 년 전 영화 시나리오 작업에 참가했던 적이 있다. 영화 자체는 내 '시나리오' 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과정 동안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단지 영화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다. 문학에 대해서도,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배웠다. 영화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면, 문학이 무엇인지를 더 정확히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둘의 더 바람직한 관계 혹은 결합을 꾀하게 된다. 이 작품을 쓰면서 내가 겨냥했던 것은 시나리오 혹은 원작소설의 개념을 뛰어넘는, 그리고 가시적인 가시화(可視化)의 한계를 뛰어넘는, 읽는 영화다. 영화의 그 전에 있었을 수도 있고 그 후에 있을 수도 있다. 나는 이러한 시간적인 중첩 의 관계가 앞으로 소설을 위해서 또 영화를 위해서 필요불가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읽힐 수 없는 시나리오와 기 발표된 원작만으로는 문학이 영화와 맺는 관계가 상호상승적이기는 커녕, 상호보충적인 역할조차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화가의 말**
소설 『남자, 여자, 그리고 영화』원고를 받고 매우 힘들었다. 전태일 열사를 다루었다는 이유가 있기도 하겠지만, 원작자 김정환의 시선이 사뭇 범상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도 복잡하고 이들의 시간과 공간이 현재·과거·미래까지도 종횡무진으로 자유자재로 왔다갔다 하고, 영화와 음악적 요소가 이리저리 겹쳐지고···소설 읽기가 이렇게 지적인 작업이 될 수가 없었다.
작가 특유의 소설의 느낌을 잡아내기가 여간 힘들지가 않았다. 끙끙 앓았다. 결과가 마음에 차지도 않는다. 박정희의 곤궁한 시대, 그리고 그 연장선의 오늘, 삶과 죽음, 이상과 현실 등을 나름대로 형상화해 보았다.
딱딱한 주제이다 보니 흙으로 그 충격을 흡수해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흙을 재료로 선택했다. 또 그 색깔도 나로서는 매우 편안해서 좋았다. 이번 그림은 프롤로그라서 종합판으로 그리다보니 복잡해졌지만, 다음부터는 단순하고 상징적인 작업이 될 것이다.
***프롤로그**
사진이 요물이던 시대가 있었다. 새까말수록 영롱하게 빛나는 렌즈의 눈이 누추한 백의(白衣)와 피골상접을 뚫고 피사체의 영혼을 빨아들인다는, 생각하면 가난이 엄숙하고 엄숙이 무척 어리숙했던 구한 말. 그러나 돌이켜 보고 뒤집어 보면 꼭 그렇지 만도 않다. 한 장의 기념사진은 백화점 진열창의 화려하고 영롱한 보석과 의상과 찻잔과 주방 기구에 흑백을 씌워 삽시간에 시간과 역사 속으로 빛 바래게 한다. 낡은, 그러나 제 영혼을 빼앗긴 것보다 더 경악하는 모든 생애가 무너지고 여우같은 죽음이 드러난다. 오, 그것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환관(宦官). 역사란 허망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쌓아 올린 계단이던 것을. 사랑은 다만 아우성이라 그토록 간절하고 구체적인 육(肉)이던 것을. 살아온 시간을 보고 있는지 아니면 앞으로 살아갈, 죽음의 세상을 보고 있는지, 우리는 일순 아찔한 실족(失足)의 낭떠러지를 가슴에 품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 삶이 그렇게 공허 속으로 확장하며 중첩된다. 우리가 죽은 사람과 더 슬픈, 구체적인 사랑을 나눌 때, 시간은 어떻게 흐를 것인가. 영화는 사진 속으로 어떻게 또한 미래의, 눈물 묻은 잔영(殘影)을 새길 것인가. 혼탁으로 빚은 영롱함의?
***1場 男과 女**
여자는 음악이다. 바이올린이나 첼로와 같은, 악기가 되지 않아도 그렇다. 그러나 그건 여자가 지금 화면의 배경이라는 뜻이다.
