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로 쓰인 작품을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며 우리는 그것을 어떤 식으로 소비하는가? 외국어와 한국어 사이의 일대일 관계를 뛰어넘는 그 이상의 창작은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외국어의 해석과 그것을 한국어로 옮기는 창작(우리는 이렇게 표현하기로 했다) 사이의 장벽은 얼마나 높은 걸까?
움베르토 에코, 베르나르 베르베르, 미셸 우엘벡 등의 작품을 옮기며 지극한 단정함과 아름다운 문장을 결코 놓치지 않는 이세욱, 레이먼드 챈들러와 존 르 카레, 트루먼 카포티 등의 작품을 통해 현대 장르소설에 뛰어난 감각을 발휘하는 박현주, 리처드 도킨스와 스티븐 제이 굴드 등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과학자들의 화제작을 유려하고 편안하게 옮기는 김명남. 세 사람의 번역가는 모두 번역계에서 뚜렷한 자기 세계를 유지하며 편집자와 독자 양쪽 모두에게 큰 신뢰를 받고 있다. '프레시안 books'는 창간 3주년 특집을 맞아, 이 세 명의 번역가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아 위의 질문들과 더불어, 번역 작업의 행복과 고통, 자의식과 선입견 등을 꼬치꼬치 캐물어보았다. <편집자>
▲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번역가 박현주, 김명남, 이세욱. ⓒ프레시안(손문상) |
프레시안 : 먼저 어떤 계기로 번역을 업으로 삼게 되었는지 듣고 싶다.
이세욱 :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열린책들 펴냄)로 번역을 시작한 게 1992년이다. 누구나 그렇듯 처음부터 번역자가 되려고 대학에 간 건 아니지만, 아르바이트로 몇 번 하면서부터 번역과 어느 정도 친해지게 됐다. 그러다 삶의 어떤 시기에 '내가 무엇을 잘 할 수 있는가'를 묻게 되었고, 리스트를 쭉 만들어 보니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 겹치는 분야가 번역이었다. 그길로 이론을 공부하고 자기소개서를 돌리고, 몇 번 고배를 들이켰다가 어느 너그러운 출판사 사장을 만나서 이 일을 시작했다.
그동안 그만둘 기회는 숱하게 많았다. 다른 분야에서 유혹도 있었고.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 일을 놓지 않았던 건 번역이 준 행복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말하고 나니 별 게 없다. 그저 번역을 하다 보니 번역가가 되어 있었다고 할까.
김명남 : 내 경우 중학교 때부터 번역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책을 좋아했지만 작가가 될 능력은 없는 것 같다는 정도의 자의식이었다. 그런데 과학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점점 이 분야와 멀어지게 됐다. 마흔 살쯤 되면 번역을 하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인터넷서점 MD 시절 기회가 생겨 첫 작업을 하게 됐다. 전업 번역가의 길로 접어든지 이제 8년차다.
▲ <기나긴 이별>(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북하우스 펴냄). ⓒ북하우스 |
프레시안 : 직접 번역할 일이 있을 때마다 이른바 '구글링'의 힘을 실감한다. 인터넷 없던 시기에는 대체 어떻게 번역을 했나 싶을 정도다.(웃음) 이세욱 선생님은 그 시절을 경험하셨을 테고, 다른 두 분은 인터넷이 있어도 자료가 많지 않았던 시절을 겪었다고 할 수 있다. 그때의 경험은 지금과는 어떻게 다를지 궁금하다.
