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여러분:
실종된 사람을 알고 계십니까? 실종된 친구나 친척, 지인이 있다면, 그리고 그 실종에 대해 아는 바가 있다면, 그 정보를 <저널>에 상세하게 적어 보내주십시오. '출판용 아님'이라고 표시된 이 전언들은 엄격한 비밀을 보장하며 유지될 것이고, 그 안에 들어있는 정보는 가장 믿을 만한 기자들에게만 맡겨질 것입니다. 기자들은 사회 전체가 해결 여부에 관심을 쏟고 있는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서만 그 정보를 사용할 것입니다. 당신이 아는 실종자가 반드시 희생자일 것이라고 짐작하지 마십시오. <저널>에 사실 관계를 보내주시면, 살인자에게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저널>로부터.
▲ <타블로이드 전쟁>(폴 콜린스 지음, 홍한별 옮김, 양철북 펴냄). ⓒ양철북 |
사건의 시작은 1897년 6월 26일 엄청나게 무더운 여름날, 뉴욕의 이스트 강에 둥실둥실 떠내려온 붉은색 꾸러미부터다. 매우 무겁고, 화려한 붉은색과 금색 방수천으로 포장되었으며 밧줄 매듭이 단단하게 묶인 이 꾸러미 안에는 사람의 팔이 들어 있었다.
팔 두 개였다. 팔 두 개가 근육질의 가슴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처음엔 의대생들의 해부학 실습의 장난질로만 여겨졌던 이 주인 없는 팔은, 곧 26번가의 벨뷰 시체 공시소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증언한다. 사후강직이 일어나지 않은, 기이한 방식으로 잘린 팔. 공시소 감독관은 "이 몸 토막 임자는, 24시간 전에는 살아 있었습니다"라고 선언했다. 곧 뉴욕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이 사건을 추적할지 말지 꾸물거리던 경찰보다 먼저 뛰어든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기자들이다.
다시 말해 <타블로이드 전쟁>에서 가장 흥미로운 중심인물은 살인범으로 지목된 두 사람보다도, <저널>의 발행인 랜돌프 허스트와 <뉴욕 월드>(이하 '월드')의 발행인 조지프 퓰리처다. 퓰리처와 허스트는 그리스의 그 익숙한 비극 이래 늘 되풀이됐던 부자간의 비극을 그대로 압축한 인물처럼 보인다. (여기서 퓰리처는 우리에게 익숙한 '퓰리처상'의 그 퓰리처가 맞지만, 그 퓰리처 '이전의' 퓰리처의 맨 얼굴을 내보인다.) 헝가리 출신 이민자였던 가난뱅이 퓰리처는 남북전쟁에 참전했고, 이후 서부에서 돈을 끌어 모아 동부 뉴욕으로 건너와 신문사 건물을 세웠다. 뉴욕에서 가장 높은 건물 중 하나였던 <월드> 건물은 "세계에서 가장 넓은 인쇄실" 위로 거대한 금색 돔을 설치했다.
미국으로 이민오는 사람들이 신대륙에서 처음으로 보는 광경은 자유의 여신상이 아니라 퓰리처의 금빛 건물이었다.
퓰리처는 시들시들했던 신문 <월드>을 사들인 다음, 최고의 기자와 편집자들을 끌어 모았고 "단조롭고 특징 없는 지면을 대담한 헤드라인과 선정적인 목판 삽화를 곁들인 지면으로 재탄생"시켰다. "선적 소식과 시장 동향은 이제 1면 기삿거리 취급을 받지 못했다." 퓰리처는 "여성 독자, 이민자 독자"를 주요 독자층으로 상정했고 "뻔뻔스럽게 자극적이고 요란한 언어, 감상, 최신 유행을 좇는 호기심 위주의 행사"를 쉴 새 없이 외쳐댔다.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가 유명해지자, 여성 기자 넬리 블라이에게 직접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지시하여 완수케 했고, 화성에서 운하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화성에 사는 '독자들'이 볼 수 있게 거대한 광고판을 설치하려고 하기도 했다." 또한 세계 최초로 컬러 만화 <옐로 키드>를 신문에 실었다. 이 만화가 인기를 끌자 "경쟁 신문사에서는 <월드>를 만화 저널리즘이라고 비웃었"고 그런 연유로 "옐로 저널리즘(황색 언론)"이라는 별명이 탄생했다.
▲ '황색 저널리즘'이라는 단어를 탄생시킨 만화 <옐로 키드>. <뉴욕 월드>에 실렸던 이 만화는 곧 <뉴욕 저널>로 옮겨간다. (출처 http://cartoons.osu.edu/) |
<월드>의 프리랜서 기자로 일했던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퓰리처와 정반대 위치에 있었다. 그는 미국 본토박이였고, 캘리포니아의 상원의원을 지낸 광산왕의 아들이었다. "딱 보기에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그는 "신문을 이용해 돈을 버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을 빠른 속도로 흡수했고, 퓰리처로부터 빼먹을 것을 다 빼먹고 나자 10년 뒤 <저널>을 사들여 환골탈태시켰다.