70년대 청계천 시장거리. 북새통을 이루는 것은 칙칙한 국방색 작업복장들. 그 위에 덧칠을 한 노랑 빨강 원색의 투피스 원피스들이 알록달록 묻어난다. 파랑 바탕에 하양 물방울 무늬를 박은, 발랄하고 싱싱한 처녀 차림도 있다. 양산을 쓴 멋쟁이가, 세련되지 않고 좀 어설프다. 7층, 8층 쯤 되는, 외벽 내벽 모두 검게 그을린 시멘트 건물들이 군데군데 생짜 벽돌까지 고단한 치부로 드러내면서 저들끼리는 몇 동(棟)이 문둥병처럼 문드러져 뒤엉켜 있었다. 고도성장을 추구하는 안간힘이 아녔다면 벌써 형해화(形骸化)되고 파삭파삭 사그라졌을 그 건물들 사이로 말라 비튼 뱀 껍질의 비좁은, 꾸불텅하면서 각도가 가파른 길들이 나있고 그 위로 사람들이 넘쳐난다. 얼핏, 몸빼 바지도 보인다. 왜 안 그렇겠는가. 그것은 분명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그악스러운 생의 활기다.
--음대 앞이야.
여자가 말한다. 언제부터 음대가 시장통 안에 자리잡고 있었지? 음악은 마렝 마레, 'tableau de l'operation de la taille'. 연습곡? 담석 수술대 위에 마취 상태로 놓인, 혼미한. 무표정하고 매가리 없는 의사의 목소리가 끝없이, 한없이 가라앉는, 마치 모든 것이 가라앉음 뿐, 밑바닥은 없다는 듯이. 아, 그렇다. 사람은 없고, 온기도 없고, 기억만 있다. 텅 빈 강의실에 잉잉대던 연습곡, 교수의 목소리, 악기, 소리 의 기억만. 시장통 소음 속에... 그것이 한없이 가라 앉는다.
--젠장, 어쩌다 이 길로 들어섰지?
남자가 말한다. 친구다. 나의 친구. 그를, 필요할 경우 화자로 하자. 그래 그는, 나일지도 모른다. 시장통 사람들 속으로 숨어 들 듯 비집으며 그가 걷고 있다. 그 옆에 한 여자. 남자가 여자를 끌고 군중 속으로 아스라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들과 하나가 되고 싶은 것처럼? 아니 사라지고 싶은 것처럼. 젠장 어쩌다... 언제부터 그 길로, 사라지다가 우리는 군중을 만났지?
카메라가 그의 등을 끌어당긴다. 그러면, 그러나 그는, 그의 등은, 거대하고, 거대하게 혼자다. 그가 다시 안간힘으로 멀어 지고 심지어 뿔뿔이 흩어지려 했다.
--저지해야 해...
누구? 카메라가 다시 잡아당긴다. 그렇다 카메라도, 단지 폭로가 아니라. 구원이다. 아, 이게 영화구나. 기억이 아니고. 기념사진이 아니고. 그가 왜 기억 속에서 튀어나와 영화 속으로 들어갔지? 그는 결단력이 약하고 철학적인 사람이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1968년 서울 법대를 입학했고 곧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어떤 사건을 딱 부러지게 주동한 적은 없다. 그냥 언저리를 맴돌았다. 하지만 그가 겁을 냈던 것은 아니다. 민주화 운동이 일약 사형선고를 받아 마땅한, 천인공노할 반국가 행위로 매도되고 그에 맞추어 은밀한, 혹시 스스로조차 소름끼치는 비밀결사 차원으로 변해가는 동안 그는 그 언저리를 매우 꾸준하게, 끈질기게 지켰다. 여전히? 그래. 여전히. 그런 그를 편하게 생각하는 축도 있고 지겹거나 귀찮아 하는 축도 있었지만, 그가 프락치로 의심을 받은 적은 없다. 아니 그는, 그도, 운동의 배경이었다. 소설의, 영화의 주인공이 될 만하다.
그에게서 악착같은 분위기는 묻어나지 않았다. 운동의 그런 변화를 발전이라며 음습한 자부심을 표하는 자에게도, 왜곡--변질이라며 멀리하는 축에게도 그는 자기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 그게 도대체 무슨 삶, 무슨 의미였지? 이제 그는 벌을 받는 건가? 아니면 그 의미가 이제 드러나려는 건가? 형언(形言) 안 된 의문부호들이 그 위를 떠도는데,
--아, 아파. .