▲ 번역가 이세욱. ⓒ프레시안(손문상) |
이세욱 : 그렇게 따지면 1950년대 말에 <돈 키호테>나 <신곡>을 번역한 최민순 신부님은 기적이라고 봐야 한다. 물론 지금은 그 번역이 도서관에서 잠자고 있지만, 작품에 대한 애정이나 독자와 작품을 나누려는 순수한 마음이란 측면에서는 지금도 그 작품을 따라올 게 없을 정도다. 물론 엄밀하게 따지면 불완전한 부분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스페인어 사전도 없는 상황에서, 일본어 중역도 아니라 원어를 가지고 우리말에서 가장 적합한 표현을 찾아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지금 기준으로는 과도한 순우리말 사용을 문제 삼을 수 있지만, 우리말이 서양언어를 얼마만큼 대체할 수 있는가라는 무거운 문제의식을 가지고 접근한 결과라고 본다. 마찬가지로 20년 전에도 인터넷은 없었지만, 말의 가능성에 대한 고민이 있다면 자료나 적합한 번역어를 찾을 수 있었다.
그때는 일차문헌 위주로 자료를 찾았다. 지금 곤충에 관한 책을 번역한다면 일단 위키피디아에서 여러 언어의 버전으로 비교를 해보겠지만, 그때는 <곤충학개론>부터 시작해야 했다. 해외여행도 상당히 원시적이었던 시절이라 번역한 책에 나온 장소를 여행할 때도 모든 자료를 가방에 짊어지고 고단한 코스를 밟아야 했다. 요컨대 탐구 과정이 훨씬 길고 고단했다. 심지어 여행에 들어가는 돈도 사비를 턴 것이었으니까. 그때는 오로지 책과 번역 자체가 좋아서, 내가 좋아하는 작품과 함께 지내는 일이 좋아서 기꺼이 그렇게 했다. 지금에 비하면 많이 불편했지만 애정이나 순수성이 보장되는 측면도 있었다.
예전에는 과정 자체가 고단하므로 오류를 더 많이 범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기에 훨씬 더 치열했던 것 같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정보 검색이 편해졌으니까 어떤 정보를 부정확하게 다뤘다면 바로 불성실의 징표가 된다. 그래서 무서운 시대이기도 하다. 작가가 대부분 살아있기도 하고 검증하는 눈도 많으니까 새로운 고단함이 생겨났다고도 할 수 있겠다.
▲ <여자들>(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열린책들 펴냄). ⓒ열린책들 |
김명남 : 인터넷이 우리 일상에 들어온 게 불과 10년 전이다. 2003년 처음으로 단행본을 번역했을 때 이미 인터넷이 일상화되어 있었지만 집에는 깔려 있지 않았다. 책과 사전을 들고 집에서 번역하다가 PC방에 가서 몰아서 검증했던 기억이 난다.
이세욱 : 최근 에코가 그런 얘길 한 적이 있다. <프라하의 묘지>(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열린책들 펴냄)의 영어 번역자가 책 속 에코의 정보 중 틀린 부분이 있다고 했다더라. 뭔가 하고 찾아봤더니 그 영어번역자가 인터넷에서 본 정보라고…(웃음) 에코는 언제나 일차문헌에 기반하여 글을 쓰는 작가다. 인터넷 문서는 대부분 면밀한 검증을 거친 뒤에야 확신할 수 있는 정보이기 때문에 그에 의존하는 건 항상 경계해야 한다.
한국어 실력 VS 외국어 실력, 무의미한 논쟁
프레시안 : 독자들이 항상 궁금해하는 부분이라면 번역에서 제일 필요한 것이 외국어 실력인가 한국어 실력인가 하는 질문이다. 개인적인 경험을 덧붙인다면, 기사를 작성할 때 필요한 짧은 해외 기사를 번역할 때에도 내 한국어 단어 실력이 이것밖에 안 되나 싶어 충격 받은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한국어 실력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라고 내심 생각하고 있다.
▲ 번역가 박현주. ⓒ프레시안(손문상) |
김명남 : 번역을 시작한 지 8년밖에 안된 입장에서 내린 잠정적 결론은, 그 질문이 별로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사람마다, 책마다 너무 다르기 때문에 번역의 경험을 일반화시킬 수 없다. 번역은 매우 개인적인 작업이고, 그 작업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며 머릿속에서 의역과 직역을 사고하는 수준도 천차만별 아닌가. 그런 질문이 긍정적 논의로 이어진다면 가치가 있겠지만, 지금까지는 별로 긍정적으로 확장된 것 같지 않다.