수 페이지에 걸쳐 이어지는 다수의 컬러 만화가 실렸고, "좋은 헤드라인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1센트라는 가장 저렴한 가격을 매겼고, 뉴욕 시민들을 설레게 할 엄청난 양의 광고를 실었다. "잉크와 펄프로 만들어진 놀이동산"에서 뛰노는 그는 "의족을 단 도둑이 양철 지붕 위에서 발작을 일으킨 것만큼이나 요란하게" 도시를 침략했고, <월드>와 스승 퓰리처가 서서히 둔하고 멍청한 공룡처럼 보이게끔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켰다. 오죽하면 굴든수프 살인사건을 시민들에게 해결해보라며 현상금을 내걸었을 때, 어떤 시민은 이것이 허스트의 소행이라고 주장했겠는가.
"신문사에서 의사를 통해 적당한 시신을 입수해, 이 사건이 가능한 한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극적인 효과를 노리며 시신 토막을 여기 저기 뿌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연하게도, 허스트는 매우 유쾌해하며 이 파격적인 추리를 신문에 실었다.
굴든수프 살인사건을 보도하기 위해 <저널> 등의 신문사들은 빠르게 발전해갔다. 일요일자 부록이 아니라 평일에도 컬러 삽화가 실렸고, 속보 기사에도 컬러를 사용하게 됐으며, 처음으로 법원에 전화선을 설치해 목격자 증언을 식자공에게 실시간으로 들려줌으로써 "증인들의 입에서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치 마법이라도 부린 듯 동시에 활자화"되었다.
시민들은 신문을 통해 살인사건의 실시간 정보를, 말이 되든 안 되든 진실이든 거짓말이든 온갖 시시콜콜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선정적인 신문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피에 굶주린 사람들의 열광이 신문을 부추겼다. 신문은 시민-구경꾼들에게 당대의 허구적 영웅 셜록 홈즈가 되어보라고 부추겼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마치 굴든수프 살인사건의 당사자인 양 착각했으며, 그 살인사건에 실제 연루된 범인들은 신문을 통해 자신들의 전혀 새로운 이미지를 재창조하며 현실과 허구를 섞어버렸다. 그렇게 신문(과 범죄)은 뉴욕 대도시 시민들의 '일상'이 되었고 판단의 준거가 되었으며 (영화가 대중화되기 전) 최고의 오락거리가 되었다. 굴든수프 사건이 끝나갈 때쯤 허스트는 자랑스럽게 선언했다. 이것이 "현대 언론의 진화 과정에서 마지막 단계"라고.
"행동-이것이 새로운 언론의 지표다. 경찰이 이스트 강 살인 사건을 풀 수 없는 미스터리로 생각할 때 <저널>은 스스로 탐정단을 조직했다. 신문은 선동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을 때에 바로 잡아야 한다."
'황색 저널리즘'이라는 말이 이때 생겼다고 해서 19세기 말부터 "신문이 더러워졌어"라고 비웃을 일은 전혀 아니다. 범죄를 선정적으로 보도하는 읽을거리는 이미 19세기 초반 영국과 미국에서부터 싸구려 주간지 '페니 드레드풀스'와 싸구려 소설 '다임노블' 등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고 있었다. 기술적 발전으로 인해 <월드>나 <저널> 같은 신문들의 '속보'가 가능해졌다는 것, 그러니까 범죄를 선정적으로 포장하는 기술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좀 더 정교하게 발전했을 뿐이며 그 자체로는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다.
▲ <뉴욕 저널>에 실린 살인범들의 초상. |
다만 예전에는 이것이 1페니짜리 '싸구려'였지만, 19세기 말에는 퓰리처와 허스트라는 신문 재벌들끼리의 사생결단이, 범죄가 돈벌이가 된다는 걸 알아차린 이 재벌들끼리의 자존심 싸움이 본인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저널리즘의 선정적 속성을 아주 빠르게 변모시킨 것이다. <타블로이드 전쟁>의 결말에 나오다시피, 20세기 말의 저널리즘은 이미 19세기 말에 완성되다시피 했다.
1830년대 선정적인 신문들의 살인사건 보도기사만 보고 에드거 앨런 포가 <마리 로제 미스터리>를 썼던 것처럼, 19세기 말 신문들은 추리소설을 모방하며 팩트를 픽션화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말들의 전쟁, 타블로이드 전쟁. (이 와중에 입을 열 수 없는 머리 없는 시체만 딱하게 됐다) 그렇게 피 냄새는 잉크 냄새로 바뀌었다. 20세기가 시작되었다.
루퍼트 머독이 신문사를 사들이기 시작하고 테드 터너가 처음으로 방송국을 산 것도 네드 브라운에게는 익숙한 일로 여겨졌다. 전에도 그런 일을 보았던 것이다. 허스트가 충격적인 범죄를 집중 취재한 방식, 곧 중요한 내용이 있건 없건 모든 각도에서 끝없이 뉴스를 업데이트해 긴장감 넘치는 서사를 만들어내는 방식이 바로 텔레비전 뉴스 채널의 24시간 보도의 전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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