아픔이 뼈대를 살로 바꾼다. 그렇게 팔목이 아픈 표정을 여자가 짓지만 그는 알아듣지 못했다. 귀로도 팔목을 쥔 손의 감촉으로도. 그는, 그의 손아귀는 어딘가로 사라지려고,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며 필사적이다. 아, 이런. 왜 그게 벌써, 늙어서 고려장 당한 바퀴벌레의 비틀거리는 갈지자 걸음으로 보이고. 운명적으로 보이고. 카메라,
--카메라!!
카메라는 어디로 갔지? 그가 외친다. 영화 안팎에서, 아무도 없는, 공허한 자신의 내부 속으로. 자신의 귀만 웅웅 울리는 카메라 목소리로.
--돌아갈 순 없어. 그냥 가는 거야.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면 안돼. 물론... 사람은 외모나 얼굴이 아니라 눈빛으로 알아채거든. 동물은? 냄새로. 갓난 아이가 그렇듯이. 갓난 애가 엄마한테 앵겨 붙는 것은 낯익은 냄새 때문이다. 눈빛으로 알아본다. 그 인간적인, 사랑의, 어른의 법칙이 왜 수배자 유의사항 제1조로 되었지? 수배 행위야 말로 어른들의 가장 비인간적인 행위라는 뜻, 아니면 그 반대? 그보다 더 명심할 것. 진리는 항상 역동적인 한 중간에 있다. 우리들의 사랑이, 무너지더라도 그렇다. 왜 너는, 아니 그는 아직도 수배중일까, 이었을까? 아직도 수배중이 없는 세상을 위해 수배중일까? 그래서 그는, 나는 영화 속으로 유배되었던 것일까? 그가, 심복더위 개처럼 혀를 질질 빼물고 헉헉거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매우 고요하기도 했다. 혼잣말 하는데 지쳐 할 수 없이 자기 바깥으로 혓바닥을 내놓는 것처럼.
--이 근처에서 그를 보았을지 몰라. 특히 당신은...
--누구요?
여자가 아직 명랑한 채로, 벌써부터 겁에 질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그 공포를 남자의 말이, 장악했다.
--불에 타서 죽은 사람.
--누구?
늘씬하고 서글서글한 미인형 목소리가 죽음에 아직 또랑또랑하게 묻어나는데 그가 불에 사그라드는 종이 소리로 말한다.
--전태일. 불에 타서 죽은 사람.
--그 사람이, 왜요?
의문에는 나이가 없다. 예의도 없다. 죽음에 비해 잔인할 정도로 명징하고 촉촉한 목소리로 그녀가 묻는다.
--차라리, 그때 만났더라면...
쉼표는 언제부턴가, 머뭇거린다는 증거가 아니고, 아니고, 이게 뭐지? 그녀, 으스스 떨리는 한기, 그리고 말짱함이 뒤섞여 잠시 어리둥절한 그녀의 얼굴이 묻어나는데. 무엇에? 아, 거대한 텅 빔. 우울을 다한 음악의, 남자와 여자를 둘러싼 군중의 솟구침. 텅 빔. 거대하게 솟구치는 텅 빔. 텅 빈 거대함. 거대한 있음...
--뭐지?
--뭐라고요?
이번엔 그녀가 까닭 모르게 절박하다. 두 개의 질문이 낭떠러지보다 더 가파르게 어긋난다. 여자가 그것에 발끈했다.
--그런 얘기 듣기 싫어요.
여자가 남자에게 파묻히려 했다. 그가 멈칫, 밀어낸다. 그러나 그녀가 말했다.
--난, 당신 뒷바라지하는 것만도 힘들단 말예요.
