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가장 꺼리는 이는 부모와 교사다. 공공연하게 떠도는 10대의 성 담론 역시 부모와 교사들에게는 ‘등잔 밑’이다. 그러나 일방적인 규제 논리나 무한 자유를 외치는 어떠한 주장도 이들 문화에 대한 교류와 이해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 프레시안은 청소년들의 문화적 코드를 기성세대들이 이해하기 위한 논의의 단초로 ‘야오이’와 ‘팬픽’이라는 낯선 영역으로 들어가 본다. 편집자
몸을 일으키려는 성훈 위로 준영이 겹쳐 올려진다.
마구 휘둘려지는 성훈의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킨다.
“더이상 니 앞에서 말 더듬이는 되고 싶진 않아”
거칠게 벗겨지는 성훈의 옷들...
침대 위로 준영의 옷들도 빠르게 내동댕이 쳐진다.
하얀 성훈의 몸 위로 겹쳐지는 준영의 몸...
성인소설처럼 보이는 이 글은 인터넷의 ‘야오이’ 사이트에 게재된 수많은 여학생 작가들 중 한 명의 글을 옮긴 것이다.
***10대 소녀들의 문화, '야오이와 팬픽'**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퀴어’(동성애)라는 이름을 건 문화적 흐름이 조금씩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홍석천의 커밍아웃, 트랜스 젠더 열풍을 일으킨 하리수의 인기는 성에 관한 사회적 금기를 깨고 공식영역을 확장시켰다. 퀴어 문화는 성(性)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시도함으로써 음지문화의 터널을 벗어나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성 담론이 균열되는 지점에서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되는 ‘야오이’‘팬픽’이라는 용어는 아직 낯설다. 어딘가 야릇한 뒷골목(?) 냄새가 나는 듯한 어감도 그렇고, 마치 누군가 장난스럽게 지어낸 신조어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10대 문화에서, 특히 여학생 문화에서 이 낯선 용어들은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평소에는 학교가야 하니까 3시간에서 4시간 정도 하구요, 방학 때는 아침에 눈뜨면 잠잘 때까지 팬픽을 보는 경우도 많아요.” 한 중학교 3학년 여학생의 말이다.
또 수도권 지역 중,고등학교를 임의로 선정, 각각 한 학급씩 설문조사를 한 결과 절반 이상의 여학생들이 야오이와 팬픽을 접한 경험이 있었다. 한 반에 5,6명은 자신을 ‘매니아’라고 인정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여성들이 즐기는 남성 동성애 만화**
70년대 후반 일본에서 태동한 ‘야오이’는 야마나시(절정 없음), 오치나시(결말 없음), 이미나시(의미 없음)의 첫 자를 따온 것으로, 내용이 없어도 좋아하는 그림만 그릴 수 있다면 만족하는 동인지계의 풍조를 자조하는 말이었다.
이때 활발한 활동을 펼친 ‘24년 패거리(24年組)’로 불리는 여성 만화가들의 만화에는 어김없이 예쁘장한 소년 주인공이 등장해 동성애를 펼쳤는데 이것이 야오이물의 시초다.
야오이는 80년대 애니메이션 패러디가 성행하면서는 남성 캐릭터들의 연애물을 가리키는 단어로 변했다. 현재는 일반적으로 ‘여성 독자를 대상으로 한 남성 동성애 소재의 만화와 소설’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서울에서 야오이 만화와 소설을 가장 많이 취급하며 만화방과 도서대여점 1천여 곳을 관리하고 있는 홍익대 근처의 한양문고. 이 서점에는 별도의 ‘야오이 코너’가 있을 정도로 야오이는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현대지능개발사의 루비코믹스, 재즈코믹스, 야컴 출판사의 야오이북스, 동산 미디어의 마인 시리즈 등이 일본 야오이 만화를 번역한 책들이다. 또 한양문고의 온라인 사이트에는 일본만화의 번역본이 대부분인 352권의 야오이 만화가 소개돼 있다.
