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제 폐지하겠다.”
서로 다른 정치적 노선을 가진 민주당 경선 후보들이 이례적으로 한편에 섰다. 지난 21일부터 진행된 MBC 대선 예비주자 토론회에서 ‘호주제 폐지에 찬성하냐’는 공통질문에 7명 후보 모두 찬성한다고 밝혔다. 이인제 고문과 정동영 고문만이 유림의 반대를 이야기하며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단서를 달았을 뿐이다.
유림과 여성운동계를 대척점으로 지난 수십년간 논의돼 왔고, 최근 이혼과 재혼의 급증 현상을 바탕 삼아 우리사회 핵심 쟁점의 하나로 부상하고 있는 호주제 폐지에 대해 민주당 경선 후보들이 한결같은 목소리를 낸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표'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후보 입장에서 국민여론이 반분되어 극심한 대립상을 보이는 쟁점에 대해 '모두 한편'이라는 것은 그 만큼 폐지 분위기가 무르익었다는 반증일 수 있기 때문이다.
***“DJ도 호주제 폐지가 대선 공약이었다”**
대선주자들의 호주제 폐지 공언에 대해 이구경숙 한국여성단체연합 정책부장은 “의지를 밝힌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김대중 대통령도 호주제 폐지가 대선공약이었다”라며 ‘또 다시 공약(空約)을 남발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
여성계도 올해가 호주제 폐지의 호기라는 사실에 대해 이견이 없다. 지난 97년부터 여성단체에서 집중적으로 벌인 호주제 폐지 운동이 무르익었고, 국민들의 의식이 크게 변한 상황에서 대선을 맞이했기 때문. 이구경숙 부장은 "빠르면 올해, 늦어도 내년 안에는 폐지되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럽게 전망했다.
여성단체들은 호주제 폐지를 올해 핵심사업으로 설정해 대규모 캠페인, 국회의원들을 대상으로 한 로비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벌일 예정이다. 특히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 이유명호 대표는 대선과 관련해 “각 당의 후보가 결정되고 본격적인 대선 국면에 접어들면 호주제 폐지 등 여성정책에 대한 검증작업을 벌여 여성신문 등을 통해 공론화하겠다”고 밝혔다.
이구경숙 부장은 “호주제 폐지는 대통령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국회에서 민법 개정안이 통과되어야만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한국여성단체연합,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 등 4개 여성단체와 여성신문은 지난해 11월부터 모든 국회의원들을 대상으로 호주제 폐지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였다. 이구경숙 부장은 “국회의원들이 워낙 호주제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설문조사 자체가 힘들었다”고 밝혔다. 이 설문조사 결과는 다음 달 안에 발표될 예정이다.
호주제와 관련해 국민들의 의식도 크게 변했다. 최근 서울대학교 법학연구소(소장 최대권)가 여성부의 의뢰를 받아 성인 남녀 2천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47.5%가 현행 호주제의 폐지 또는 수정을 요구해 1년 전의 27%에 비해 2배 가까이 증가했다.
***호주제 개선방안으로 '친양자제도' 도입 요구**
현재 호주제에서 가장 문제로 지적되는 점은 재혼 및 이혼 가정 자녀의 호적문제다. 이혼과 재혼이 증가함에 따라 새 아버지와 자녀의 성이 달라 고통받는 가정이 증가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여성계는 호주제 개선방안으로 우선적으로 ‘친양자 제도’의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
친양자 제도는 입양한 어린이와 친부모와의 친족관계를 없애고 입양 어린이가 양부모의 성을 이어받게 하는 것으로 재혼 가정에서 이 제도의 도입을 강력히 요구해 왔다. 민법개정안에 신설된 이 제도는 작년말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는 30일 여야정치권과 정부, 학계 등 관계자들을 초청해 ‘친양자제도’ 공청회를 개최했다. 여성단체들은 올 정기국회에서 이 제도를 반드시 통과시키겠다는 입장이다.
한편 유림들은 호주제 폐지에 대해 "호주제는 남녀차별과 무관한 우리나라 고유의 미풍양속이며, 호주제가 폐지될 경우 전통적인 가족 가치의 붕괴와 가족 해체를 조장한다"고 반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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