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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고전강독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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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고전강독 <66>

제6강 논어(論語)-25

子貢問曰 鄕人皆好之何如 子曰未可也 鄕人皆惡之 何如
子曰 未可也 不如鄕人之善者好之 其不善者惡之(子路)

鄕人(향인) : 마을 사람.
未可(미가) : 좋지 않음. 옳지 않음.
何如(하여) : 어떠한가? (如何는 ‘어떻게’의 뜻)
惡(오) : 미워함.

“자공이 질문하였다. ‘마을사람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하기를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마을사람 모두가 미워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하기를 ‘(그 역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마을의 좋은 사람이 좋아하고 마을의 좋지 않은 사람들이 미워하는 사람만 같지 못하다.”

이 대화에 대하여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쓴 내용을 소개하지요. 내가 감옥에서 그 글을 쓸 때의 심경이 매우 착잡하였습니다. 감옥에는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마을의 좋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라 할 수 있지요.

그리고 나는 비교적 감옥의 많은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지내는 편이었어요. 그래서 이 구절이 더 심각하게 읽혔지도 모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쓴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자(朱子)의 주석에는 마을의 선한 사람들이 좋아하고 마을의 불선한 사람들 또한 미워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행(行)에 필시 구합(苟合, 迎合)이 있으며, 반대로 마을의 불선한 사람들이 미워하고 마을의 선한 사람들 또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행(行)에 실(實)이 없다 하였습니다.”

내친 김에 책의 내용을 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합(苟合)은 정견(定見)없이 남을 추수(追隨)함이며, 무실(無實)은 선자(善者)의 편이든 불선자의 편이든 자기의 입장을 갖지 못함에서 연유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견이 없는 입장이 있을 수 없고 그 역(逆)도 또한 참이고 보면 ‘논어(論語)’의 이 다이얼로그(dialogue)가 우리에게 유별난 의미를 갖는 까닭은, 타협과 기회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면서 더욱 중요하게는 파당성(派黨性, parteilichkeit)에 대한 조명과 지지라는 사실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편부당(不偏不黨)이나 중립을 흔히 높은 덕목으로 치기도 하지만 바깥 사회와 같은 복잡한 정치적 장치 속에서가 아니라 지극히 단순화된 징역 모델에서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싸울 때의 ‘중립(中立)’이란 실은 중립이 아니라 기회주의보다 더욱 교묘한 편당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호감(好感)을 얻으려는 심리적 충동도 실은 반대편의 비판을 두려워하는 ‘심약(心弱)함’이 아니면, 아무에게나 영합하여는 ‘화냥끼’가 아니면, 소년들이 갖는 한낱 ‘감상적(感傷的) 이상주의(理想主義)’에 불과한 것이라 해야 합니다. 이것은 입장과 정견이 분명한, 실(實)한 사랑의 교감이 없습니다. 사랑은 분별이기 때문에 맹목적이지 않으며, 사랑은 희생이기 때문에 무한할 수도 없습니다.

징역을 살만큼 살아본 사람의 경우가 아마 가장 철저하리라고 생각되는데 ‘마을의 모든 사람’에 대한 허망한 사랑을 가지고 있거나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증오에 대하여 알만큼 알고 있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증오는 그것이 증오하는 경우든 증오를 받는 경우든 실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불행이 수반되게 마련이지만, 증오는 ‘있는 모순’을 유화(宥和)하거나 은폐(隱蔽)함이 없기 때문에 피차의 입장과 차이를 선명히 드러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증오의 안받침이 없는 사랑의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증오는 ‘사랑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나도 오랜만에 읽어보는 셈입니다. 논어의 이 대화가 양극단을 좋지 않다고 하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만인으로부터 호감을 받는 경우와 만인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경우 둘 다 좋지 않다는 것이지요.

양극단은 실제로는 없는 것입니다. 위선(僞善)으로서, 또는 위악(僞惡)으로서만 상정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사회란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는 구조도 아니며 동시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행해지는 구조도 아님은 물론입니다. 대립과 모순이 있으며 사랑과 증오가 함께 존재하는 세계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실상을 최소한 미화하거나 은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맹자 진심(盡心下)편에 있는 구절입니다.

“내가 향원(鄕愿:마을 사람들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사이비(似而非)를 증오하기 때문이다. 자주색(紫)을 싫어하는 것은 빨강색(朱)을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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