박현주 : 단어의 선택은 번역하는 사람의 직관에 의해서 결정되는 부분이니까.
김명남 : 이런 질문은 주로 번역가 지망생 사이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 같다. 한국어와 외국어 중 어느 쪽을 더 공부해야 하는지, 혹은 나아가서 과학 등의 전문 분야를 번역하고 싶다면 아예 그쪽을 전공해야 하는지 등을 굉장히 궁금해하더라.
이세욱 : 한국어와 외국어 능력 양쪽 모두 필요하다. 번역이란 행위는 두 단계로 이뤄진다. 전단계에서는 텍스트를 이해하고 해석한다. 외국어 능력이 뛰어나야 정확히 해석할 수 있다. 그 다음 단계에서 한국어로 재구성한다. 번역은 어떤 의미에서 모국어의 표현력, 가능성, 지평을 끊임없이 넓히고 모색하는 과정이다. 서양어의 개념과 비유를 한국어로 무조건 다 끌어들이는 건 아니지 않나. 그쪽 언어에서의 최초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에 바탕하여 한국어로 변형하는 게 가능한지 심각한 고민 끝에 결론 내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 단어의 어원을 알고 어휘를 선택하느냐 마느냐에는 차이가 크다고 본다. 어떤 유래를 거쳐 나온 단어인지 알고 있으면, 그에 대한 한국어 대응어에서 작가의 의도에 훨씬 더 가까운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결론적으로 외국어에 정통할수록 텍스트를 정확히 해석할 수 있고, 한국어 구사가 뛰어날수록 이 장면을 더 실감나게 옮길 수 있다. 번역 불가로 보이는 어떤 장면을 한국어로 표현해 낼 수 있을까? 처음엔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언어의 한계, 문화적 벽이 있다. 하지만 한참 들여다보고 고민하다보면, 뜻밖에 한국어가 지닌 가능성을 발견하면서 길을 찾는 경우가 생긴다. 한국어를 읽고 한국문학을 접하는 경험들이 많이 축적될수록 문제의 장면에 대한 해결책이 나타난다. 머릿속에 항상 선택지가 풍부하게 잠재되어야 한다. 그중 어느 것을 선택할지는 개인의 주관이지만, 그걸 처음부터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는 표현 가능성에서 큰 차이를 가져온다.
▲ <프라하의 묘지>(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열린책들 펴냄). ⓒ열린책들 |
프레시안 : 또다시 독자 입장에서 개인적 속내를 첨언하자면, 영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해외 소설에 더 익숙했고 한국 소설을 그에 비해 거의 읽지 않았다. 한국어로 한국을 얘기하는 소설 언어보다, 한국어로 번역한 해외를 얘기하는 소설 언어에 더 익숙하니, 한국어의 지평에 대해 점점 더 무지해지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이건 비단 번역자뿐 아니라 독자에게도 똑같이 질문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본다.
이세욱 : 서른 살 때 <밑줄 긋는 남자>(카롤린 봉그랑 지음, 이세욱 옮김, 열린책들 펴냄)를 번역했다. 어떤 소설가가 신문에 그 책 서평을 썼는데, '번역자가 고집이 세서 순 우리말 집착을 보인다'고 하더라. 아주 얇은 소설인데도 이걸 읽기 위해 두툼한 우리말사전이 옆에 있어야 한다고, 그 번역서에 사용했던 우리말 어휘들을 나열하면서 누가 이걸 전부 알 수 있겠냐고 묻는데, 난 충격을 받았다. 왜냐면, 이 소설가는 '번역자가 왜 이렇게 우리말을 살려 쓰려고 하는가'를 묻고 있는 거였다. 그냥 쉬운 말로 쓰라는 것이다. 번역이 문학이라는 걸 인정 안 하는 셈이다.
