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신영복 고전강독 <29>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신영복 고전강독 <29>

제5강 주역(周易)-9

***3) 응(應)과 비(比)**

우선 응(應)이란 무엇인가부터 보지요. 위(位)란 것이 효와 그 자리의 관계에 관한 것인데 반하여 응(應)은 효와 효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효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를 보는 것입니다. 여섯 개의 효 중에서 1효와 4효, 2효와 5효, 3효와 6효의 음양상응(陰陽相應)관계를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괘의 1, 2, 3효와 상괘의 1, 2, 3효가 서로 음양상응관계 즉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 응(應)입니다.

주역사상에서는 위(位)보다 응(應)을 더 중요한 개념으로 칩니다. 이를테면 위(位)의 개념이 개체단위의 관계론이라면 응(應)의 개념은 개체와 개체가 이루어내는 관계론입니다. 이를테면 개체간의 관계론이지요.

그런 점에서 위(位)가 개인적 차원의 관점이라면 응(應)은 사회적 차원의 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위(失位)도 구(咎.허물)요 불응(不應)도 구(咎)이다. 그러나 실위(失位)이더라도 응(應)이면 무구(無咎)이다”고 합니다.

실위(失位)도 허물이고 불응(不應)도 허물이어서 좋을 것이 없지만 설령 어느 효가 득위(得位)를 못하였더라도 응(應)을 이루고 있다면 허물이 없다는 것이지요. 나쁜 효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위(位)보다 응(應)을 더 상위(上位)의 개념으로 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의 도처에서 직면하는 것입니다.

집이 좋은 것보다 이웃이 좋은 것이 훨씬 더 큰 복이라 하지요. 산다는 것은 곧 사람을 만나는 일이고 보면 응(應)의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직장의 개념도 바뀌어서 최근에는 직장동료들이 좋은 곳을 좋은 직장으로 칩니다.

위(位)가 소유(所有)의 개념이라면 응(應)은 접속(接續)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유를 하다가 그만 소유와 접속의 문제에 언급하게 되었습니다만 나는 제레미 리프킨의 ‘소유의 종말’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소유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접속의 시대가 열린다는 거창한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실상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앞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나 주택을 소유하기보다는 임대하여 사용하는 형태로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유의 종말’에서 전망하는 접속형태의 소비란 ‘소유의 종말’이 아니라 ‘소유의 분할’입니다. 시간적으로 분할된 소유이며 동시에 공간적으로 분할된 소유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품종 소량생산’이라는 새로운 생산방식에 조응한 ‘다품종 소량소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비단위를 더욱 작은 단위로 분할함으로써 소비영역을 확장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유의 변화라기보다는 소비패턴의 변화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후기산업사회의 소비형태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러한 소비의 변화, 소유의 변화는 물론 많은 변화를 야기할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1회 완료적인 매매는 매매성립과 동시에 매매쌍방의 관계가 종결됩니다. 남는 것은 물건과 소유자와의 관계일 뿐입니다.

그러나 접속형태에서는 지속적으로 소비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쌍방이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즉 빌려주고 빌리는 관계가 지속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위(位)를 소유에 비유하고 응(應)을 접속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소유가 완전히 종말을 고하는 단계, 즉 임대자의 소유권마저 종말을 고하고 모든 소유가 접속으로 전환된 상태로 발전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하자면 사적 소유가 존재하지 않고 국가적 소유나 협동적 소유만 존재하는 소위 사회주의적 체제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소유의 종말’이 전제하고 있다면, 그런 점에서 접속은 이를테면 사회적 개념, 사회주의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임대자의 소유가 사적 소유로 남아 있는 한 그것은 위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소비형태의 변화에 불과한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것은 후기산업사회의 변화된 소비패턴이며 보다 정교해진 마켓팅에 불과한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소유보다는 접속에 더 익숙합니다. 자동차를 구입하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소유가 아닌 접속입니다. 독선생(獨先生)을 두지 않고 학교에 다니는 것이나, 예술의 전당에서 음악감상을 하는 것도 소유가 아닌 접속입니다.

우리의 삶은 접속에 의하여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소유로부터 접속으로 전환하리라는 리프킨의 주장은 매우 새삼스러운 이야기로 들리지요.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의 삶과 정서는 기본적으로 접속과 관계를 그 토대로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아무튼 응(應)의 개념은 우리의 삶을 저변에서 지탱하는 원천적 패러다임이라는 것이지요. 응(應)은 소유의 개념과는 구별될 수 있다는 뜻이지요.

소유제도 즉 사유재산제도는 사실 다른 사람의 불행으로부터 자신을 차단할 수 있는 벽이 되기도 합니다.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호소 앞에서 더불어 살아가지 않을 수 있는 ‘자유(自由)’가 바로 이 소유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응(應)의 개념은 자본주의사회, 개인주의사회, 그리고 경쟁사회의 보편적 덕목은 아닙니다. 그러나 동양문화의 패러다임을 한 마디로 규정한다면 단연 이 응(應)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응(應) 이외에도 효와 효의 상응관계를 보는 개념으로 비(比)가 있습니다. 이 비(比)는 인접한 상하(上下) 2효의 상응관계를 보는 것입니다.

응(應)이 하괘와 상괘 간의 상응관계를 보는 것임에 비하여 이 비(比)는 인접한 두 효의 음양상응을 본다는 점에서 응(應)에 비하여 다소 그 관계의 범위가 협소합니다. 그러나 그 기본적 성격은 관계론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상에서 주역의 몇가지 관점(觀點)을 소개하였습니다만 그나마 너무 간략한 설명이었습니다. 주석서(註釋書)에 따라서는 지나치게 관념적인 해석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은 오히려 주역 이해에 더 장애가 되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우리의 고전강독강의에서는 벌써 여러 번 언급했습니다만 관계론의 재조명이라는 강의 목적의 범위 내에서 최소한의 것만을 논의하기로 하겠습니다. 그렇더라도 한 가지만 더 소개하겠습니다.

효의 명칭(名稱)에 관한 것입니다. 효가 처하는 위치 즉 아래위에 있는 효와의 관계에 따라서 그 명칭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부르는 이름마저 달라지는 것이지요. 당연히 그 성격도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음효 위에 있는 양효 즉 양재음상(陽在陰上)인 경우를 거(據)라고 하고 그 의미는 공제(控制)입니다. 다스린다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음효가 양효 아래에 있는 경우 승(承)이라 합니다. 즉 음재양하(陰在陽下)인 경우를 승(承)이라 하고 순종(從順)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같은 음효라 하더라도 그것이 양효 위에 있을 때 즉 음재양상(陰在陽上)일 때 승(乘)이라 호칭하고 그 의미를 반상(反常) 즉 역(逆)으로 읽습니다.

이상에서 간략하게 살펴본 바와 같이 주역의 독법은 철저하리만큼 관계론적입니다. 개별적 의미는 매우 협소합니다. 그것이 갖는 의미와 역할은 그 개별적 존재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망 속에서 사후적으로 규정되고 사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