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간의 비난과 항의가 오가는 속에서도 역사에 대한 '인식'이 아닌 유골이라는 '사실'을 공유하는 한국과 일본 그리고 자이니치(在日) 젊은이의 만남은 올 여름도 어김없이 이어졌다. 8월 18일부터 21일까지 홋카이도 중심부에 위치하는 히가시카와(東川) 마을에서 열린 '동아시아 공동 워크숍'이 그것이다.
히가시카와의 에오로시 발전소와 유수지 공사에는 식민지 시기에 징용된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가 다수 동원되었다. 당시 조선인 노동자의 유해가 방치되어 왔다는 지역 주민의 증언을 바탕으로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다. 아쉽게도 유골을 찾아내지 못했지만 참가자는 공동 작업을 벌이며 상호 이해하는 귀중한 대화를 쌓아갈 수 있었다. 홋카이도에서 조선인 강제 노동의 실태 조사와 징용자의 유골 발굴 작업을 통해 교류하는 '동아시아 공동 워크숍'은 올해로 15년째에 접어들었다.
이러한 15년의 기록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조릿대 묘표(笹の墓標)>가 최근 완성됐다. 총 5장으로 구성된 9시간이 넘는 대작이다. 그 제1장이 '슈마리나이(朱鞠内)'. 홋카이도에서도 가장 춥다고 하는 이곳이 '동아시아 공동 워크숍'의 원점임과 동시에 홋카이도에서의 조선인 강제 동원과 관련된 시민운동의 출발점이다. 그 중심에는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있다. 거기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해온 것이 도노히라 요시히코(殿平善彦) 이치죠지(一乗寺) 주지이다.
소라치(空知) 지방은 홋카이도 중서부의 내륙 지대로 최근까지 관할 구역이던 호로카나이에 슈마리나이 호수가 있다. 1943년에 우류(雨龍) 댐의 완성으로 만들어진 당시 동양 최대 인공호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홋카이도에는 탄광, 비행장, 철도, 댐 건설 현장에 14만5000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강제 동원되었다. 1970년대에는 일본 각지에서 민중사를 발굴하는 시민의 모임이 활발해지는데, 도노히라들도 1976년에 '소라치 민중사 강좌'를 설립하게 된다.
그 해 가을 우연하게 슈마리나이 호수 인근의 고겐지(光顯寺)로 안내받은 도노히라는 우류 댐 및 철도 건설 중에 희생된 노동자의 위패를 보게 된다. 사망자가 생기면 고겐지에 안치된 후 근처의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조선인 위패도 포함되어 있었다. 도노히라는 어둠으로부터 긴 시간 침묵해온 희생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이것이 슈마리나이에서 조선인 유골을 발굴하는 운동의 시작이다.
'소라치 민중사 강좌'는 당시 댐 공사에 동원됐던 재일 동포의 증언을 듣는 등 조사 활동을 벌이고 추도식도 열었다. 그리고 매장·화장 인·허가서를 입수해 유족을 찾아 나섰지만, 조선인 중 확인된 것은 14명의 이름과 본적지뿐이었다. 1970년 대 후반 유신 체제 하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본적지로 죽은 이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 달 후 7명의 유족으로부터 답장이 날아왔다.
이제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답장할 차례이다. 그런데 희생자가 공동묘지에 매장된 상태에서 답장을 보내는 것은 용납이 안됐다. 이윽고 지역 주민들의 동의를 얻은 '소라치 민중사 강좌'는 1980년에 얼룩조릿대로 뒤덮인 슈마리나이 공동묘지에서 조선인 희생자의 유골 발굴을 시작하게 된다.
이 조릿대가 강제 연행 희생자가 잠들어 있는 묘지의 표식이었다. 1983년까지 4회에 걸쳐 16구의 유골을 수습했다. 그 사이에 도노히라는 한국의 유가족을 방문하기도 했지만, 이때는 유골 봉환에 대한 논의는커녕 강제 연행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쓰라린 아픔과 원한, 그리고 봉환 절차의 어려움만 확인한 채 돌아와야 했다.
유골 봉환을 위한 실질적인 행동에 들어가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전기가 된 것이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정병호 교수와의 만남이다. 도노히라는 민주화 후의 1991년에 다시 한국을 찾게 되는데, 50여 년에 이르려 하는 세월은 때마침 불거진 한일 간의 역사 문제도 엉키면서 유골을 봉환하려는 하는 이들의 뜻을 억눌렀다. 하지만 도노히라는 동료와 함께 1992년에 2구의 유골을 안고 한국을 방문, 매스컴의 큰 관심 속에서 추도식을 거행하고 이들을 '망향의 동산'에 안치했다.