번역은 상위 텍스트를 이해하는 중간적 도구일 뿐 온전한 문학이란 생각을 안 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한국 작가가 한국어로 쓴 글만 한국 문학이 아니라, 어떤 번역자가 혼을 바쳐 번역한 외국 텍스트도 한국 문학 일부로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말로 번역된 어떤 텍스트를 인용하고 싶을 때, 막상 번역 문장에 오류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확하고 좋은 번역을 언제 어디서 누가 봐도 자신 있게 인용할 수 있어야 한다. 독자들이 마음 놓고 번역 문장을 인용할 수 있는 경지, 그게 우리가 꿈꾸는 바다. 그 정도 경지에 이르러야, 지금처럼 하나의 고전 텍스트를 여기저기서 마구잡이로 발간하는, 상호존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동족상잔 같은 야만스런 행위가 중단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박현주 : 재작년 추리소설 번역 관련한 학술대회에서 이세욱 선생님께서 발표하실 때에도 비슷한 얘길 하셨다. 번역이 한국 문학 일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얘기에 그때도 동감을 많이 했다. 번역 언어에 대한 경원시하는 태도는 분명 존재한다. 덧붙이고 싶은 말은, 가독성이라는 유령도 분명 존재한다. 내가 어떤 에세이를 쓸 경우에는 '그 문장이 좀 어렵지만 내용이 뭔지 이해할 수 있다'는 반응이 나오지만, 번역서에 그 비슷한 문장을 쓸 경우 가독성에 딱 맞닥뜨린다. 언어의 장이 오염되어 있다면, 거기서 부딪히고 축적하며 확장되기를 독자들에게도 요구할 수 있는 거다. 출판 사정이 아무리 안 좋다고 해도 무조건 쉽게, 더 낮게만 가는 것은 지적 감흥을 간과하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 번역가 김명남. ⓒ프레시안(손문상) |
김명남 : 소설을 번역할 때와는 많이 다르다. 내가 번역하는 과학 책들의 경우 대부분에는 문장을 고민할 여지가 없다. 아주 명쾌하다. 그래서 뉘앙스보다는 의미를 살리는 걸 먼저 고민하게 된다. 과학에는 기존에 없던 용어들이 너무 많은데, 이걸 영어 그대로 살리느냐 아니면 조어를 만들어야 하느냐의 선택지에서, 둘 다 마음에 안 들 때가 있다. 영어 그대로 쓰는 것은 게으르게 느껴진다. 번역하기 편하다고 영어를 그대로 써버리면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 검색에 그 단어들이 쌓이니까. 나중에 그 관련 분야를 번역하는 다른 이도 '앞에 나온 책에서 이렇게 썼네'하면서 똑같이 사용하게 된다. 반면 조어를 내 맘대로 만들게 되면 그 책을 읽는 전문가 독자들이 '무슨 자격으로 이런 조어를 만들었냐'는 항의를 한다. 그럴 때 무척 고민스럽다.
번역자-글 쓰는 이-독자의 삼위일체
프레시안 : 글을 쓸 때 본인의 스타일이라는 게 분명 존재한다. 하다못해 수동태를 번역할 때도, 이걸 능동태로 바꾸느냐 수동태로 그대로 번역하느냐에서 본인의 취향이 작용할 것이다. 고 이윤기 선생님이 원문을 완벽하게 자기 식대로 소화해서 풀어 번역하는 대표적인 예로 꼽혔는데, 번역하시는 입장에서 그런 개인적 스타일을 살리느냐 마느냐의 부분도 늘 선택의 갈림길이지 않을까.
▲ <개미>(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열린책들 펴냄). ⓒ열린책들 |
나같은 경우는 번역하면서 빙의를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편이다. 카트린 밀레의 <카트린 M의 성생활>(이세욱 옮김, 열린책들 펴냄)을 번역했을 때…(웃음) 빙의가 진짜 힘들었다. 결국 작가와 전화하고 메일 주고받으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장면들을 설명해달라고 요청했고 작가가 차마 공개할 수 없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이 장면은 이런 모습이다'라고 알려줘서 그제야 납득을 한 적도 있다.
