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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단의 역설, 금식 기간에 음식 가격은 폭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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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단의 역설, 금식 기간에 음식 가격은 폭등

[서남 동아시아 통신] 음식 천국 수마트라의 라마단 풍경

2009년 CNN 여행 정보 사이트에서 조사한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 1위로 인도네시아의 렌당(Rendang)이 선정되었다. 렌당은 기름기 없는 소고기를 주재료로 하여 코코넛 밀크, 강황, 레몬그라스 등 다양한 향신료와 영양가 높은 재료를 듬뿍 넣어 서너 시간 이상 푹 끓여서 만드는 향긋한 보양식으로 서부 수마트라의 파당(Padang) 요리를 대표한다.

미낭카바우 족이 많이 사는 파당, 부킷팅기 등 서부 수마트라 지역은 비옥하고 기후가 좋아 1년에 3~4모작이 가능하고 다양한 칠리와 향신료가 풍부하게 생산될 뿐 아니라 무역의 중심지로 동서양의 문화가 교차하는 등 음식 문화가 발달하기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두루 갖췄다.

한편, 미낭카바우 남자들은 지식, 경험, 일자리를 얻기 위해 집을 떠나 더 넓은 세계를 여행하는 '머란타우(merantau)' 전통이 있는데, 렌당은 먼 길 떠나는 아들과 남편을 위해 미낭카바우 여성들이 정성스럽게 준비하는 '어머니의 음식'이기도 하다. 소뿔 모양의 독특한 지붕을 올린 파당 음식점에서는 수십 가지 반찬을 한꺼번에 늘어놓고 오감을 동원해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어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인기가 높다.

▲ 2009년 CNN에서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요리로 선정된 렌당(왼쪽)과 미낭카바우 양념 시장(오른쪽). ⓒ김이재

수마트라의 주도, 메단 역시 음식 천국이다. 말레이계·인도계·아랍계 문화가 경합하는 가운데 다양한 음식 문화가 발달했고, 수마트라의 풍요로운 열대 기후 지역에서 생산되는 신선한 음식 재료가 강점이다.

특히 삐죽삐죽한 가시를 지닌 두리안은 동남아를 대표하는 과일의 왕으로 불리며 현지 사람들에게 사랑과 행복의 상징으로 각광받는데, "빅 두리안"으로 불리는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에서도 가장 맛있는 두리안으로 '메단' 두리안이 꼽힌다. 메단이 두리안으로 유명한 이유는 인근의 청정한 수마트라 정글에서 자연의 기운을 듬뿍 받고 자란, 영양가 높고 맛있는 야생의 두리안이 집결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메단 시내에서는 연중 신선한 두리안을 저렴한 가격에 맛볼 수 있는데, 품종 개량을 거쳐 인공적으로 대량 재배되어 맛과 향이 떨어지는 태국·말레이시아 두리안과는 차별화되는 최상급 두리안이다.

▲ 수마트라 정글에서 생산되는 신선한 메단 두리안. ⓒ김이재

한편, 라마단은 전 세계의 무슬림들이 반드시 지켜야 금식월이고, 매년 라마단 시기는 조금씩 바뀐다. 7월 8일부터 8월 7일까지 약 한 달간 계속된 2013년 라마단 시즌은 북반구 거주 무슬림에게는 매우 힘든 해였는데, 특히 여름에는 백야 현상까지 나타날 정도로 낮이 긴 영국, 핀란드, 노르웨이 등 북반구 고위도 지역 무슬림에게는 뙤약볕을 견디고 장시간 금식을 해야 하는 한여름 라마단이 매우 고통스럽게 느껴진다고 한다. 반면 적도에 위치하여 연중 일정한 시간에 해가 뜨고 지는 인도네시아에서는 라마단 시기가 바뀌더라도 하루 중 금식을 해야 하는 시간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아 금식을 하기가 훨씬 수월한 편이다.

라마단 기간 동안에는 가급적 인도네시아를 여행하지 말라고 서구의 관광 안내 책자에서 충고하지만, 수마트라의 라마단 풍경은 인도네시아를 자주 여행한 나에게도 특별한 경험이었다.

세계 최대의 무슬림 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도 독실한 무슬림이 많기로 유명한 수마트라에서 라마단은 고통의 계절이라기보다는 즐거운 축제가 되어 가고 있었다. 평소에는 아침 6시 이후에나 먹을 수 있는 호텔 조식이 해가 뜨면 음식을 먹을 수 없는 무슬림 투숙객을 위해 새벽 3시부터 푸짐한 뷔페식으로 제공되었다.

