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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고전강독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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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고전강독 <48>

제6강 논어(論語)-7

다음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습(習)’에 관한 것입니다. 이 ‘습(習)’을 배운 것의 복습(復習)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습(習)의 뜻은 그 글자가 상징하고 있듯이 ‘실천’(實踐)의 의미입니다. 부리가 하얀(白) 어린 새가 날개짓(羽)을 하는 모양이 이 습(習)자의 모양입니다. 이 ‘습(習)’의 의미는 배운 것을 다시 복습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배운 것을 실천함을 뜻하는 것으로 읽어야 합니다.

배운 바,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를 실천할 때 기쁜 것이지요. ‘논어’에는 이 곳 이외에도 습(習)을 실천의 의미로 읽어야할 곳이 더러 있습니다. 같은 학이편(學而篇)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도 매우 잘 알려진 것입니다.

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 不忠乎 與朋友交而 不信乎 傳不習乎(學而)

자신을 매일 3번(또는 여러 번을, 또는 3가지를) 돌이켜 본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일하되 그것이 진심이었는가를 돌이켜보고, 벗과 사귐에 있어서 불신 받을 일이 없지나 않았는지, 그리고 마지막 구절에 ‘傳不習乎’가 나옵니다만 이 경우 여러 해석이 가능합니다.

성현의 말씀(傳)을 복습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고, 잘 알지 못하는 것(不習)을 가르친다(傳)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구절을 ‘자기는 주장(傳)하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고(不習) 있지나 않는가?’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주장하나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당시에도 하나의 사회적 유형(類型)으로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장(老莊)이나 한비자(韓非子)에는 도처에 공리공담을 일삼는 부류들에 대한 비판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경우의 습(習)은 당연히 실천의 의미로 읽어야 하는 이유가 더욱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습(習)은 실천의 의미로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론과 실천이 결합될 때 기쁜 것이지요.

따라서 시(時)의 의미도 ‘때때로’가 아니라 여러 조건이 성숙한 ‘적절한 시기“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그 실천의 시점이 적절한 때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時)는 often이 아니라 timely의 의미입니다.

끝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 구절이 미치고 있는 영향이 매우 크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이 구절 전체의 음보(音譜)에 주목해보지요. 시조(時調)의 운율과 같습니다.

學而時習之에서 有朋....不亦樂乎에 이르기까지는 시조의 초장(初章)에서 중장(中章)에 이르는 부분과 같습니다. 3444의 운율이지요. 시조의 종장(終章)이 3543으로 변조(變調)가 되지요. 마찬가지로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에서도 글자 수(數)가 많아지면서 그 조(調)가 바뀝니다.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와 같은 운율입니다. 아마 시조가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논어’는 영향력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장에서 우리가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은 사회의 본질은 인간관계라는 사실입니다. 사회의 성격을 읽는 관점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동의하고 있는 많은 관점과 개념들이 있습니다. 생산관계, 통신기술, 정치제도, 문화기제 등 참으로 많은 관점과 개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개념의 바탕에 있는 것이 바로 인간관계라 믿습니다. 인간관계의 변화야말로 사회변화의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준거(準據)입니다. ‘논어’에서 우리가 귀중하게 읽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인간관계에 관한 담론입니다.

언젠가 어느 기자로부터 사회과학도로서 감명깊게 읽은 책을 소개해 달라는 질문을 받고 내가 아마 ‘자본론’과 ‘논어’를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기자가 매우 당황해하였어요. 이 두 책이 서로 너무나 이질적인 책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 두 책은 다같이 사회관계를 중심에 놓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동질적인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계급관계는 생산관계이기 이전에 인간관계이지요.

그리고 메자로스(I. Meszaros)는 진정한 ‘새로운 사회’는 자본제도(資本制度)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자본제도’의 핵심은 위계적인 사회의 노동분업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생산자에 대한 지배체제입니다.

생산자에 대한 지배가 자본주의 사회의 자본가에 의하여 행하여지든, 사회주의 사회의 권력층에 의하여 장악되든 본질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는 것이지요. 자본제도의 핵심개념이 인간관계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관계에 관한 담론을 중심으로 사회적 관점을 정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사회변혁의 문제를 장기적 재편과정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치혁명 또는 경제혁명 또는 제도혁명 등의 단기적(短期的)이고 선형적(線型的)이고 기계적(機械的)인 방법론을 반성하고 불가역적(不可逆的) 구조변혁(構造變革)의 과제를 진정으로 고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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