잘 쓰인 문장에 대한 집착, 미문에 대한 미련은 분명히 있다. 번역하면서 미화의 충동에 끊임없이 노출된다. 항상 거기에 굴복하는 건 아니지만, 과연 이 작가의 문체가 지금 내가 쓰려는 문장과 같은지를 고민하게 된다. 움베르토 에코의 에피소드 중에 이런 게 있다. 이탈리아에서 작가들에게 고전 번역을 의뢰한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에코가 알렉상드르 뒤마의 <몽테 크리스토 백작>을 맡았다. 에코 자신이 뒤마를 너무 좋아하고 어릴 때부터 수없이 읽었는데, 막상 직접 번역하려 보니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연재소설 특유의 군더더기가 너무 거슬린 거다.(웃음) 본인이 그 군더거기를 다 없애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다 결국 포기했다고 하더라.
결국 답은, 위에 말한 것처럼 안토니오 타부키나 보들레르처럼 자신과 잘 맞는 작가를 선택해서 최대한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며 저자 특유의 리듬과 목소리를 구현해내는 게 최상일 텐데…나 역시 점점 몇몇 작가에게 집중하는 스타일로 가게 된다. 특히 30대 젊은 작가들의 새로운 작품은, 이제 내가 늙었는데 저렇게 천진하게 젊은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내 목소리가 반영되면서 작품이 늙어버리지 않을까, 거기 적응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포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면에서 이윤기 선생님은 굉장히 강한 분이다. 실제로 그분의 번역과 원문을 비교해보면, 어떤 부분에선 완전히 본인이 장악해서 써내려간 부분이 보인다. 그게 그분의 장점이고, 그 능력을 굉장히 좋아하는 독자가 많았다. <그리스인 조르바>(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펴냄) 같은 경우 그 능력이 너무 잘 맞은 결과물이다. 그런데 <푸코의 진자>(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펴냄)처럼 발랄한 작품에선 좀 안 어울리는 경우가 보이기도 했다. 자신의 능력을 잘 살릴 수 있는 작품을 선택하는 게 역시 최선이겠지.
김명남 : 박현주 선생님께 묻고 싶은 게 있다. 김영하 작가의 <위대한 개츠비>(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문학동네 펴냄) 번역에 대해, 그러니까 소설가의 시그니처를 번역에 입혀 마케팅 상품으로 삼는 건 처음 본 것 같은데, 문학 번역자들이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박현주 : 일단 나는 김영하 작가가 번역한 <위대한 개츠비>는 읽지 않아서 다소 외교적으로 답하게 될 것 같다.(웃음) 다른 책의 경우를 떠올려보면, 아무래도 소설가가 번역할 때 자기화하는 경우는 분명히 많은 것 같다. 100퍼센트 원저자의 책을 읽고 있다는 느낌이 안 들 때가 있었다. 어떤 면에선 그게 좋을 수도 있다. 100퍼센트 피츠제럴드, 그리고 80퍼센트 피츠제럴드+20퍼센트 김영하가 있을 때, 독자의 문학적 경험에서 다른 차원의 취향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엄격하게 말하면 번역을 업으로 삼는 입장에선 원문에 가까운 쪽이 내 취향임을 말해둬야겠다.(웃음)
▲ <프란츠 파농>(알리스 셰르키 지음, 이세욱 옮김, 실천문학사 펴냄). ⓒ실천문학사 |
박현주 : 나 역시 기본적으로는 나의 '인장'을 남기기보다는 그림자 같은 존재로 남고 싶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옮긴다는 행위의 속성에 옮기는 사람의 향기가 묻을 순 있겠지만, 가급적 피하고 싶다. 나조차도 아직 완성형의 번역자가 아니라 계속 변하는 입장이고, 다루는 책들의 범위가 워낙 넓다보니 작품들마다 자꾸 달라지는 게 당연하다.
