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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고전강독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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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고전강독 <15>

제3강 서경(書經)-1

‘시경(詩經)’에 이어서 ‘서경(書經)’의 한 편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서경은 이제(二帝. 堯,舜) 삼왕(三王. 禹왕,湯왕,文왕 또는 武왕)의 주고 받은 말을 기록한 책입니다.

물론 유가의 경전이 되기 전에는 그냥 서(書)라고 하거나 상서(尙書)라고 했습니다. 상(尙)은 상(上)의 의미로 읽어서 상고(上古)의 서(書)라는 뜻으로 읽기도 하고 또는 천자(天子) 즉 상(上)의 말씀을 사관(史官)이 기록한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중국에는 고대부터 사관에 좌우(左右) 이사(二史)가 있었는데 좌사(左史)는 왕의 언(言)을 기록하고 우사(右史)는 왕의 행(行)을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이 각각 상서(尙書)와 춘추(春秋)가 되었다고 합니다.

천자의 언행을 기록하는 동양의 이러한 전통은 매우 특징적인 것입니다. 사후(死後)의 지옥(地獄)을 설정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구속력이 강한 규제장치로 평가됩니다.

‘죽백(竹帛)에 드리우다‘는 말은 청사에 길이 남는다는 뜻입니다. 자손 대대로 그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는 것은 대단한 영예가 아닐 수 없지만 반대로 그 악명과 죄업을 기록하여 남긴다는 것은 대단한 불명예요 수치가 아닐 수 없지요.

임금의 언행을 남기는 것은 물론 후왕이 그것을 거울로 삼아 바른 정치를 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서(書)는 정(政)에 장(長)하다고 하였지요.

서(書)에는 수많은 정치적 사례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에 정통하게 되면 정치적 판단력과 역량이 뛰어나게 된다는 의미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서경,춘추와 같은 기록문화는 후대의 임금들이 참고할 수 있는 사례집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기록문화는 그 자체로서 어떠한 제도보다도 강력한 규제장치로 작용하리라는 것은 상상이 어렵지 않습니다.

이처럼 기록으로 남기는 문화전통은 농경민족의 전통이라고 합니다. 농경민족은 유한공간(有限空間)에서 반복적 경험을 쌓아 가는 문화를 만들어 냅니다.

땅이라는 유한한 공간에서 무궁한 시간의 변화를 살아가는 동안 과거의 경험이 다시 반복되는 구조를 터득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과거에 대한 기록은 매우 중요한 문화적 내용이 됩니다.

기록은 물론 자연에 대한 기록에서 시작합니다만 이러한 문화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기록으로 발전합니다. 이제 삼왕의 주고 받은 어록으로서의 서경이 탄생되는 까닭이 그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중국의 문화혁명기에 홍위병들이 붉은 표지의 모택동 어록을 흔들며 행진하는 광경을 보고 매우 의아해하던 경험이 있습니다.

당연히 마오 어록(毛澤東 語錄)으로부터 공산주의사회에서나 있을 법한 유일지배체제나 독재체제의 상징처럼 부정적 인상을 받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마오 어록은 중국의 전통에서는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중국의 전통에 이러한 기록의 문화가 있다는 것도 매우 의미있고 특징적인 것이지만 이러한 기록이 보전되고 읽혀진다는 사실이 실은 매우 희귀한 것입니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난 후에 서적을 불사르고 학자들을 매장하는 문화적 탄압, 소위 분서갱유(焚書坑儒)를 하게 되지만 그는 무엇보다 천하통일사업의 일환으로 중국의 문자를 통일합니다.

이 문자의 통일은 엄청난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고대문자와 고대기록의 해독을 가능하게 해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위치우위(余秋雨)는 그의 ‘세계문명기행’에서 시이저가 이집트를 점령하고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도서관과 ‘이집트사’를 포함한 장서 70만 권을 소각한 사실, 그리고 그로부터 4백여년 후 로마 황제가 이교(異敎)를 금지하면서 유일하게 고대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던 이집트 제사장들을 추방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 사회에서 고대문자를 해독할 능력을 인멸한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사에 있어서 기록의 의미는 훨씬 더 커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전하는 서경은 공자의 찬(撰)으로 58편인데 25편은 고문(古文) 33편은 금문(今文)입니다.

금문상서(今文尙書)는 진(秦)의 분서(焚書) 이후 한(漢)의 복생(伏生)이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문상서(古文尙書)는 전한(前漢) 경제(景帝) 때 노공왕(魯共王)의 궁실을 넓히다가 공자의 구택(舊宅) 벽에서 얻었다고 전해지는 벽경(壁經)으로서 올챙이 모양의 과두문자(蝌蚪文字)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고문은 청나라 고증학자들에 의하여 후세의 위작(僞作)으로 판명되었으며 금문상서 역시 주공(周公) 전후의 여러 편(篇)이 먼저 성립되어 가장 오랜 부분이고 그 다음에 은(殷)부분이 추가되고 그리고 하(夏), 다시 요(堯), 순(舜)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른바 ‘가상학설(加上學說)’이 일반적 견해입니다.

최초에는 주(周)왕조의 창건자인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을 중심으로 기록하였으나 유학자들이 국가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전설적인 제왕들에 관한 단편적 기록들까지 추가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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