그 앙탈을 품을 품이 없다. 여자가 섬짓해 한다. 그러나 곧 체념한다. 여자는 음악. 그녀는 서울대학 음대생이었다. 아주 어려서부터 비올라를 전공했고, 그래서 가랑이 사이가 남보다 조금 더 벌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휴학 중이다. 아버지가 파산을 했고, 그녀는 요정보다 훨씬 점잖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어깨가 드러나는 야회복 차림으로 비올라보다 못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녀의 생음악 연주가 끝나면 곧바로 소울 음악이 이어졌다.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끝냄이자 이어짐이었다. 그녀는 그런 음악에 점차 익숙해졌다. 특히 흑인 소울 가수 오티스 레딩이 좋아졌다. 그건 그렇고, 그렇다. 어찌됐든 그녀는 공부하러 온 길이 아니다. 그녀도, 어쩌다 이 길로 접어들었지?
--미안, 미안해요.
--...
그러나 그도, 마찬가지다. 그런, 누가 죽었다는, 아니 자살했다는 얘기가, 건드리면 터질 것처럼 무섭고, 끔찍하다. 좀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면 그 죽음은 덜 끔찍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는 사형 선고를 남발하는 시대에 수배당한 처지였다. 그에게는 같이 수배 중인 친구가 하나, 그렇지 않은 친구가 또 하나, 아버지가 정계 실력자인 선배가 하나, 있다, 있었다. 친구1은 과격하고, 테러리스트 기질이 다분했다. 지금은 국회의원이다. 지금? 무엇의 지금? 현실의 지금. 소설 바깥의 지금. 아니면 지금의 지금? 친구2는 성격이 유순하고 굿패 출신이다. 그의 이야기는 앞으로 하자. 그의 생애는 소설이 품어야 할 생애다. 그는 끝까지 사회주의자로 남기를 원했으므로 지금은 침묵 중이다. 그렇다. 그도 배경이다.
선배는 야학을 운영하고 있었다. 지금은 연락이 없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있었을까. 시간은 흘러온 것만 보이고, 흘러가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일순 이름 하나. 아름다운 이름 하나. 그게 언제 아름다워, 졌지? 지금에서야 떠오르며, 그 사이 어떤 망각의 강이 그의 생애를 잉태하여 그 이름을 낳았지? 아, 그것 아니라도 아름답다는 것은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하지만, 이렇게 피해다니는 건 싫어요...
그래 그녀, 여자가 남자, 내 친구 곁에 완강하게 있다. 그와 동갑인 화자 곁에. 어쩌면, 벌써부터 지긋지긋하게. 음악인 그녀가 죽음인 그를 좋아할 리는, 없을까? 지금은 없다. 그녀는 그와 결혼하고 음악공부를 다시 시작하는 게 꿈이다. 그러나, 시대가 앞으로 죽음 아닐 것인가? 음악이 또한 궁극적으로, 삶 영역에 거울로 비쳐진 죽음의 평화 아닐 것인가. 뭐라고? 그게 무슨 말...? 그런 채로 정지. 모든 것의 정지. 음악이 커지고, 가라앉음이 커지고, 가슴이 터질 것 같고, 그러나 나의 생애가 폭발하더라도, 계속 커져 가기를... 그렇게 비올라 음이 텅 빈 음대 연습실을 채운다. 마치 그녀, 비올라의 육체가, 그녀의 축축한 꿈이, 검은 죽음 앞에서 스스로의 육감성에, 비명도 못 지르고 경악하는 것처럼.
--왜, 왜 그래?
남자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자신을 수배한 세상에 놀라지 않았다. 어느새 자기 안에 있는 어떤 죽음의, 낯, 익음에 충격 받았을 뿐. 그것이 죽은 그일지 아니면 죽은 나일지, 여기서 죽은 나는 나일지 죽은 그는 그일지 내가 그고 그가 나일 것이므로, 가장 중요한 문제가 가 장 애매모호하므로, 음악이 커지고 작아지고 잦아든다. 모든 것이 사라진다.
--아아, 하지만...
죽음. 우리 모두의 죽음. 그것이 오고 있다. 여자는? 그녀는 오티스 레딩을 좋아한다. 그는, 그도 일찍 죽었다. 그러므로 더욱, 육체가 너무 진하지. 육체가 목청이 아니라 육체 전체를 매개로 입을 벌리는 소리다. 그때 음악은, 여자가 아니라, 자궁 그 자체. 음악이, 性의 극복으로 되려다가, 동성애로 난파하는 대목이다. 그 난파는 얼마나 편안한가. 아, 왜 벌써, 이렇게, 되어버리지? 벌써 짧은 신음소리가 고막에 뜨거운 침을 놓고 벌거벗은 여자 혼자 관능의 고통을 몸부림치는 여자, 누워있는 여자의 장면이 벌써 떠오르고 아, 우리의 사랑은 도대체 잘 될 수가, 있기는 있는 것이었을까? 그렇지만, 그녀를, 그녀의 육체를 비올라 몸체에 비유하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나았다. 그 완벽한, 마각 (魔脚)의 순정한 고동색 액화(液化)에 비하면.
