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 4년차. tvN <막돼먹은 영애씨 12>의 직장생활 12년차 영애(김현숙)에 비하면 아직 사회초년생이지만, 시즌이 거듭될수록 영애의 연애보다 오피스라이프에 더 몰입할 수밖에 없다. <막돼먹은 영애씨> 첫 시즌이 방송되던 대학생 시절, 쓰레기봉투로 동네 변태를 처치하는 영애의 당당한 모습만 눈에 들어왔다. 직장 상사, 동료들에게 구박받고 성희롱 당하면서도 시원하게 사표 한 번 내지 못하는 영애의 서러움을 이해는 했지만, 마음에 와닿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 tvN 다큐드라마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 12>. ⓒtvN |
<막돼먹은 영애씨 12>의 영애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처지다. 파혼을 당했고, 회사 후배에게 돈을 뜯겼고, "못 생기고 뚱뚱해서" 젊은 사장과 엮일 리 없다는 이유로 새로운 회사에 취직했다. 직장생활 12년차에 평사원으로 이직했다. 이전 직장의 월급 수준을 받으면서도 눈치 보기 바쁘다. 이제 외모 차별하는 상사는 기본 옵션이다. 뿌리 깊은 자격지심과 길고 긴 뒤끝을 장착한 여자 상사(라미란 과장)마저 영애를 괴롭힌다.
디자이너로 채용된 것인지 가사도우미로 채용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점심 반찬준비, 설거지, 화장실 청소, 옥상 텃밭 물주기, 걸레 빨기까지 경력 12년차 영애의 주된 일은 디자인보다 잡무다. 심지어 어린 놈과 싸우다 찢어진 사장의 와이셔츠 바느질까지 한다. 차라리 '아름다운 사람들' 회사에서 정수기 물통을 옮기던 시절이 백배는 나았다. 치사해도,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을 생각하면 무조건 참아야 한다. 그래야 쥐꼬리만 한 생활비라도 엄마한테 드릴 수 있으니까.
그런데 참 이상하다. '대머리 독수리' 사장보다 더 영애를 괴롭히는 라미란 과장이 마냥 얄밉게 느껴지지 않는다. 차라리 딱하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영애와 동갑인데다 경력도 고작 1년밖에 차이나지 않는 라 과장은 스스로를 '하우스 푸어'라 부른다. 욕심내서 대출을 받아 산 집은 반값으로 떨어졌고, 매달 받는 월급 205만 원은 대출원금과 이자를 갚느라 "한 번 만져보지도 못하고" 사라진다. 기분이 좋으면 영애에게 공짜 생리대와 찜질방 반값 할인 쿠폰을 주지만, 조금이라도 자존심이 상하면 "누가 자기 맘대로 싱크대랑 냉장고 청소하래? 내가 우스워?"라고 뻔뻔하게 얼굴을 바꾼다.
절대 나의 상사로 두고 싶지 않은 라미란 과장의 초췌한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딱한 마음이 든다. 고작 3만원 오른 월급에 콧노래를 부르고 남편에게 전화해 "치킨 두 마리는 안 되고 한 마리는 쏠게"라고 말하는 라미란 과장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불쌍하기까지 하다. 커피숍에서 공짜로 받은 생리대 덕분에 결혼 후 생리대를 한 번도 사본 적이 없는 그의 모습은 아등바등 살아가는 워킹맘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고생 끝에 낙이 오는 것이 아니라 고생 끝에 더 큰 고생이 온다"는 <막돼먹은 영애씨> 식의 명언은 비단 영애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 것이다. '낙원종합인쇄사'에 다니는 모든 직장인들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막돼먹은 영애씨>가 시즌 12까지 오면서 매번 새로운 이야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사내 연애도 할 만큼 했고, 진상도 보여줄 만큼 보여줬다. 이번 시즌에서 윤 과장을 제외하고는 영애의 직장 동료들이 모두 바뀌었지만, 얼굴만 바뀌었을 뿐 환경은 변하지 않았다. 영애는 '덩어리' 대신 '영자'라는 별명을 얻었고, 라미란 과장이 떠넘긴 디자인을 마무리하느라 야근을 한다. 그래도 영애는 끝까지 살아남을 것이다. 강한 자가 오래가는 것이 아니라 오래가는 사람이 강한 것이니까. <막돼먹은 영애씨> 시리즈가 7년 동안 살아남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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