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과 "왜 우리는 테드 창을 사랑하는가"를 주제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테드 창은 사실 한국에서 인기를 끌 것 같지 않은 작가다. 작품이 많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장편을 쓴 적도 없고, 그의 소설이 그렇게 읽기 쉬운 것도 아니다. 실제로 이번 소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북스피어 펴냄)는 그의 단편집 한 권이 국내에 소개된 지 무려 10년 만에 나왔다. 그것도 장편이 아닌 중편 하나.
▲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북스피어 펴냄). ⓒ북스피어 |
문학에 장르의 구분이 있기는 하지만 작품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사실 딱 들어맞는 기준은 없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막연히 생각하면 확연한 것 같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을 앞에 두고 보면 복잡한 면이 보이는 것과 비슷하다. 통계적인 차이는 있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남자와 여자는 '중성적'이다. 문학도 그렇다.
테드 창은 여자로 치면 '참 여성다운' 여성이면서, 세상이 여자에게 갖는 온갖 편견에 저항할 만한 가치를 잔뜩 갖고 있는 여성인 셈이다. 다시 말하면, 과학소설 팬으로서 자랑하고 뿌듯해할 만한 작가다. 취미생활을 하는데 꼭 자랑스럽고 뿌듯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사랑스러운 것은 또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글자 수당 가장 많은 상을 탄 작가라는 외적인 요인을 제외하고도, 그의 작품에는 SF에서만 볼 수 있는 가치를 잔뜩 갖고 있다. '지옥은 신의 부재'(<당신 인생의 이야기>(김상훈 옮김, 행복한 책읽기 펴냄) 수록작)라는 단편을 보자. 이 소설의 전제는 '신은 자비롭지도 잔인하지도 않고, 그저 존재한다'는 것이다. 신이 누군가에게는 행복을 주고 누군가에게는 불행을 주는데, 원칙도 없고 공정하지도 않다. 그렇다면 천국과 지옥의 차이는 뭐란 말인가? 이 작품의 결론은 '지옥에는 신이 없다. 그래서 지옥이다'이다. 그게 전부다. 그게 전부이기에 독자는 다시 무한한 사유에 빠져든다. 그 점 때문에 그 단편은 과학적이지 않은데도 과학소설로 분류된다. 소설의 중심점이 지적 유희와 사고실험에 있고, 하나의 질문을 던지고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답을 제시함과 동시에 독자에게 무수히 사유할 거리를 던지기 때문이다.
1. 인공지능 엘리자
1966년, 컴퓨터 공학 교수 요제프 바이첸바움(Joseph Weizenbaum, 1923~2008)은 병원 의사들의 대화법을 참조해 간단한 대화 프로그램을 만든다. 그는 이 프로그램에 '엘리자'라는 이름을 붙이고 상담 선생님이라며 병원 환자들에게 소개한다. 어쩌면 그는 환자들이 재미있어 하며 "이 프로그램 제법 사람 같네요. 잘 만들었어요"하고 칭찬해주는 정도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환자들의 반응은 그의 예상을 한참 뛰어넘는 것이었다. 병원에는 훌륭한 상담 선생님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고, 환자들은 '그 위대한 엘리자 선생님'과 대화하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감동하는 사람까지 등장한다. 당황한 요제프가 엘리자가 사람이 아니라 기계라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 결과에 그는 기쁨이나 자부심보다는 두려움을 느꼈던 것 같다. 그는 이후에 거꾸로 인공지능 비판론자로 돌아섰고, 컴퓨터와 기계문명을 경고하는 일에 앞장서게 된다.
엘리자는 여기(☞바로가기)에 늘 있으니 관심 있는 사람은 한 번 대화를 나누어보자. 물론 영어다.
엘리자의 대화를 면밀히 뜯어보면 딱히 달변이거나 어려운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상대의 말을 반복하거나, 키워드를 찾아내서 그에 대해 질문하고, '말없이 들어준다.'
기분이 안 좋아요.