비록 현지인을 대상으로 하는 식당은 모두 낮에 문을 닫았지만 평소와 다름없이 음식을 파는 중국계 레스토랑과 서구식 패스트푸드점도 많아 여행자로서 음식에 대한 불편함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낮에 다니는 사람과 차가 줄어 교통 체증이 사라지는 마법의 시간이었다. 심지어 두세 시간 지연되는 것이 보통이었던 인도네시아 국내선 항공기도 정시에 운항되었고, 항공사들은 '금식을 깨는(Buka Puasa)' 시간을 축하하기 위해 빵과 음료수를 공항에서 무료로 나눠주기도 했다.

▲ 음식을 무료로 나눠주는 공항의 라마단 풍경. ⓒ김이재

라마단 기간 동안 저녁 6시경이 되면 사람들은 어디론가 바쁘게 이동하고, 해가 지고 어두워지면 거리의 상점과 레스토랑은 화려하게 피어난다. 특히 메단에서 가장 큰 모스크 주변 야외 식당은 일찌감치 좋은 테이블을 차지하고 음식을 미리 주문해 놓고 기다리는 사람들로 장관을 이룬다.

금식을 깨는 신호인 아랍어 기도문이 확성기를 통해 모스크에서 흘러나오면 수천 명이 일제히 즐거운 표정을 짓고 차려놓은 음식을 허겁지겁 먹기 시작한다. 비록 술은 없지만 음식과 대화가 계속 이어지는 행복한 만찬은 밤늦게까지 계속되고, 메단의 특산물이자 사랑의 묘약인 두리안 케이크를 팔러 다니는 소년들의 발걸음도 빨라진다.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가족, 친지, 친구, 연인끼리 풍성하고 화려한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문화가 확산되고 그동안 챙기지 못한 인간관계를 돈독히 하는 문화가 형성되면서, 기업체에게는 라마단 특수가 새로운 마케팅의 기회로 활용되고 있었다.

가장은 집에 일찍 들어와 가족들과 음식을 나눠 먹으며 오붓한 시간을 갖고, 젊은이들은 친구나 연인을 만나 외식을 즐기고 선물을 주고받는 등 행복한 추억을 만드는 명절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백화점과 쇼핑센터에서는 라마단 특별 세일이 한창인 가운데, 고급 호텔에서는 터키식 저녁 뷔페까지 등장했다.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공주처럼 곱게 차려입은 호텔 종업원이 저녁 시중을 들고 중동의 고급스러운 실내 장식이 축제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 고급 호텔의 터키식 저녁 뷔페와 터키 전통 복장을 입은 종업원. ⓒ김이재

그 결과 라마단이 시작되면 음식 재료 가격이 급등하는, '라마단 인플레이션' 현상이 인도네시아에서 매년 발생하여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이론적으로는 무슬림들이 라마단 기간 동안 금식을 하니 음식 소비량이 감소해야 하는데, 오히려 음식 소비가 급증하여 물가가 가파르게 상승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7월 초 라마단이 시작되자 달걀, 설탕, 밀가루, 닭고기 가격이 전월에 비해 30%가량 급등하였고, 라마단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더 배고프고 힘든 가혹한 시기가 되는 뜻밖의 부작용이 발생했다.

'금식을 통해 몸과 마음을 정화하여 신에게 좀 더 가까이 가고 가난한 이웃의 심정을 이해하며 고통을 나눈다'는 라마단의 종교적 의미가 무색해지는 난감한 상황이다.

유명 정치인의 포스터나 플래카드가 유난히 눈에 많이 뜨이는 올 인도네시아 라마단은 2014년 총선을 대비하는 정치인들에게는 선거 캠페인의 신호탄 같다. 매일 저녁 벌어지는 만찬에 참석하여 얼굴을 알리고 자신의 선행과 기부를 적극 홍보함으로써 대중에게 좋은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기회로 삼느라 정신없이 바쁜 것이다.

음식 천국 수마트라에서는 금욕적인 종교 행사인 라마단이 사랑과 행복의 축제, 먹는 즐거움을 극대화하는 명절, 세속적인 욕심과 야망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다.

<프레시안>은 동아시아를 깊고 넓게 보는 시각으로 유명한 서남재단의 <서남포럼 뉴스레터>에 실린 칼럼 등을 매주 두 차례 동시 게재합니다. 문화지리학자 김이재 경인교육대학교 교수의 이 글은 <서남포럼 뉴스레터> 195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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