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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고전강독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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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고전강독 <61>

제6강 논어(論語)-20

樊遲問仁 子曰 愛人 問知 子曰知人(顔淵)

“번지가 인(仁)에 관하여 질문하였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인이란 애인(愛人)이다. 이어서 지(知)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지(知)란 지인(知人)이다.
지인(知人)이란 타인을 아는 것이다.”

논어(論語)에서 인(仁)에 대한 공자의 답변은 여러 가지입니다.

극기복례(克己復禮-顔淵),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仲弓), 기언야인(其言也인-司馬牛)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더 있습니다만 다 조사하지 못하였습니다.

공자는 이처럼 인(仁)이란 자기(私心)를 극복하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답변한 경우도 있고,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인이란 말을 더듬는 것이라고 답변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인(仁)의 의미는 특정한 의미로 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적절한 대답을 하고 있는 경우도 있으며 또 질문하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서 그에게 맞는 답변을 공자는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仁)을 애인(愛人) 즉 남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번지는 공자가 타고 다니는 수레를 모는 마부입니다. 늘 공자를 가까이 모시는 사람입니다. 물론 제자입니다. 번지에게 인의 의미를 애인으로 이해시키려고 한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되는 것은 위의 여러 가지 답변에 공통되는 코드가 타인과의 관계라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극기복례(克己復禮)의 경우는 사(私)와 공(公:禮)의 관계를, 그리고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의 경우는 기(己)와 인(人)의 관계를 인(仁)의 내용으로 삼고 있습니다.

사마우(司馬牛)에게 이야기한 ‘인이란 말을 더듬는 것이다’(其言也인)의 경우는 더욱 철저합니다. 인이란 말을 더듬는 것이라고 한 이유가 위지난언지득무인호(爲之難言之得無인乎.실천이 어려우니 어찌 말을 더듬지 않겠는가)입니다. 자기가 한 말은 다른 사람과의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이 역시 나와 타인의 관계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仁)이란 이처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덕목(德目)입니다.

‘위태로운 사랑은 자기의 측근에게만 미치며 멸망하는 자의 사랑은 제 한 몸에게만 미친다’(董仲舒)라고 한 것도 같은 관점에서 인(仁)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知)에 관한 공자의 답변은 이러한 점이 훨씬 더 분명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지식(知識)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냉정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위 객관적 지식이나 정보(情報)에 대하여는 더욱 부정적이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구절에서 이어지는 대화는 정치에 관한 것입니다. 곧은 사람으로서 굽은 사람을 바르게 만드는 것의 중요성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왕(齊王) 건(建)은 보통사람의 3배나 되는 재주가 있었지만 현자(賢者)를 알아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진(秦)의 포로가 되었다고 해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知)란 지인(知人)이다”라는 선언은 우리에게 매우 깊은 반성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연과학적 지식 즉 지극히 객관적 사실이라는 지식도 궁극적으로는 인간적 당파성에 기초해 있는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모든 지식은 사람과 관계되지 않는 것이 없는 법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을 이해하지 않고 그 말(言)을 이해할 수 없으며 그 사람을 이해하지 않고 그 행(行)을 이해할 수 없는 법입니다.

우리의 유행가에도 그런 가사가 있었어요.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내가 어찌 너를 알겠느냐?”하는 가사였습니다.

더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자기를 보여주지 않는 법이지요. 자기의 알몸을 보여줄 리가 없지요. 지(知)와 애(愛)는 함께 이야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애정이 없는 이를테면 나와 아무런 관계없는 타자(他者)와 대상(對象)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나와 타자(他者)사이에 놓여 있는 근원적인 비대칭성(非對稱性)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인식(知)은 애정과 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구절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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