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램을 보는 동안 제대로 웃은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쉽게 채널을 돌리지 못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개그맨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리허설하는 장면이 나왔다. 갑자기 멍해졌다. 어쩌면 30초도 안 되는 그 찰나의 순간을 위해 <개콘 특집>을 봤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설 특집에 이어 두 번째로 방영되는 <개콘 특집>은 그동안 통편집 혹은 조기 폐지된 코너를 다시 보여주는 코너 소생 프로젝트다. '망작' 코너를 보여준 뒤 출연자를 소환해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어본다. 선배 박성호와 김준호가 코너 하나씩을 선택한 뒤 시청자 투표를 거쳐 재녹화 코너를 정한다. <개콘 특집>은 단순히 실패한 코너를 보여주고 개그맨들을 놀리기 위한 프로그램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정말 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직접 코너를 짠 개그맨들을 불러 코너 제작 과정을 들어보는 건, '당신이 보기엔 정말 재미없는 코너지만 우린 이만큼 힘들게 만들어요', '선배들과 함께 다시 잘 만들어 볼 테니 제발 한 번만 다시 봐 주세요'라는 그들의 마지막 호소를 들려주기 위함이다. 관객들의 반응과는 별개로, 개그맨들은 자신이 만든 코너를 자식처럼 여기며 절박하게 방송을 원하고 있다.
▲ 추석 특집 <당신이 한 번도 보지 못한 개그콘서트> 다시 보고 싶은 코너 설문 페이지. ⓒKBS |
절박함은 근성의 다른 표현이다. 여군을 소재로 한 '군대 온 Girl'만 봐도 그렇다. 단순히 예쁜 척하는 여군 캐릭터는 공감을 사기 어려울 뿐더러, 코너의 강력한 웃음 포인트도 없었다. "소재는 좋은데 내용이 썩었다"는 김준호의 혹평이 표현은 다소 과격할지 몰라도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코너를 짠 개그맨들은 이 코너를 2년 동안이나 놓지 못했다. 심지어 지난 설 특집 때도 보류한 코너다. 재미 여부를 떠나 개그맨들에게 자신이 직접 만든 코너란 그만큼 애틋한 존재다.
코너가 빛을 보지 못하니 자신의 존재를 알릴 기회가 없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이날 방송에는 정태호, 허경환, 김기리 등 한 번쯤 전성기 시절이 있었던 개그맨들도 출연했지만 심사위원 윤종신으로부터 일반인 대접을 받는 무명 개그맨도 등장했다. "저랑 동기입니다"라는 김기리를 향해 씁쓸한 미소를 짓는 개그맨 김장군, 이날 방송된 6개 코너 중 2개의 코너에 출연했지만 모두 통편집 당한 개그우먼 허안나. 그들의 절박함이야말로 '당신이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윤종신이 재미를 위한 심사평을 했다면, 누구보다 후배들의 심정을 잘 아는 박성호와 김준호는 장난기 다분하면서도 날카로운 평가를 한다. '메이킹 우먼쇼'에서 관객들이 웃은 이유는 "개그가 아니라 허안나의 오버 연기 때문"이었다며 후배들의 자만을 경계한다. '군대 온 Girl' 평가 때는 개그를 짜는 순서와 웃음 배분에 대해 말한다. 김준호는 "웃긴 건 한 사람에게 몰아줘야 한다. 그런데 다 나눠 준다"고 했고, 박성호는 "시동, 시동, 강한 시동만 걸고 가속을 밟아줄 사람이 없다"고 평했다. 주인공 좀비에게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코너 '월드 워 좀비'에 대해서는 "독서하는 좀비, 까칠한 좀비 등 캐릭터를 부여하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개콘 특집>이 'NG 모음'처럼 한 번 보고 끝나는 특집이 아닌 이유는, 선배 박성호와 김준호의 투입 덕분이다. 이날 방송된 코너들은 이미 후배들의 손에서 몇 번의 실패를 겪은 코너다. 이번 특집부터 관록이 쌓인 선배들을 개입시키겠다는 건, 재미없다는 이유로 사망 선고를 내리지 않고 어떻게든 부활시켜 이끌고 가겠다는 뚝심인 것이다. 박성호는 '군대 온 Girl'에, 김준호는 '월드 워 좀비'에 합류하기로 했다.
지난 설 특집 때 '버티코' 코너로 부활한 무명 개그맨 김장군은 "이런 특집이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대선배 김대희는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건 계속 새 코너를 구상했다는 뜻이기 때문에 자랑스럽다"는 소감을 전한다. 이토록 재미없고 '웃픈' <개콘 특집>이 계속돼야 하고 이를 꾸준히 시청해야 하는 이유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