한양문고 김기성 대표는 “전체 매출액에서 야오이 만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20~25%에 이르고 있다”며 “국내에서는 야오이물을 가장 많이 출판하는 현대지능개발사는 한달에 소설 6권, 만화 12권 정도를 낸다”고 밝혔다. 김대표는 “이보다 동인지를 중심으로 인터넷에서 음성적으로 유통되는 시장이 훨씬 클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김 대표는 “야오이 만화가 ‘19세 미만 구독 불가’ 도서로 지정되어 있지만 마음만 있으면 책대여점에서 학생들이 쉽게 빌릴 수 있다”고 밝혀 야오이물이 10대에게도 이미 익숙해 있음을 지적했다.
***팬+픽션 = 팬픽**
한편, 팬과 픽션의 합성어인 ‘팬픽’은 연예인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와 소설을 일컫는다. 원래 팬클럽 회원들이 스타를 주인공으로 재미있게 이야기를 지어내 서로 돌려가며 읽는 것이었으나 최근에는 스타 사이의 동성애를 그린 묘사를 빼면 성립될 수 없는 개념이 됐다.
실제로 HOT, GOD, 신화 등 남성 댄스 그룹의 홈페이지에는 ‘소설방’ 등의 팬픽 페이지가 마련돼 있으며, 그룹 멤버들 사이의 동성애를 다룬 소설들이 연일 창작, 유통되고 있다.
개념의 출발선이 다른 야오이와 팬픽을 하나로 매개하는 소재는 동성애, 특히 남성 동성애다. 그러나 야오이가 미소년들 사이의 동성애 묘사에 치중한 것이라면 팬픽에서의 동성애는 자신의 우상인 ‘오빠’를 ‘다른 여자’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심리에 기인한 것이다.
HOT의 열렬한 팬인 최모(16세. 중3)양은 “야오이를 보면 조금 더럽다는 생각이 드는데 팬픽은 조금 다른 느낌이 들어요. 오빠들끼리 너무 잘어울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들고, 아름답기도 하고...”라고 밝혔다.
울먹이는 칠현의 어깨를 꽉 끌어안으며 귓가에 작게 속삭인다.
'흐윽...으응...안그럴께...안아줘요..'
두팔을 벌리며 안겨오는 칠현의 등을 감싸 안는다.
그리고는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댄다.
찹찹하게 감겨오는 칠현의 혓망울을 조심스레 빨아 들였다.
'우웅....'
새빨갛게 얼굴을 물들이며 그의 목에 팔을 둘러온다..
희준의 체향이....코끝을 스쳐온다...
칠현은 자신입에서 입술을 떼려던 희준의 목을 조금더 세게 안았다.
'싫어...하아...조금만...하아...더...'
떨어지기 싫다는듯 희준의 목을 잡아 끌어..다시금 입을 맞춘다.
이제는 조금더 찐한게 그의 입술을 탐한다...'
간혹 노골적인 동성애 묘사에 치중한 팬픽 소설들은 주인공만 스타일뿐 내용과 구조면에서 야오이와 뚜렷한 차별지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동성애를 다루지 않은 팬픽도 소수 있지만 남성 연예인을 주인공으로 한 내용이 대다수이며 10대들은 이들 사이의 동성애적 관계에 몰두하는 것이다.
또 10대 팬픽 작가들은 스타를 자신들의 욕구에 따라 가공함으로써 스타와의 상상적 거리감을 좁히려한다. 신박나리(25. 연세대 문화학과 석사과정)씨는 “팬픽의 이러한 측면은 대중에 의한 맹목적 추종과 스타 이미지의 일방적 전달이라는 스타와 팬 사이의 고전적 관계를 허물고 팬들의 창조적이고 적극적인 표현의 수단”이라고 평가한다.
하나의 문화적 코드로써 야오이와 팬픽에 대한 수용과 인정의 시각이 있는 한편 동성애에 대한 지나치게 노골적인 묘사가 자칫 왜곡된 성지식을 기를 수 있다고 우려하는 이들도 있다. 미성숙 단계의 글쓰기가 여과없이 유통되는 것은 기존의 포르노물의 유통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지적이다.
이처럼 동성애를 둘러싼 다양한 사회적 담론 속에서 야오이와 팬픽 문화는 10대 여학생들의 일상과 밀접하게 맞물려 표면위로 드러나지 않은 채 영역을 확장해가고 있다. 야오이와 팬픽을 10대들의 일시적 호기심으로 접어둘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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