: 기분이 안 좋아서 오셨나요?
친구와 문제가 있어요.
: 친구와 문제가 있군요.
친구가 나를 좋아하지 않아요.
: 그게 고민이 되시나요?
네. 어제도 싸웠어요.
: 조금 더 자세히 말해주시겠어요?
설교하거나 핀잔하거나 해결책을 내려고 하지 않고, 가만히 들어주기. 사실상 '부부싸움을 하지 않는 법', '연인과 싸우지 않는 대화법'에 오랜 세월 정석으로 알려진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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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는 튜링테스트를 기반으로 하는 뢰브너 상 동메달을 여러 차례 수상한 아가씨다. 튜링 테스트는 앨런 튜링이 1950년에 제안한 것으로, 기계에 지능이 있는가를 판별하는 시험이다. 이 시험의 전제는 "만약 인공지능과 사람의 반응을 구분할 수 없다면 인공지능은 생각을 한다고 볼 수 있다"이다.
물론 이 전제에는 비판이 있다. 구글 사전이 중국어를 번역해준다고 해서 구글이 중국어를 이해한다고 볼 수 있는가? 그 디지털 개체가 정말 생각을 하는가 아닌가, 지성이나 자아가 있는가 없는가는 좀 더 복잡한 방법으로 검사해야 하지 않은가? 이를테면……. 하지만 우리는 그 이를테면…… 에서 말문이 막히게 된다.
앨런 튜링은 훌륭한 공학자이자 또한 철학자였던 모양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그 뒤를 이을 수가 없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자신 이외의 그 어떤 존재도' 지성이나 자아를 갖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어떤 생명체든 자신의 자아 이외에는 인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과학이 얼마나 발전하든 소용이 없다. 인간이 감각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한. 그래서 데카르트도 '내가 생각을 하니 최소한 나는 존재하는데 다른 건 모르겠네'라고 하지 않았던가.
▲ <당신 인생의 이야기>(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행복한책읽기 펴냄). ⓒ행복한책읽기 |
여기까지 오면 재미있는 점이 보인다. 엘리자가 훌륭한 프로그램이기는 하지만 튜링 테스트를 통과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사람으로 착각할 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환자들은 엘리자가 기계라는 것을 안 뒤에도 대화를 멈추지 않았다. 하다못해 동료 개발자조차도(도대체 엘리자가 기계라는 것을 의심할 수도 없는 사람이) 엘리자와의 대화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상담 기법에 '공(空)하게 본다'는 것이 있다. 사람이 고통을 받는 것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가치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세상이 규정한 틀에 억지로 맞추기 때문에 오는 것이며, 또한 사람이 사람을 제 편견과 깜냥으로 재단하며 보기 때문에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그 어떤 편견도 판단도 없이 공(空)하게 사람을 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치유된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상담이란 상담을 받으러 온 사람이 아닌 상담자를 치료하는 과정이라고도 한다.
기계는 편견이 없다. 사람을 재단하거나 판단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기계야말로 완벽하게 공(空)하게 인간을 볼 수 있는 존재로, 완전무결한 상담자가 아닐까?
최근에는 자폐인들이 로봇을 통해 소통과 사회성을 배울 수 있다는 사례연구가 등장해 연구가 진행 중이다. 사람의 반응은 자폐인에게는 지나치게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하지만, 로봇의 반응은 규칙이 있고 예측가능하고 또 간단하면서도, 지치고 화내는 일 없이 착실하게 상호작용을 해 준다.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던 자폐인들이 로봇의 눈은 마주할 수 있고, 사람의 표정을 이해하지 못했던 자폐인들이 로봇의 표정은 이해한다는 결과가 속속 등장하는 중이다.
로봇이 사람에게 소통을 가르쳐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생명인가 아닌가, 자아가 있는가 없는가, 더 나아가서 사람을 닮았는가 닮지 않았는가에 그렇게 큰 의미가 있을까?