프레시안 : 번역자야말로 제일 꼼꼼한 독자다. 아무리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읽더라도 그게 일이 되는 순간 고통스럽게 다가오는 경우가 많은데, 독자로서 책읽기와 번역자로서 책읽기 사이의 균형이랄까, 그 부분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궁금하다. 독자-번역자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김명남 : 난 그런 어려움은 느껴본 적은 없다. 물론 책 한권을 번역할 때 최소 다섯 번은 읽어야 하니까 좀 지겹긴 한데, 번역이라는 노동이 재미 없거나 싫은 적은 한 번도 없다.
박현주 : 나 역시, 새벽 다섯 시에 동이 터올 때까지 일할 때에는 내가 무슨 영화를 보자고 이러고 있나 싶긴 하지만, 책이 싫거나 지겨워진 적은 없었다.
▲ <지상 최대의 쇼>(리처드 도킨스 지음, 김명남 옮김, 김영사 펴냄). ⓒ김영사 |
이세욱 : 독자인 번역자로서…처음 읽고 경탄하며 예찬할 때는 행복하다. 그래서 열심히 달려들어 순례를 시작하고 여행을 떠나고 작가를 직접 만나면서 탐구를 시작하는데, 애초의 생각과 달리 허점이 드러나고 사사건건 뭐가 걸리기 시작하면 짜증스럽기도 하다. 이 작업을 끝까지 할 수 있을 것인지부터 근본적으로 고민하게 된다. 탐구가 항상 도움이 되는 게 아니더라. 질곡이 되어 돌아올 때가 많다.
정말 좋은 작품을 만났을 때에는 독자로서 더없이 기쁘고 행복하다. 연구를 하면 할수록 정말 잘 썼구나, 이렇게 깊은 뜻이 있었구나 깨닫고, 작품의 무대를 직접 방문해서 그 분위기에 젖고, 그런 순간이 제일 행복하다. 그 순례를 다 마친 다음 원서를 다시 읽었을 때 처음 독서할 때 느낀 것과 많이 다르게 행간을 읽을 수 있다. 그게 번역의 가장 큰 매력이다.
더 나은 번역을 위한 토대가 필요하다
프레시안 : 출판계가 매년 어렵다고들 하지만, 매년 상이한 조건이 발생하면서 어려움의 질 자체가 달라지고 있는 것 같다. 짧게는 8년, 길게는 20년 넘게 번역하시면서 한국에서 더 나은 번역을 하기 위한 토대, 반드시 지켜져야 할 조건에 대해 새삼스럽지만 얘기해보고 싶다.
박현주 : 무엇보다 입금. 번역자에게는 매절이라는 조건이 있으니 일정 수입을 예상하는 게 가능해진다. 하지만 입금이 약속대로 지켜지지 않을 땐 많이 힘들어진다. 예를 들어 좋은 의도로 같이 만들어보자, 의기투합해서 책 작업을 시작했는데 입금이 제대로 안 되거나 기획이 아예 엎어지거나 할 때면 번역자로선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그러면 번역도 일종의 쇼핑이 되어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기존의 브랜드나 큰 회사에 대한 믿음이 강해지고, 그렇지 않은 출판사를 외면하게 되면 거기선 새 책이 나올 수 없게 되고, 악순환이 되풀이된다.
▲ <새로운 무의식>(레오나르도 믈로디노프 지음, 김명남 옮김, 까치글방 펴냄). ⓒ까치글방 |
박현주 : 김영하 작가와 조영일 평론가가 예전에 그 주제로 논쟁을 벌인 적이 있는데, 번역을 주업으로 얼마나 진지하게 꾸려갈 수 있을지 정말 생각해봐야 한다.