이것이 강제 연행 문제 해결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도노히라는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한다. 1995년에 해체 위기에 놓였던 고겐지를 인수하여 '조릿대 묘표 전시관'을 만들어 역사 자료관으로 유지하기로 했다. 이 전시관을 거점으로 삼아 1997년에 도노히라와 정병호 교수가 공동 대표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자이니치의 젊은이들이 유골 발굴을 통해 역사와 마주하는 '한일 공동 워크숍'(2001년 '동아시아 공동 워크숍'으로 개칭)이 시작된다.
슈마리나이를 중심으로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동아시아 공동 워크숍'이 계속되는 한편, 홋카이도에서는 또 하나의 움직임이 있었다. 2000년대 들어 혼간지(本願寺) 삿포로 별원에 101구의 강제 동원된 중국인 및 조선인 유골이 보관되어 있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사찰 측이 2002년 12월에 지금까지 유골을 방치해온 책임을 표명하는 기자 회견을 가졌다. 이것을 계기로 2003년에 시민 단체 '강제 연행·강제 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 포럼(홋카이도 포럼)'이 결성되었다. 도노히라도 공동 대표를 맡았다.
▲ 도노히라 요시히코 씨 ⓒ현무암 |
도노히라는 그해 가을에 혼간지 유골의 한 명으로 밝혀진 희생자 유가족을 방문하여 그간의 경위를 설명하고 이듬해 유가족을 삿포로에 초청했다. 2004년에는 한국에서 '일제 강점 하 강제 동원 피해 진상 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이 성립됨에 따라 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되었다. 홋카이도 포럼의 활동이 전개되자 곳곳에서 미반환 유골의 존재가 드러났다.
무로란에도 혼간지 파의 사찰에 전시기 일본제철에 강제 동원되어 미군의 함포 사격으로 희생된 3명의 유골이 보관되어 있었다. 2005년에 홋카이도 포럼은 진상규명위원회와 함께 무로란에서 조사를 벌였는데, 이것이 한국 정부의 일본에서의 첫 현장 조사였다.
또 홋카이도 포럼은 2005년에 홋카이도 북단 사루후츠촌의 일본 육군 아사지노 비행장 건설 현장에서 희생된 조선인 노동자 96구가 매장된 것으로 알려진 공동묘지에서 예비 조사를 벌였다. 2006년 '동아시아 공동 워크숍'은 여기서 이루어지는데, 이 때 수습한 12구와 2009년과 2010년의 2, 3차 조사에서 수습한 것을 합치면 유골은 총 39구에 이른다. 당초 발굴 조사에 소극적이었던 사루후츠촌 측은 상공회 청년들이 참가 의사를 표명하자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협력하게 된다.
유골 발굴은 이처럼 지역 주민과의 공동 작업이기도 하다. 이번 '동아시아 공동 워크숍'이 히가시카와에서 열린 것도 사실 지역 사회의 꾸준한 활동이 있어서 가능했다. 에오로시 발전소 공사에는 800여 명, 유수지 공사에는 1170여 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동원됐는데, 2008년에 곤도 노부오 변호사를 중심으로 이 지역의 조선인 강제 연행·동원의 역사를 발굴하는 모임이 발족됐다. 이들은 중국인·조선인을 동원하여 만든 발전소와 유수지가 있었기에 마을의 발전이 가능했다고 하여 새로 편찬되는 정사(町史)에 이러한 역사의 기술을 추진하고 있다. 히가시카와 곳곳에는 중국인 강제 동원 유적에 관련된 표식과 '망향의 비'가 있다.
워크숍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지난 해 유골 발굴 작업을 벌였던 아시베츠에서 미츠이 아시베츠 광산 조선인 희생자의 추도비 제막식이 있었다. 여기에도 아시베츠 시의 '별이 내리는 고향 백년 기념관' 하세야마 다카히로 관장의 진력이 있었다.
30여 년간 왜 유골을 발굴하는가라는 번뇌를 넘어 유골의 목소리에 응답해온 도노히라와 '소라치 민중사 강좌'. 이들이 주도하는 홋카이도에서의 공동 작업은 유골과 대면하는 사람들의 감정이 가지각색이어서 하나의 '커다란 기억'으로 수렴되지는 않아도, 역사를 둘러싼 대립에도 아랑곳없이 유골이라는 '사실'을 통해 '사자의 전언'을 묵묵히 전하고 있다.
<프레시안>은 동아시아를 깊고 넓게 보는 시각으로 유명한 서남재단의 <서남포럼 뉴스레터>에 실린 칼럼 등을 매주 두 차례 동시 게재합니다. 현무암 홋카이도 대학원 준교수(미디어커뮤니케이션 연구원)의 이 글은 <서남포럼 뉴스레터> 196호에 실린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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