2. 디지털 존재의 죽음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샤이닝 로어'라는 온라인 게임이 있었다. 2002년 서비스를 시작해서 2003년 중지했다.
나는 그때까지 생물이 아닌 사물이 그런 식으로 '소멸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책이 절판되거나 음반 판매가 중지된다 해도 해도 세상에 한 번 나온 것은 누군가의 서가나 상자 속에 남아 있기 마련이다. 사물이 소멸하는 것은 길고 긴 역사 속에서 몇 개 남지 않은 골동품이 관리 부실이나 화재로 사라질 때 정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시스템이 등장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관여한 존재가 그토록 쉽게 사라지게 되었다.
그 게임 속의 풍경은 작은 종말의 풍경과도 같았다. 서비스가 중단된다는 사실에 처음에 주민들은 저항하고 거부했지만, 결국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에는 모든 이기심을 버리고 성자처럼 살았다. 거리에는 부자와 영웅들이 뿌린 재산이 넘쳐났고, 새로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모두가 모여들어 물건과 장비를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아낌없이 창고를 개방하고 가진 것을 내놓았다. 광장에는 초보자가 꿈도 못 꿀 비싼 장비며 아이템이 아낌없이 내버려져 있었다. 마지막 몇 시간 동안 세상은 자비와 기부의 해일로 넘쳐났다.
2000년 무렵 게임 개발자들은 자의든 타의든 온라인 게임 개발의 세계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당시 게임 개발자들이 온라인 게임에 대해 아는 바는 유저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우리들이 도달한 세계는 지금까지처럼 창조자가 시작과 결말을 아는 세계가 아니었다. 온라인 게임은 작은 복잡계나 다름이 없었다. 수치 하나를 바꾸면 삶의 패턴 전체가 변했다.
이를테면 개발자의 실수로 어느 지역에 몬스터가 많이 모이게 되었다면, 그곳은 어느 시점에서 초보자들이 자연스레 순례하는 곳이 되고, 지역에 이름이 붙고 사람들이 사랑하는 곳이 된다. 공략이 생겨나고 가르쳐주고 안내하는 선생님이 생겨난다. 그쯤 되면 설사 실수로 넣은 것이라 해도 건드릴 도리가 없게 된다.
아이템을 유료로 파는 혁명적인 과금 방식이 나오기 전까지, 초창기 온라인 게임들은 대부분 베타테스트 시절에 인기를 끌다가 유료화 이후 급격히 사람들이 빠져나가며 사장되는 것이 일반적인 수순이었다. 진짜 문제는 세계의 인구가 줄어들면 베타 테스트 시절에 기를 쓰고 맞춰놓은 세계 전체의 균형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인구가 변하면 공간이 변해야 했다. 집을 작게 줄이거나 더 가까운 지역에 새 가게가 생겨야 했다. 거리는 더 가까워져야 했고 광장은 더 줄어야 했고, 마을 숫자도 변해야 했다. 그것이 현실의 세계였다면 사람들이 스스로 공간을 바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기 때문에 개발자가 그 작업을 해야 했고, 사실상 게임을 새로 재단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문제를 알아차리는 것은 실제로 그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 먼저였고 개발자가 다음이고, 경영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도 없었다.
그쯤 되면 그 게임을 창조한 것은 우리일까, 아니면 그 게임 안에 사는 사람들일까, 아니면 계 전체가 독립적인 생명을 얻은 것일까?
▲ SF 작가 테드 창. ⓒ프레시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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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는 데에 그것이 꼭 사람일 필요는 있을까? 번식이 가능한 난자와 정자를 갖춘 성인 이성일 필요를 넘어서서, 하다못해, 생명일 필요는 있을까?
자아를 가지거나 지능이 있을 필요는 있을까? 우리가 이미 어렵게 구한 책이나 열심히 골라 산 옷이나 가방, 게임 소프트와 블루레이 디스크에도 사랑을 바치는데 말이다.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했던 오래된 교훈대로,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는 것은 그것에 바친 시간 때문이다.