김명남 : 그 외에도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게, 책임 떠넘기기 같지만 편집자의 밝은 눈이다. 따로 자격증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 알음알음으로 번역을 시작한다. 처음이 어렵지, 책이 쌓이면 그게 커리어가 되어 비슷한 분야의 책을 계속 작업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편집자들이 그런 번역의 커리어에만 너무 의존하는 건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A라는 번역자의 결과물이 안 좋았는데 편집자가 할 수 없이 다 뜯어고쳐 펴낸 책만 보고, '이 사람이 전에 이런 주제를 번역했지'라는 생각으로 또 맡기면 마찬가지 상황이 펼쳐지더라. 번역을 정말 잘 하는 사람을 찾고 키워주는 게 중요하다.
번역자를 고르는 게 출판사 탓이라는 뜻이 아니다. 출판사가 번역에 좀 더 개입해서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거다. 이 책을 어떻게 만들고 싶은지, 혹은 문체나 기타 특징에서 이런 느낌을 살려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10건 중의 1건도 안 된다. '-다'체일지, '-습니다'체일지부터도 결정이 안 되는 경우도 있고. 번역자를 선정하고, 번역자가 원고를 털고, 그다음 편집자가 고친다라는 과정이 단절로 이뤄지면서 더 좋아질 수 있는 원고가 더 나빠지는 경우를 종종 본다.
▲ <영원한 친구>(존 르 카레 지음, 박현주 옮김, 열린책들 펴냄). ⓒ열린책들 |
김명남 : 애초에 원고를 맡긴 그 편집자가 출판사에 있어주기만 해도 감사하니까…(웃음)
박현주 : 난 어떤 경우에 편집자가 세 번이나 바뀐 적도 있다.(웃음) 어떨 땐 아주 옛날에 원고를 넘겼는데, 바뀐 편집자가 아예 그 원고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있었다. 애초 이 원고에 대한 기획이 어떻게 이뤄졌는지에 대한 방향성도 당연히 없다. A라는 편집자와 B라는 편집자가 원하는 게 다르니 원고도 뒤늦게 바뀔 때가 있고. 불확실한 출판 노동 시장 전체의 문제인 것 같다.
이세욱 : 동료들을 만나면 이 부분에 대해 자주 얘기하는데 답이나 해결책이 없으니 답답한 심정만 되풀이 논하게 된다. 난 결국 본질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번역이란 애초에 무엇이었나를 다시 생각해보고, 편집자들도 번역가들도 독자들도 그런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 야 하지 않을까. 과연 공허한 담론으로만 머물 것인가, 뛰어난 몇 사람은 그럭저럭 살아갈 것이고, 다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함으로서 일은 놓지 못하고 일거리가 떨어지는 걸 염려하면서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나보다 10년 먼저 시작한 번역자 선생님들이 오랫동안 번역자 협동조합에 대해 구상하신 적이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 나서서 움직여야 하는데, 번역의 성격상 혼자 작업을 하는 게 익숙해있으니 실현이 쉽지 않았다. 과연 우리가 하는 노동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 어떻게 협력할 수 있는지, 그게 어떻게 소비자와 만날 수 있는지를 생각하면 협동조합 형태가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계속 하고 있다. 실제로 제가 만난 젊은 친구들 중엔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결국 생계를 꾸릴 수 없다는 벽에 맞닥뜨리고 중간에 좌절해서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이들일수록 작업에 대한 열정도 굉장히 강해서 모든 걸 바칠 각오가 되어있었는데도 떠나게 된다. 이럴 때 저들이 어느 기간 동안은 통장 잔고를 걱정하지 않고 일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줘야 하지 않을까, 협동조합 식으로 기금을 조성해서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런 환경을 출판사에서 만들어주길 기다리기보다, 우리가 우리의 살길을 찾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거다.