새까만 음반 위로 하얀 손이 카트리지 바늘을 옮긴다. 바늘은 잠시 파르르 떨다가 맨 가장자리에 사뿐 놓인다. 능숙한 동작이다. 그리고 노래가 출입문을 부수고 나온다. 빠밤, 빠 밤. 아주 경쾌하게, 따따땃땃땃따아땃다. 땃땃땃땃 닷 닷 따아 닷다, 전주가 한 번쯤 반복되지 않을까? 그 기대를 다시 출입문 삼아 부수며, 성급하다는 생각이 들 틈도 주지 않고, 아 도노 머차 밧 마 히스토리, 도노 마차 밧 바이아알로지.. '히스'는 무척 끼와 흥을 돋구며 '아알'을 될 수 있는 데로 건들대며, 야하게. '히스' 토리는 역사, 바이'아알'로지는 생물학, 역사도 생물학도 모르지만 그대를 사랑하는 것만으로 행복해... 노래의 새까만 성기(性器)가 귀의 커텐을 타닥타닥 두드리고 여자가 그렇게, 아주 얌전하게 고개를 까닥인다. what a wonderful world... Otis Redding의. 창법도, 가사도, 내용도 완전 양아치인 , 그래서 같이 따라 부르긴 창피하지만, 들으면서 그 생짜 감정의 천박성을 누리다보면 어느새 해방의 쾌감이 온몸을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그 노래가 작아지고 이어지는 다방이다. 74년 겨울. 다방에 그녀는 앉아 있었다. 삶의 고단한 끼를 짙은 화장으로 얼버무린, 나이든 마담이 있는, 그러나 탈모증에 걸린 중년 아저씨는 없는, 젊은 손님들이 대부분인, 그렇지만 복장이 무척 단조롭고 칙칙한, 변두리 허름한 다방에서 그녀가 그를 기다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오늘 담화문에서...
흑백 텔레비젼이다. 그땐 그렇게 텔레비젼이 말을 했지. 그러다가 석탄난로 위 물주전자 주둥이 대신 치칙거리고 그랬다. 하지만 긴급조치 시대가 되면서 사람들은 달라졌다. 긴급조치란 이를테면 경악의 반복이었는데, 갈수록 반복이 우위를 점하게 된다.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일이 시들해진다. 다방 풍경이 그랬다. 간혹 텔레비젼에 눈을 두는 사람들도 귀를 기울이지는 않고 그냥 무표정이다. 무료하면서도 어딘가 짓눌린 듯한 분위기 전체가 귀를 내맡기고 있기는 했다. 손님들은 그렇고 그렇다. 어떻게 보면 모두 수상하다. 그래서 그녀는 신문을 읽으며 아니 신문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은 자꾸 소파 속으로 몸을 숨기려 드는 자세로 된다. 그러면 안 되는데. 그러면 더욱 표가 나는데... 그러던 때다. 박정희가 긴급조치로 사형선고를 남발하던 때. 그게 죽음을 별 것 아닌 것처럼 만들었나, 아니면? 하지만 그녀의 수배자 애인은 더 몇 년 전의 불을 쫓고 있었다. 한 사람이 제 몸을 살라 일으킨 불. 아니면 빛의 탈을 쓴 시대의 어둠이 한 사람을 잡아먹었을 뿐인 불. 어차피 그 불의 운명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결정할 문제였다. 그것 하나만 해도 얼마나 귀한 불인가.