우리는 늘 걸었던 마을길이며, 골목이며, 등하교를 하며 지나며 보았던 담벼락이며 돌멩이 같은 것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사라졌을 때 마치 내 친구나 나 자신의 한 부분이 사라진 것 같은 슬픔을 느낀다.
애초에 생명과 사물의 구분이 있기는 한 것일까? 우리는 언제나 살아있는 것을 사랑하듯이 사물을 사랑해왔다. 우리들은 어린 시절부터 엄마와 고양이와 인형을 구분 없이 사랑해왔다. 그것이 이상한 일이거나 사람의 본성을 벗어나는 일이라면 어째서 그토록 보편적이고 자연스럽단 말인가?
3.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
이 책은 내게 이런 모든 것들을 떠올리게 한다. 차마 다 적지도 못할 내 생애에 스쳐갔던 수많은 사물과의 교류를, 내 생에서 그들이 얼마나 소중했는가를.
문학과 예술 속에서 기계와 인간의 교류는 1920년 카렐 차펙의 희곡 <로섬의 만능로봇(R.U.R - Rossum's Universal Robots)> 에서 '로봇'이라는 말이 등장한 이래 수많은 과학소설, 만화, 영화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등장했다. "로봇에게도 인권이 있다"는 전제를 기본으로 깔고 시작하는 데스카 오사무의 <우주소년 아톰>을 굳이 예로 들지 않더라도, 기계생명체가 등장하는 무수한 작품들은 대개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소설 <바이센테니얼 맨>(이영 옮김, 좋은벗 펴냄)에서는 한 로봇이 인간화되어가고 인간으로서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탐구한다.
차이가 있다면, 이 선구적인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인공지능이나 기계생명체들은 이미 튜링 테스트는 몇 번쯤 통과했을 것처럼 완벽한 지성체로 사고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거기까지 갔다면 그들을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것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에 등장하는 디지털 존재 '디지언트'가 자아를 갖고 있는가는 이 작품 속에서 애초에 고려대상이 아니다. 디지언트가 주인에게 "나를 정지시키지 말아 줘"라고 말한다 한들 그것이 프로그램된 반응인지, 생각해서 하는 말인지 알 도리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에게 "나를 사랑해 줘"라고 말할 때 그것이 내 자유의지인지, 유전자의 자기보존 욕구인지, 신의 프로그램인지, 학습된 자동 반응인지 구분할 방법은 있겠는가.)
소설의 중심점은 인공지능이 생명인가 아닌가도 아니며, 기계에서 생명이 탄생할 수 있는가의 문제도 아니며, 인공지능 발달사 고찰도 아니다. 오히려 매해 기후가 바뀌는 생태계마냥 끊임없이 격변하는 IT업계에서 디지털 존재가 그 존재를 사멸하지 않고 생을 유지할 수 있는가 마는가의 문제며, 누구도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소중한 목숨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어디까지 희생과 투쟁을 할 것인가의 문제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인생에서 소중한 무엇인가를 떠올릴 것이다. 집에서 기르는 애완동물을 떠올릴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이사를 가거나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갖거나, 생활이 조금이라도 자리를 이동하게 되었을 때, '그거 안 버려?' '누구 안 줘?'하며 내 가족을 '물건' 취급하는 사람들로부터 그들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가를.
별 것 아닌 컴퓨터 데이터에서 돌아가지도 않는 게임 세이브 파일, 절판된 책과 게임들, 조금 더 공간을 넓히면 마을에 있는 오래된 돌멩이나 길이며 담벼락의 벽화나 나무 하나에 이르기까지, 나 이외에는 그 가치를 모르는 그 소중한 존재들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는가.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를 보는 이들은 저마다의 회상에 빠져들며, 이 작가가 지적이며 과학적인 사유를 통해 '아, 그럼, 그 감정은 가치가 있고말고. 과학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의미가 있어. 합리적이고 어른스러운 일이지' 하며 어루만져주고 위로해 주는 듯한 기분에 빠져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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