박현주 : 여러 측면에 걸친 문제다. 번역자, 편집자가 포함된 출판시장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독서 문화 문제 말이다. 번역이라는 직업에 대한 사회의 가치 평가도 마찬가지다. 번역을 부수적 창작으로 여긴다면, 부수적 수입을 주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김명남 : 번역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왜 책을 안 쓰냐는 질문이었다. 반드시 그런 뜻만은 아니었을 수 있겠지만, 암암리에 번역보다 저술이 더 가치있는 일이라는 관념이 엿보이는 것 같았다.
박현주 : '자기 책 못 쓰니까 번역하는 거 아니야?'라는 질문이 공공연히 나온다. 내 책을 쓴 적이 있지만, 번역과 저술은 전혀 다르다. 두 가지 일을 모두 똑같이 좋아하고 우열을 가리지 않는다.
▲ <바야돌리드 논쟁>(장 클로드 카이에르 지음, 이세욱 옮김, 샘터사 펴냄). ⓒ샘터사 |
이미 번역된 작품을 새로 옮길 땐 뭔가 남다른 생각이 있어야 한다. 새로운 해석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하는데, 그저 표기법 변환 수준의 번역을 보게 되면…기존의 성과에 실질적으론 아무것도 보태지 않는 행태가 되풀이되면 번역의 위상이 높아질 수가 없다. 이를테면 <어린 왕자>가 200종이 나와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고등학교에서 배운 프랑스어만으로도 누구나 그 원서는 읽을 수 있다. 그런데 그걸 왜 200명의 다른 사람들이 똑같이 번역하나. 쉬운 텍스트일수록 번역하기 어렵다는 얘기가 있다. 1970년대 이미 황현산 선생님, 김현 선생님이 번역한 걸 2000년대에 별로 다르지도 않게 또 번역할 이유가 뭐가 있냐는 거다.
문장 자체의 오류만을 얘기하는 건 아니다. 실수는 누구나 범한다. 문제는 그 텍스트의 리듬이나 특징을 고려하여 생명력 있게 생동하는 문학을 생산했는가 아닌가를 두고 번역의 질을 따져야 한다. 그런 수준으로 나아가기 전에는 번역 논의가 항상 같은 자리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정보 디테일을 놓고 누가 맞냐 아니냐에만 머물러 있으니 그 이상으론 나아가지 않는다. 기존 어떤 번역에서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도와 해석, 과감한 문체가 나와야 새로운 번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선배가, 동료가 애써 해놓은 작업에 조금 고친 정도를 두고 자신의 새로움을 주장하는 건 예의와 직업윤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영미권 번역본이 한 종밖에 없다. 100년이 되도록 애초의 번역서를 각기 다른 번역자들이 수정하고 다듬으며 출간하는 거다. 올해 옥스퍼드 쪽에서 나오는 100주년 기념판도 예전 그 판을 고쳐서 내는 거라고 들었다. 영어권에 프루스트를 제대로 이해하는 역자가 없어서 그랬을까? 설령 오류가 있더라도 그걸 계속 영문학의 일부로 안고 가는 거다. 우리는 그게 없다. 예전 번역에 문제가 있으면 어떤 점에서 문제가 있는지 분명하게 명시하고, 새로 번역코자 할 때는 그 문제를 반드시 극복하고 새로운 해석을 낼 수 있어야 한다.
▲ <몸에 갇힌 사람들>(수지 오바크 지음, 김명남 옮김, 창비 펴냄). ⓒ창비 |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당신은 많은 혜택을 받지 않느냐며 내 입을 막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얘기를 한 건 되게 오래전부터고, 20년 동안 달라지지 않았으니…저와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동료들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불신을 걷어내고 행복하게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꿈꾸는데 만만치는 않다.
박현주 : 정말 좋아서 하는 일이다. 창작을 하고 싶은데 못해서 번역을 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문학을 다른 작품으로 옮기는 쾌감이 있다. 단지 필사만 하더라도 거기서 오는 쾌감이 있지 않은가. 번역의 재미가 있고 해독의 의미가 있는 유희적 작업이기 때문에 행복하게 작업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행복하게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 오늘 나온 이야기들이 그 행복의 조건이 되어주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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