더 먼 그 불이 혹시 더 공포스러운 것은 아닐까? 아니, 그것까지 생각할 겨를이 그녀한테는 없다. 지금 그는 그것 때문에 수배 중이 아니다. 아니, 그녀는 그에 대해 도대체 무엇을 알고 있단 말인가. 물론 사랑한다. 그러나 이런 사랑은 구체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 사랑은, 그땐 그랬다. 그를 생각하면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도 아니면서 그냥 막연하게 그를 위해 자신은, 자신의 미래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행위일 뿐이다. 부모님도 대찬성이다. 부모님의 성심을 그녀는 믿는다. 아무리 사업에 망하셨기로, 판검사 사위를 대망해서 그러시는 것은 아닐 거다. 그가 '위험인물'인 것을 아시면? 그녀의 믿음과 전혀 다른 차원으로, 펄쩍 뛰실 게다. 그리고 그건, 같은 차원으로 그러시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가슴 철렁하게, 더 큰 문제가 떠오른다. 그의 부모도 알까? 무엇을? 그가 수배자라는 것, 아니면 그가 그녀와 진지하게 사귀고 있는 사이라는 것? 도대체 그에 대해, 그의 부모님에 대해 그녀는 무엇을 알까? 그의 부모는 그녀가 음대를 다니다가 때려치고 술집에 피아노 아르바이트를 나가는 것을 알까? 아니, 그녀는 그의 부모가 어떤 대목을 어디까지 알기를 원하는 것일까? 그렇게 상황은 그녀를 독안에 든 쥐로 몰고 그녀는 자그마한 불안에 아주 자그맣게 떨고 있다. 그게 아직은, 눈물로 응축되지 말기를... 그 여자의 어깨에 창백한 손이 와 닿는다. 여자가 흠칫 놀라고, 그 놀람에 더욱 놀란 사내가 그녀의 입을, 막았다.
--웁?!
그녀가 비명을, 지르지 못하고 틀어 막힌 입속에서 비명이 제 혼자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쉿?!
손가락으로 입을 막지 않고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지만, 그에게도 의문부호가 묻어 있다. 그게 다행이었다. 아니라면 그녀는 정작 그의 '쉿' 표정 때문에 하마터면 더 큰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석고질로 굳은 그의 표정이 너무 엄혹했다. 소름이 끼치고 양 다리에 힘이 빠지는 몸을 그녀는 그 의문부호에 겨우 걸쳤고, 그런 채로, 그녀 겨드랑을 잡아채는 그의 동작이 또한 몹시 거칠었다. 그가 혹시 그녀를 체포하려는 게 아닌가? 그녀가 착각한다. 하지만 다시 의문부호. 이번에는 그녀 자신의. 마구 요동치는 심장을 짓누르고 침착한, 아뭏지도 않는 내색 을 유지하며 자리를 뜨고 다방을 벗어나는 동안 그녀도 그의 그런 흐름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다.
--이게 사랑일꺼야. 하나가 된다는게 이런 걸꺼야. . . .
그렇게 의심 자체를 확신으로 다지면서. 영화는 그들의 없음 속으로 이어진다. 탁자에 내팽게쳐진 신문은 대서특필로 '박 대통령 긴급조치 선포'... 몇호냐, 벌써 몇 번째냐. 그게 중요하지 않다. 이젠 충격도 없다. 아니, 그것도 이젠 중요하지 않다.'데모만 해도 사형'이라는 4호 이상 충격을 줄 수 있는 호수는 애시 당초 없었다. 문제는, 시대를 살아갈 우리 자신이었다. 우리는 우리 내부에 우리 자신의 무덤을, 시대는 시대 내부에 시대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파고 있었다. 긴급조치 4호의 충격이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때 우린 몰랐다. 아니, 알 겨를이 없었다. 남녀가 사라지고 영화가 지지부진하게 계속된다. 쟁반 위에 담긴 커피잔이 김을 모락모락 내고, 그것을 받쳐 든 레지의 얼굴이 반쯤은 어리둥절하고 반쯤은 뾰루퉁하다.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녀도, 차를 주문해놓고 사라진 두 사람, 아니 두 빈 자리의 의미를 어렴풋이는 알았다. 다방을 나서면 어둠의 아가리가 그 둘을 덮치리라는 것을. 그들이 구체적으로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몰랐겠지만. 그러나 그건 두 사람 자신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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